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월 1일 화요일
악인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한다.—잠언 28:5.
마지막 날의 끝이 가까워지면서 악한 자들은 계속 “잡초처럼 돋아나고” 있습니다. (시 92:7) 따라서 도덕 표준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이해하는 데는 어른이” 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14:20) 오늘의 성구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 성구의 후반절에서는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2:7, 9에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 성구에서는 여호와께서 “올바른 자를 위해 실용적인 지혜를 모아 두신다”고 알려 줍니다. 그 결과 올바른 자들은 “의롭고 공의롭고 공정한 것을, 선한 행로 전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노아, 다니엘, 욥은 그러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에스겔 14:14) 오늘날 하느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러려면 그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파18.02」 8면 1-3항
1월 2일 수요일
그들은 ···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사도 19:5.
부모나 성서 연구 사회자나 회중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방식이 아닙니다. (요한 1서 4:8) 우리는 성서 연구생을 가르치면서 하느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연구생이 진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멍에를 메려는 열망이 있다면 기꺼이 침례를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14, 15) 침례를 받을 수 있는 특정한 나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전하고 장성하는 속도는 연구생마다 다릅니다. 침례받는 날은 정말 행복한 날입니다. 또한 헌신과 침례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헌신의 서원에 따라 살아가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멍에를 메는 것에 비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린도 후서 5:15; 마태 16:24. 「파18.03」 6-7면 14-17항
1월 3일 목요일
후대하기를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후대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히브리 13:2.
후대를 할까 하다가 결국 안 한 적이 있습니까? 그랬다면 유쾌한 교제를 나누고 오래 지속될 우정을 맺을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일지 모릅니다. 후대는 외로움을 이겨 내는 한 가지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후대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종들은 흔히 여러 가지 책임을 수행하면서 아주 바쁘게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후대할 시간이나 활력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느낀다면, 자신의 스케줄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케줄을 조금 조정하면 후대를 주고받을 시간과 활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후대할 것을 권합니다. 후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꼭 필요하지 않은 활동을 줄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파18.03」 16면 13-14항
1월 4일 금요일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누가 4:43.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영적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예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과 봉사를 통해 언제나 아버지 여호와를 본받기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셨으며, 하느님의 뜻과 표준에 따라 사셨습니다. (요한 8:29; 14:9; 15:10) 예를 들어, 여호와의 동정심을 묘사한 이사야서의 내용과 예수의 감정을 묘사한 마가복음의 내용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사야 63:9; 마가 6:34) 우리도 예수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기꺼이 동정심과 관심을 보입니까? 또한 예수께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분이 느끼신 모든 감정과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은 그분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가 됩니다. 「파18.02」 21면 12항
1월 5일 토요일
자녀를 ··· 여호와의 징계와 훈계로 양육하십시오.—에베소 6:4.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며 오늘날에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디모데 후서 3:1-5) 자녀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을 타고나지 않습니다. 물론 양심을 타고나기는 하지만, 양심은 교육 즉 징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2:14, 15) 한 성경 참고 문헌에 따르면, “징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아동 발달”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자녀가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양육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에 찬 징계를 받는 자녀는 대개 안정감을 느낍니다. 자녀는 그런 징계를 통해 자유에는 한계가 있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좋게든 나쁘게든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배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부모가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자녀 양육에 관한 견해나 양육 방식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부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인지 몰라 고민하지 않으며, 인간의 경험이나 생각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파18.03」 30면 8-9항
1월 6일 일요일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빌립보 2:12.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이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제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아직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해도 그러합니다. 그 점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거나 새로운 압력을 받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십 대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어릴 때는 학교에서 생일 케이크 한 조각 못 먹는다고 해서 여호와의 증인을 하기 싫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이를 좀 더 먹고 성적 욕구가 강해지면 어려움이 생길 수 있죠. 여호와의 법에 순종하는 게 언제나 가장 좋다는 강한 확신이 꼭 있어야 해요.” 성인이 되어 침례받은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믿음의 시험을 받습니다. 결혼이나 건강 혹은 직업 때문에 그런 시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직면합니다.—야고보 1:12-14. 「파17.12」 24면 4-5항
1월 7일 월요일
격분하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에베소 4:26.
다윗만큼 불공정한 대우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벗인 다윗은 억울한 일을 겪어도 분을 품고 그분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분노를 그치고 격노를 가라앉혀라. 속상해하지 말고 악을 행하지 마라.” (시 37:8) 분노를 ‘그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죄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시는 여호와를 본받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시 103:10) 또한 분노를 ‘그치는’ 것은 실생활에도 유익합니다. 분노는 고혈압이나 호흡 장애와 같은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간과 췌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소화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나면 차분하게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순간적으로 화를 못 참고 터뜨리면 오랫동안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온한 마음은 몸에 생명을 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잠언 14:30) 그러면 어떻게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르고 형제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성경의 지혜로운 조언을 따른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파18.01」 10면 14-15항
1월 8일 화요일
당신은 나를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충성스러운 자가 구덩이를 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시 16:10.
다윗은 자신이 결코 죽지 않거나 무덤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이 늙어서 죽었다고 분명히 알려 줍니다. 다윗은 죽은 뒤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의 도시’에 장사되었습니다.” (열왕기상 2:1, 10) 그러면 시편 16:10은 누구에 관해 말한 것입니까?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되신 지 몇 주 후에, 베드로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시편 16:10이 누구에 관한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사도 2:29-32) 그는 다윗이 실제로 죽어서 묻혔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부활을 내다보면서” 시편 16:10을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베드로의 말을 반박했다는 성경 기록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쓴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자신의 말을 더욱 뒷받침했습니다. (사도 2:33-36) 베드로가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셨을 때 시편 16:10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파17.12」 10면 10-12항
1월 9일 수요일
모든 것을 세어 무게를 달고 그 무게를 전부 기록했다.—에스라 8:34.
중앙장로회는 기도하고 신중히 검토하면서 조직의 기금을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태 24:45) 들어오는 헌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예산을 세우고 그에 따라 기금을 사용합니다. (누가 14:28) 사도 바울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구호 기금을 모았습니다. 바울은 구호 기금을 가져갈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모든 일을 정직하게” 처리하게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8:18-21) 오늘날 조직은 에스라와 바울을 본받아 체계적인 절차에 따라 헌금을 관리하고 사용합니다. (에스라 8:24-33)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은 많은 참신한 시도를 했습니다. 조직에서는 여러분의 관대한 헌금으로 최대한 많은 일을 이루기 위해 지출을 줄이고 일을 간소화할 방법들을 찾고 있습니다. 「파18.01」 20면 12-13항
1월 10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골로새 3:15.
사랑과 친절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동료 그리스도인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자신이 불친절하게 말하거나 행동했던 때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잘못을 눈감아 준 형제 자매들의 사랑과 친절에 감사하게 되지 않습니까? (전도 7:21, 22) 특히 우리는 참숭배자들이 연합을 누리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소식을 전하며, 비슷한 문제들을 겪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친절로 서로를 용서함으로 그리스도인 연합에 기여하고 계속 생명의 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경고의 본보기들은 우리가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상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예를 들어, 카인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를 시기하여 그를 대적했습니다. 또한 사울 왕은 다윗의 성공을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파17.11」 27면 9-10항
1월 11일 금요일
그 일을 알아보고 철저히 조사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신명 13:14.
장로들이 사법 위원회에서 섬길 경우, 심각한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회개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이 판단해야 합니다. 회개했는지의 여부가 언제나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개인의 견해, 성향, 마음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계시록 3:3) 죄인이 자비를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여호와와 예수와는 달리 장로들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장로라면, 진정한 회개를 분별하는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습니까? 첫째로, 지혜와 분별력을 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열왕기상 3:9) 둘째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 즉 진정한 회개를 “세상의 슬픔”과 구별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과 충실한 종이 발행한 출판물을 조사하십시오. (고린도 후서 7:10, 11) 성경이 회개하는 사람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성경은 그들의 감정, 태도, 행실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파17.11」 17면 16-17항
1월 12일 토요일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할 것입니다.—디모데 후서 3:2.
오늘날 책이나 영화, TV 프로그램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정상적인 것으로 묘사하거나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인 가정의 기초를 뒤흔듭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부모에 대한 순종을 중요하게 여겨 왔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들이 부모를 때리면 시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권리를 잃었습니다. 로마법에서 아버지를 때리는 것은 살인과 동일한 중죄로 여겨졌습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은 모두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권고합니다. (출애굽 20:12; 에베소 6:1-3)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깊이 생각해 봄으로 불순종하는 태도에 물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점을 이해하면 감사하는 태도를 더욱 기를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부모에 관해 긍정적으로 말함으로 다른 청소년들도 자신의 부모를 긍정적으로 보게 도울 수 있습니다. 「파18.01」 29면 8-9항
1월 13일 일요일
그들은 저마다 바람을 피하는 피신처 같고 폭풍우를 가려 주는 은신처 같으며, 물 없는 땅의 시냇물 같고 메마른 땅의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다.—이사야 32:2.
오늘날 심각한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회복하려면 회중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첫째, 장로들이 심각한 죄를 다루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여호와의 마련입니다. (야고보 5:14-16) 둘째, 이 마련은 회개하는 범죄자를 강화시켜 주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갈라디아 6:1; 히브리 12:11) 셋째, 장로들은 회개하는 죄인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여 그들이 고통과 죄책감을 덜도록 돕는 사명을 받았으며 그렇게 할 훈련도 받아 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장로들을 “폭풍우를 가려 주는 은신처”라고 부르십니다. (이사야 32:2) 이 마련이 하느님의 자비의 표현이라는 데 동감하지 않으십니까? 많은 하느님의 종들은 장로들을 찾아가 도움을 받으면서 큰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파17.11」 9-10면 8-9항
1월 14일 월요일
징계[는] 고통스럽다.—히브리 12:11.
마음이 아프겠지만 제명된 가족 성원과는 전화, 문자 메시지, 편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로도 일상적인 접촉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희망을 간직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를 떠난 사람이 결국 그분께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고린도 전서 13:7) 가까운 친족이나 가족이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그가 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 “나에게 돌아오너라”라는 여호와의 호소에 호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4:22)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보다 다른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면 그분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자들이 가족의 반대를 받더라도 용기를 나타내어 충성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칼”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면, 그러한 어려움에 잘 대처하기 위해 여호와를 의지하십시오. (이사야 41:10, 13) 여호와와 예수께서 당신을 좋게 여기시고 당신의 충실한 행로에 대해 상 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기쁨을 누리기 바랍니다. 「파17.10」 16면 19-21항
1월 15일 화요일
동정심 어린 부드러운 애정[을] 입으십시오.—골로새 3:12.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자연히 동정심을 느낍니다. 우리는 병과 노화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왕국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한 작가는 치매로 고생하는 연로한 어머니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이러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실수로 옷을 더럽혀서 옷을 빨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를 자주 방문하는 두 명의 증인이 찾아온 것입니다. 자매들은 도와 드릴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도와줄 일이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자매들은 옷을 빨고 치우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작가는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증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몸이 아프거나 연로한 사람들을 볼 때 동정심을 느껴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까?—빌립보 2:3, 4. 「파17.09」 9면 5항; 12면 14항
1월 16일 수요일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요한 1서 3:18.
우리는 가능하다면 “보이지 않게” 즉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형제들을 위해 사랑의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 6:1-4)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서 솔선해야 합니다. (로마 12:10) 예수께서는 기꺼이 비천한 일을 하심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본을 남기셨습니다. (요한 13:3-5, 12-15) 우리도 그처럼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면 겸손을 기르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 13:7) 우리는 자신의 교육 수준, 재산, 영적인 특권을 근거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로마 12:3)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성과에 대해 칭찬받을 때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그 성과에 대해 자신이 어느 정도 혹은 그들과 동일하게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더라도 그러합니다. 「파17.10」 9면 9-10항
1월 17일 목요일
나는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좋은 소식을 위해 모든 일을 합니다.—고린도 전서 9:23.
많은 사람은 봉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면 듣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형제는 수년간 우리 잡지를 읽어 온 연로한 남자를 재방문했습니다. 형제는 단순히 최신 호 「파수대」만 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잡지에 나오는 성구를 읽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 1:3, 4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부드러운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느님은 ··· 우리가 온갖 시련을 겪을 때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 말씀에 크게 감동받은 집주인은 형제에게 그 성구를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에게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소식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이 봉사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습니까?—사도 19:20. 「파17.09」 26면 9-10항
1월 18일 금요일
그의 뼈와 살을 한번 쳐 보십시오. 그가 틀림없이 당신의 면전에 대고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욥 2:5.
마귀가 하느님께 도전했을 때, 충실한 하늘의 피조물들은 분명 충격과 분노와 모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신중하면서도 매우 적절한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분노하기를 더디 하셨고 사탄의 반역을 공정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출애굽 34:6; 욥 2:2-6)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아무도 멸망되지 않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시간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9) 여호와께서 자제에 관해 보이신 본을 통해 우리는 말하고 행동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십시오.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기도로 지혜를 구하십시오. (시 141:3) 흥분하면 감정적으로 행동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살면서 성급하게 말하거나 행동해서 후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잠언 14:29; 15:28; 19:2. 「파17.09」 4면 6-7항
1월 19일 토요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라.]—스가랴 6:11.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웠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다윗 왕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면류관을 씌운 것에는 미래에 영원한 왕 겸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왕이 될 대제사장의 이름은 ‘싹’입니다. 성경은 이 ‘싹’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이사야 11:1; 마태 2:23, 각주) 왕 겸 대제사장인 예수는 여호와의 하늘 군대를 이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백성이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한 무리로서 안전하게 거하도록 열심히 일하십니다. (예레미야 23:5, 6) 가까운 장래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주권을 옹호하고 여호와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들을 정복하는 일을 이끄실 것입니다. (계시록 17:12-14; 19:11, 14, 15) 하지만 ‘싹’이 심판을 집행하기 전에 하셔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파17.10」 29면 12-14항
1월 20일 일요일
옛 인간성을 그 행위와 함께 벗어 버리십시오.—골로새 3:9.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져서 냄새가 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러워진 옷을 가능한 한 빨리 벗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습관들을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동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서 없애 버려야” 한다고 분명히 교훈했으며, 우리는 그 지침을 따르기 원합니다. 바울이 말한 잘못된 행실 중 한 가지는 성적 부도덕입니다. (골로새 3:5-9) 성경에서 “성적 부도덕”으로 번역되는 원어 단어의 의미에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성관계, 그리고 동성애가 포함됩니다.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적 부도덕”과 관련해 “몸의 지체를 죽이라”고 즉 모든 욕망을 없애 버리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러한 생생한 표현은 잘못된 욕망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강력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런 조처를 취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죄로 이끄는 욕망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파17.08」 18면 5-6항
1월 21일 월요일
나는 ···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겠다.—미가 7:7.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예언자 미가가 살았던 시대와 비슷합니다. 그는 악한 왕 아하스가 통치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때에는 온갖 부패가 만연해 있었으며, 백성은 “악한 일을 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미가 7:1-3) 미가는 자신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미가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여호와를 기꺼이 기다리는 태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와는 다릅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릴 뿐, 그날이 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꺼이 기다리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을 적절한 때에 즉 가장 좋은 때에 이루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을성과 기쁨으로 온전히 인내”합니다. (골로새 1:11, 12)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여호와께서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투덜대면서 기다린다면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골로새 3:12. 「파17.08」 4면 6-7항
1월 22일 화요일
여호와는 온유한 자를 일으키신다.—시 147:6.
여호와께서는 언제든 우리를 위해 행동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온유라는 특성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스바냐 2:3) 온유한 사람은 잘못된 일이나 자신이 해를 입은 것을 하느님께서 바로잡아 주실 때를 기다립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반면에 하느님께서는 “악한 자는 땅바닥에 내던지십니다.” (시 147:6ㄴ) 정말 강한 표현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사랑을 받고 그분의 진노를 피하려면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미워해야 합니다. (시 97:10) 예를 들어, 우리는 성적 부도덕을 미워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음란물과 같이 우리를 성적 부도덕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계속 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119:37; 마태 5:28) 매우 힘든 싸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여호와의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싸움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다가가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파17.07」 19-20면 11-13항
1월 23일 수요일
낮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는 여호와께 빌려 드리는 것이다.—잠언 19:17.
왕국 권익을 증진하기 위해 물질적 자산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여건을 잘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생활이 여유롭지만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거나 도움이 더 필요한 곳으로 이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헌금이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의 헌금은 가난이 널리 퍼져 있지만 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구역에 출판물을 공급하고 그곳의 전파 활동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콩고 민주 공화국과 같은 나라에서 대부분의 형제들은 가족이 먹을 식품을 살지 성경을 살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사려면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번 돈을 다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조직은 많은 사람의 헌금으로 모아진 자금을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여, 성경을 번역하는 일과 가족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영적으로 굶주린 성서 연구생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는 일을 지원해 왔습니다.—고린도 후서 8:13-15. 「파17.07」 9면 11항
1월 24일 목요일
내 아들아, 지혜롭게 되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하여라. 그러면 나를 조롱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잠언 27:11.
충실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숙고해 보면 위로를 얻게 됩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시련을 인내할 때 유익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겪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불쾌하시게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련은 하느님의 주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낼 기회가 됩니다. 시련을 인내하면 “승인받은 상태”가 되고 우리의 희망이 더욱 강해집니다. (로마 5:3-5) 욥에 관한 기록은 “여호와가 애정이 매우 부드럽고 자비로운 분”임을 잘 보여 줍니다. (야고보 5:11)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주권을 옹호하는 우리 모두에게 상 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참을성과 기쁨으로 온전히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로새 1:11) 물론, 여호와의 주권이 입증되는 일에 계속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주권을 지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평소에 자주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17.06」 26면 15-16항
1월 25일 금요일
온갖 탐욕을 경계하십시오.—누가 12:15.
오늘날 많은 사람은 유행하는 패션이나 최신 전자 기기에 지나친 관심을 갖습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질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회중 집회를 준비하는 것보다 최신 자동차나 패션에 관한 정보를 얻고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일상적인 활동에 몰두하느라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데 사용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물질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오늘의 성구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다음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 모두 전적인 정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태 6:24)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물질주의를 비롯한 “육체의 욕망”과 계속 맞서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에베소 2:3. 「파17.05」 25-26면 15-16항
1월 26일 토요일
나는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좋은 소식을 위해 모든 일을 합니다.—고린도 전서 9:23.
우리는 불완전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전파하는 소식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봉사의 직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일을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로마 1:14, 15; 디모데 후서 4:2) 그러한 사랑은 바울이 심한 반대를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2)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그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바울이 봉사의 직무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호별 방문이나 공개 증거나 비공식 증거를 통해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사도 5:42; 20:20)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봉사의 직무를 확장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보조 파이오니아나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언어를 배우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거나 심지어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도 16:9, 10. 「파17.06」 10-11면 8-9항
1월 27일 일요일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 남아 있지 못했다.—계시록 6:14.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악한 일들은 일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나 단체들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종교 조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본성, 성경의 신빙성, 이 땅과 인류의 미래를 비롯한 수많은 문제에 관해 거짓말을 해서 많은 사람을 속입니다. 이 세상의 정부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전쟁과 민족 분쟁을 조장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며, 뇌물과 특혜로 세력을 키웁니다. 탐욕스러운 기업들은 어떠합니까? 기업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천연 자원을 고갈시키고 순진한 소비자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극소수는 막대한 부를 누리는 반면 대다수는 가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 낡은 세상의 정부들과 정부에 의지하고 있는 모든 조직들이 기초까지 흔들릴 것이라고, 다시 말해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또한 그들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왕국을 대항하는 모든 자들도 함께 멸망될 것입니다.—예레미야 25:31-33. 「파17.04」 11면 7-8항
1월 28일 월요일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열왕기상 21:29.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께서는 아합에게 어느 정도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잠언 17:3) 이러한 여호와의 결정은 아합의 끔찍한 범죄에 관해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결정이 바뀐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것은 나봇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믿음의 시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믿음을 지키는 데 겸손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겸손하다면 하느님께서 불공정한 일을 하실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명 32:3, 4) 나봇과 그의 아들들과 가족들은 여호와께서 의로운 사람들을 부활시키실 때 공의가 온전히 시행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욥 14:14, 15; 요한 5:28, 29) 또한 겸손한 사람은 “참하느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감추어진 것이 선한지 악한지 판결하실 것”임을 기억합니다. (전도 12:14)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요인들까지 고려하셔서 판결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겸손은 우리가 영적인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파17.04」 24면 8-9항
1월 29일 화요일
진정한 친구는 항상 사랑한다.—잠언 17:17.
혼란스러운 세상 상태 때문에 많은 형제들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난민 형제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주 힘겹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현지의 예의범절과 시간관념을 익히고, 세금과 청구서 대금을 납부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현지 법규에 따라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훈육해야 합니다. 이 모든 변화에 한꺼번에 적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존중심과 참을성을 가지고 도와줄 수 있습니까? (빌립보 2:3, 4) 그에 더해, 당국에서 난민 형제들이 회중과 연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들이 집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특정한 일자리 제의를 거절하자 정부 기관에서 지원을 중단하거나 체류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두렵고 절박한 나머지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난민 형제들이 도착하면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동정심을 나타내고 실제적인 지원을 베푼다면 그들이 믿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잠언 12:25. 「파17.05」 5면 9-10항
1월 30일 수요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입니다.—마태 24:12.
예수께서는 “세상 제도의 종결”의 표징의 한 가지 부면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4:3) 1세기에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한 유대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반면에 그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하”고 하느님과 동료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열심히 나타냈습니다. (사도 2:44-47; 5:42) 하지만 1세기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사랑이 식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에 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꾸짖을 일이 있다. 네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계시록 2:4) 그들의 사랑이 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이유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인 생각을 가진 세상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에베소 2:2, 3. 「파17.05」 17면 1-3항
1월 31일 목요일
여호와께 한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마태 5:33.
재판관 입다는 담대한 지도자이자 용감한 전사였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겸손한 주부였습니다. 참하느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 이 두 사람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 하느님께 서원을 했고 충실하게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여호와께 서원하기로 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겼습니다. 성경에서 서원이라는 말은 하느님께 하는 엄숙한 약속을 뜻합니다. 서원을 하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선물을 바치거나 어떤 봉사를 수행하겠다고 또는 어떤 것을 멀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서원은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서원을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서원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말인 맹세와 같은 효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창세 14:22, 23; 히브리 6:16, 17. 「파17.04」 3면 1-2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