하나님의 기억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억의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요한복음 5:28, 29, 신세.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국의 목적은 무있이며 그것은 어떻게 실현될것이며 그것은 무엇에 달려 있는가?
완전한 인간은 영광스러운 창조주의 온전한 반영(反映)이다. 지상에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상태 였으며 또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통치 밑에 살게 될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거처를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처럼 만물이 새롭게 되며 각자의 삶의 형태(形態)가 드디어 완전하게 될때에 새롭게 된 지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의 모양을 고대로 반영하게 될 것이다. 마치 잠잠한 연못에 파아란 하늘과 산과 초목이 고대로 아름답게 반영됨 같이 저희들도 하나님의 거울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때가 올 것을 생각만 하여도 말할수 없이 기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억에 달려있다.—계시록 21:2-5; 22:1-3.
2. 오늘날이 심판날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삶의 형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2 아- 그러나 그러한 날은 아직 멀었으며 나는 지금 이 세상의 악한 조직에 얽매어 있으며 이 부패된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이 공부의 목적은 당신에게 도움을 주어 오늘날이 심판날이며 당신이 신세계 사회의 일원으로서 신천 신지에 일치하여 당신의 삶의 형태를 바꾸며 또한 그것이 지금 가장 긴급한 문제라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오늘날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신 뜻과 목적을 지지하는가 혹은 반대하는가를 결정하는 때다. 요한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은 영광스러운 환상을 본후 즉시 이처럼 말하였다.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시록 22:10, 11.
3. 우리 공부의 근거를 어데서 얻을수 있는가? 또한 삶의 형태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3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는 너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억에 달렸다는 말에 당황하지나 않은가? 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여기 취급된 제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바울이 히브리 11장에 기록한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히브리 11장은 놀랄만한 정의(定義)와 믿음에 대한 기록이 있으므로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장은 그러한 동시에 하나님의 기억에 관한 본 제목의 골자와 우리 삶의 형태에 관한 것을 잘 조화시켜 말하고 있다. 삶의 형태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과 생활하고 있는 삶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어떠한 원칙 밑에 지배되던가 그러하지 않으면 아무런 원칙도 없이 다만 일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조류(潮流)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실로 오늘날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
4. (ㄱ)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ㄴ) 히브리 11장에는 어떠한 상이 기록돼 있는가?
4 히브리 11장에다 사도 바울은 각각 이름을 열거하여 『믿음으로』 누구는 무엇을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자기의 굳은 믿음을 입증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다고 열거(列擧)하였다. 그러나 그 믿음은 누구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을 믿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아야할 질문이다. 바울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였다. (히브리 11:6) 이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영원히 계신 것과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것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90:2)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진실로 구하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약속도 믿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자에게 부여될 상도 영원히 계속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어떠한 약속인가? 사도 바울은 그것에 관하여 동 11장에 계속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하였으며 믿음을 가진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장소를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였으며 그 편지에 계속하여 그 성은 『살아계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히브리 11:16; 12:22, 또한 계시록 21:2를 보라) 이 장은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거룩한 본의 최후 결말로 인도한다. 바울은 참다운 믿음을 나타낸 최초의 인간으로 아벨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이 먼 과거와 먼 미래를 연결함에 있어 기억과 본이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기억과 본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점에 관하여 조금 논의해 보고저 한다.
기억 (記憶)
5, 6. (ㄱ) 기억은 어떻게 놀라운 능력으로 보이는가? (ㄴ) 그것은 또한 어떻게 귀중한 선물인가?
5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은 먼저 가졌던 생각과 인상을 보류하였다가 다시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이다. 우리는 기억이 두뇌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하여 연구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과학도 이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확실한 대답을 할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기억력이 아주 부족하고 불완전한데 대하여 한탄한다. 때로는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잊어 버리며 딴 이름을 말할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특별한 기억력의 범위와 가능성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수 없다. 그렇게 불완전할지라도 인간 정신의 활동력을 생각해볼때 우리의 눈이 돌아갈만하다. 예컨대 한 재능있는 음악가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피아노에 앉어 자기 마음을 집중시켜 몇 시간씩 그렇게 복잡한 악보를 일일히 고대로 기억해내어 모든 화음(和音)을 고대로 재생시킬수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완전히 회복되는날 우리의 기억력은 제한을 받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기억하기로 결정한 것은 죄다. 기억해 낼 수 있을것이다. 그와 반면에 우리 마음 가운데서 없애버리고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고의적으로 잊어버릴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아- 그것을 기억할수 있다면』 하는 말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날이 곧 도래할 것을 누구나 다 원하고 있다.
6 기억은 놀라운 선물인 동시에 또한 귀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귀중한 선물이 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기억할만한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것이다. 현상태에 있어서도 우리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 과거에 가졌던 행복한 경험을 생각하며 회상(回想)할 때 말할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된다.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나 깊은 우정(友情)을 느낀 것도 아마 옛 추억일 것이다. 또한 독자들의 대부분은 여호와의 놀라운 목적과 자비로운 섭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정확히 이해하였을 때를 선하게 기억할 것이다. 정말 그러한 기억은 강하게 또한 부드럽게 우리 마음 속까지 움지이리 만치 깊은 인상을 주며 그러한 것을 추억할때 우리 입술에는 가볍고 행복스러운 미소(微笑)가 떠 오르며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우게된다. 자비로운 창조주께서 주신 이 사랑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현명하게 사용하자.
7.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인도를 어데서 볼수 있으며 그 인도는 또한 누구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게 하는가?
7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은 어떠한가? 창조주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며 그 기능과 능력이 어떠한 가를 인간으로서 논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스스로 인간에게 알리신 것만은 우리가 논할수 있다. 그러면 창조수께서 인간에게 알리신 일이 있는가? 물론 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창조 사업만 하여도 창조주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아름답게 나타내고 있다. 사도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능력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는 그 만드신 만물로 말미암아 그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을 깨달음이니라.』 (로마 1:20, 신세) 그러나 인간 족속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더욱 충분히 계시하여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시킨 그의 말씀 가운데 있다. 우리는 또한 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게 된다. 인간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이 말을 분명히 인간도 하나님과 비슷한 정신 활동과 사고력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성경에 나타난 대화(對話)의 처음 기록에 인간의 기억에 대한 시험이 들어 있다. 그 뱀은 해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에 대한 해와의 대답을 보면 해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완전히 되풀이 할수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창세기 3:1-3.
8. 성경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련된 그의 기억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8 다음은 하나님의 기억에 관한 문제를 히브리서 11장에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보자. 또 11장에 바울은 과거에 믿음을 가진 남녀의 이름을 열거하여 그들이 모다 공동적으로 믿음을 지킨데 대한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상은 천적 도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을 최초로 가진 아벨에게 도성(都城)에 관하여 말한 일이 있는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벨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최초의 약속을 주셨는데 도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뱀의 머리를 상할 여인의 『씨』에 관한 것이였다. (창세기 3:15; 로마 16:20) 성경에 기록된 이 문제를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최초의 약속을 늘 명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결국 어떻게 실현(實現)시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또한 결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시기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 10) 이 굉장한 선언은 하나님의 기억이 결코 두서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두서 없는 일은 흔히 인간에서 볼수 있으며 또한 잘 기억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주의를 기우리고 있는 문제 뿐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시며 결정하셨다는 것은 항상 그 일을 명심하시며 계속적으로 또한 계획적으로 기억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것도 포함된바 그는 목적이 있는 계획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말 즉 『본』이라는 말이 필요하게 된다.
본 (模型)
9. 성경에 『본』이란 말은 어떻게 사용돼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다른 말과 관련이 있는가?
9 본이란 말은 고대로 보고 만들 본보기 혹은 인도의 역할을 할수 있도록 꾸며 만든 것이다. 그말은 『모형』이라는 말과도 흡사하여 장차 올것을 나타내거나 혹은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본』이라는 말이 몇번 나오는데 그에 대한 좋은 예는 히브리서 8장에서 볼수 있다. 거기다 사도는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장막에 대한 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모형, 欄外註)을 쫓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 8:5) 다음에 바울은 그 본 혹은 모형의 성취에 관하여 설명하였으며 그 성취가 모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얼마나 더 좋게 또한 크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대체로 히브리인에 대한 편지는 이 문제를 근거로 논의한 것이다.
10. (ㄱ) 모형에는 늘 무있이 따르게 되는가? (ㄴ) 이것은 우리의 연구 제목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10 본이나 모형을 말할 때는 반드시 거기 특별한 목적과 계획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라 먼저 말한 예에 있어서도 그 본 자체는 우연한 기회로 된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가진 종말에 따라 된것이다. 따라서 그 목표의 달성(達成)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든 방법과 순서는 원 모형에 엄밀히 일치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더 부가되는 것과 그것을 더 확대하는 것은 있을찌라도 그것들은 반드시 원 모형과 목적에 일치되어야 할것이다. 우리가 지금 말해온 것과 얼마나 꼭 맞는 가를 알라. 지금 경우에 있어 그 원 모형은 어떠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에덴에서 약속된 말 곧 하나의 자손(혹은 씨)에 대한 약속이다. 아벨이 믿음의 근거로 삼을 것은 그 약속뿐이 였으나 그것만으로서도 충분하였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약속을 부가하셨으나 모다 처음 약속과 일치되는 발전에 지나지 않었다. 그런고로 바울은 히브리 11장에 그사람들을 모다 한줄기에 연결시킬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홀로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을 믿었으며 처음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 받을 굉장한 약속의 상을 받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바와 같이 이 문제에 『성』이란 말이 모형 가운데 들어 오게 되었는데 그것 역시 처음 약속과 일치된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하는 조직 혹은 정부로 상징되어 있는 그 성에서 통치하실 분은 곧 약속된 『씨』인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여인이 탄생시킨 왕 그리스도 예수 이기 때문이다.
11.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 11장에 열거한 사람들과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
11 또한 연속되는 줄기는 그리스도 탄생 전에 살든 고대 충성자들로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줄기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들까지 연결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증인의 무리 가운데서 중심이 되며 핵심이 된다.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며 이 공부는 결정적 시기에 처해 있는 우리를 도와주며 우리가 따라야할 올바른 본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히 느끼게 하는가 그 줄기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로부터 얻는 격려(激勵)와 충고 외에 『우리 믿음의 지도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의 본을 얻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 12:1, 2, 신세) 우리도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걸은 길을 걸어 같은 성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오늘의 악한 제도와 부패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여야 할것이다.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都城)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다.—히브리 11:13; 13:14.
12, 13. (ㄱ)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의 기억과 모형은 그의 이름과 말씀에 대하여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ㄴ) 바울의 토론은 한쪽면 만으로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12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기억이 실패 없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항상 명심하고 계시는 그의 목적의 모순 없는 본에 대하여 바울은 신앙 문제 가운데서 얼마나 우리에게 명백히 설명하여 주고 있는가! 사실상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이러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스스로 선언하심과같이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주신 모형을 실패 없이 성취시키는데 대한 믿음의 처음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언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신다. 또한 그의 말씀도 그가 조물주 되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실마리를 찾아서 문제를 하나씩 순서있게 취급하여 빛나고도 일치 조화되는 모형을 짜낸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다. 그 줄거리는 간단하나 그것을 근거로 세밀한 부분까지 서로 복잡하게 짜 놓았다.—말라기 3:6; 창세기 9:15, 16; 레위 26:42, 45; 에스겔 16:60.
13 바울의 토론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하나님의 기억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크게 북돋아 줄뿐 아니라 기타 문제에 관하여도 믿음에 대한 굳은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부활에 대한 믿음
14. (ㄱ) 부활을 믿으려면 참다운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께서 표시하였는가? (ㄴ) 그리스도 교국의 가르침은 어떻게 이 교리를 헛되이 만드는가?
14 예수께서 『기억의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나니』라고 대 선언을 하셨을 때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하신 것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5:28, 29, 신세) 예수께서는 성경에 가르치고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 신앙에 대한 엄한 시험의 하나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교육에서는 참다운 믿음에 대하여 부활에 대한 교리는 그렇게 필요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성경의 진리 보다도 그들의 교리를 받아드리기 쉽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사망은 생명의 종식(終息) 혹은 끊어짐이 아니라 더 완전한 생명에 이르는 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받아드림으로서 부활은 다만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 버리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 부활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도 교육의 거짓 교리와 싸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부활에 관하여서는 미리 파수대나 기타 왙취타워의발행물을 통하여 충분히 연구되어 있다. 우리 공부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억을 더 잘 이해함으로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북돋아주는데 있다. 따라서 이문제가 우리 생활의 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가를 알게 될 것이다.
15. 요한복음 5:28, 29절의 전후 구절로써 무엇을 알수 있는가? 기억의 무덤과 께헨나를 대조하여 말하라
15 예수 자신이 부활에 대하여 무제한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부활이란 것은 예수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죽은자들을 이르키는 권한과 권능을 포함한 모든 영광은 천적 아버지께 돌려야 할것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다. 사망으로부터 부활된다는 것은 다시 생명으로 이르킴을 받는 것이 『부활』 (히랍어, 아나스다시스) 이라는 말의 참다운 뜻인 것이다. 요한복음 5:19-27을 읽어 보면 이것을 잘 이해할수 있다. 28절과 29절에서 절정(絶頂)에 이르게 된다. 『기억의 무덤』이란 말에 특히 유의하라 이것은 『께헨나』 (우리말 번역은 지옥)라는 장소와 정 반대가 되는 곳이다. 께헨나에는 사형받은 중범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는 그들이 너무 악하여 사망으로부터 부활할수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매장도 하지 않고 기억의 무덤도 없이 께헨나에 버리움을 받았던 것이다.
16. (ㄱ) 예수께서는 전도서 9:9, 10과 어떻게 일치되는 말씀을 하셨는가? (ㄴ) 요한복음 11:25에 있는 그의 선언은 어떻게 증명돼 있는가?
16 예수께서 『기억의 무덤』이라고 사용하신 것은 전도서 9:5, 10에 있는 령감받은 기사에 완전히 일치되는 증거다. 전도서에는 『무릇 산 자는 죽을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하였다. 그러나 음부는 인간이 일생을 마치고 죽는 날 들어가게 되는 일반적 무덤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두실수 있는 천부(天父)의 권능과 능력을 예수께서는 확신하셨으므로 그 당시 사용하든 『기억의 무덤』 이라는 말을 친히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후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셨는데 예수께서는 이것을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는 라사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서 죽은자 가운데서 이르키심으로 증명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친구가 병으로 죽기 전에 도달하지못하였으나 그로 말미 암아 기뻐하신데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요.』 또하나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부활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데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11:4, 15, 17, 25.
17. 욥은 부활을 믿음으로서 어떠한 말을 하엿는가?
17 죽은자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두신다는 그의 능력을 믿은 것은 예수 당시의 새로운 일이 아니였다. 그것은 욥에 관한 고대 기록으로서 분명히 알수있다. 욥기 14:13에 기록된 말은 얼마나 굳은 믿음에 표현이 였는가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記憶)하옵소서.』
18. 하나님의 기억 중에 죽은자가 모다. 포함되는가 하는데 대한 성경적 대답은 어떠한가?
18 벌써 말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해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사람들은 기억해 두시나 기타 사람들은 일부러 잊어버리신다. 그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은 이러하다. 『의인에 대한 기억은 복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언 10:7, 미표.
19. 바울은 특히 히브리 11장에서 부활의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논의하였는가?
19 또한 사도 바울도 죽은자의 부활에 대하여 무제한으로 믿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 없다. 바울도 이 부활이라는 교리가 믿음에 대한 엄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데네서의 그의 경험으로서도 알수있다. (사도 17:31, 32) 바울의 기록 중에서 부활이란 문제가 특히 뚜렸이 나타나있다. 예를 들면 모다 잘 알고있는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매우 힘있는 토론이 전개되어있다. 또한 로마서 4:16, 25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하였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 11장에 취급한 신앙의 문제와 부활과의 관계에 대하여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동 11장에서 바울은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인용하여 우선 약속의 자손을 출생시킬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말하여 일반적 상식으로 볼때 그들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수 없으며 둘다 『죽은 자와 방불』 하였으나 약속의 씨를 출생시킬 하나님의 권능을 믿었다고 하였다. 또한 이어 바울은 히브리 11장에 열거한 사람들을 모다 포함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하고 끝으로 설명하여 말하기를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히브리 11:12, 13, 39, 40) 따라서 이에 대한 결론은 약속되고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성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성취될 것을 그들이 즐길수 있도록 되기 위하여서는 거기 반드시 죽은자에 대한 부활이 필요하다는 것이 된다.
20. 우리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하여 왜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는가?
20 이것을 기이히 여기는가? 그러한 일이 있을수 있다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없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학교를 같이 다닌지 오랜후에 한사람의 이름을 듣게 되는 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다. 곧 그는 그사람을 그려본다. 다시 말하면 눈앞에 그사람을 다시 만들어 본다. 그가 늘 입던 옷은 어떠하였던가 그의 얼굴 모양은 그의 여러가지 특징과 성격은 어떠하였던가 하고 그 음악가를 또한번 생각해 보라 그는 악보(樂譜)가 많은 곡을 하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보가 다른 곡을 몇개라도 외워 가지고 그것을 고대로 재생(再生)시킨다. 인간은 여러가지 면에서 제한되어있으며 불완전하나 인간의 기억에 있어서도 놀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인간을 창조하고 그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정확히 알고 계시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는 자들을 기억의 무덤에서 불러내 재생(再生)시킬수 없겠는가? 그럴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개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특징과 성격을 모다 기억하고 계신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질문하기를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 밖에 없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사도 26:8; 요한복음 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