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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리히 쯔빙글리’와 하나님의 말씀
  • 깨어라!—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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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적 정치적 개혁가
  • ‘쯔빙글리’가 수행한 일
  • 다른 중요한 점들
  • 검을 잡음
  • 회고하여 보면
깨어라!—1970
깨70 4/8 5-8면

‘울리히 쯔빙글리’와 하나님의 말씀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계(界)에서는 1969년을 ‘쯔빙글리’의 해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50년 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 ‘울리히 쯔빙글리’가 ‘쭈리히’ 대성당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는 1519년 1월 1일이었다. 그가 설교단에 섰을 때 교구민들은 깜짝놀랐다. 그가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하겠다고 엄숙히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날 그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마태 복음 제1장부터 시작하였다.

‘로마 가톨릭’ 사제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쯔빙글리’는 이미 평범한 사제가 아니었다. 1484년 1월 1일에 ‘비르트하우스’에서 태어난 그는 대가족 가운데서 자라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시민으로서 산악지방의 보안관이었으며 그 곳에서 살고 있었다. 사제였던 그의 삼촌으로 말마암아 그는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는 ‘바아젤’에서, 다음에 ‘베른’과 ‘비엔나’에서 공부하였는데 ‘비엔나’에서 1498년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마침내 그는 ‘바아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고 교회 학교에서 선생으로서 일하도록 처음으로 임명되었다.

‘쯔빙글리’는 얼마 안있어 고전어인 희랍어, ‘라틴’어, 심지어 고대 ‘히브리’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던 그 당시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망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이다” 하는 결론에 이른 ‘토마스 뷔텐바하’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그 암흑 시대에 그리스도교국을 뒤덮은 무식의 암흑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결론이 얼마나 계몽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선생 ‘쯔빙글리’는 ‘가톨릭’ 교회의 수도승의 미신과 극단적인 세속화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일대 정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그는 학자들의 모든 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독점적인 권위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성서 자체가 성서의 해석자이며, 성서의 풍부한 내용이 경건하고 독실한 성서 연구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1516년에 그는 ‘에라스무스’가 발행한 희랍어 성서를 입수하였다. 그는 이제 ‘글라루스’에서 선생겸 사제로 있었다. 그는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매일 성경의 한 귀절을 읽고 해설함으로써 낡은 우화와 미신을 점차적으로 진리로 대치하였다. 그는 성경의 선생으로서 너무나 유명하여져서 ‘쭈리히’에서 한 자리가 비었을 때 그 자리에 앉도록 초대되었다.

사회적 정치적 개혁가

‘쯔빙글리’가 이처럼 자신을 성서 진리의 투사라고 선언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의 활동은 결코 성서의 진리를 평화스럽게 선포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나 사도들과는 달리 그는 그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교회 내의 개혁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속 통치 권세자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에 ‘스위스’ 사람들 가운데는 보수를 두둑히 준다면 누구를 위해서라도 싸우는 직업 군인이 많았다. 법률로서 ‘쭈리히’가 외국의 직업적 복무를 금지하였을 때에 그는 기뻐하였다. 그는 교황이 그의 전략을 위하여 ‘스위스’ 군인들을 편입시키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와 관련한 그의 말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그들은 의젓하게 추기경의 모자와 외투를 걸쳤읍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흔든다면 돈과 면류관이 떨어질 것이며, 여러분이 그들을 비튼다면 여러분의 아들, 여러분의 형제, 아버지, 그리고 친구의 피가 나올 것입니다.”

그 당시에 만일 지금과 같이 신문이 있었다면 이 ‘가톨릭’ 사제가 개혁을 부르짖고 있었으므로 신문의 표제들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쯔빙글리’가 면죄부와 유골을 없애다. 교황의 연금을 거절하다. 신랄한 반대자!” “1522년에 ‘쯔빙글리’는 단식률을 범하다. ‘프로샤우어’ 인쇄소가 관련되다. 주교가 반감을 갖다. ‘쯔빙글리’는 첫 인쇄 설교로 보복하다.” “사제들의 독신률에 대한 열띈 논쟁” “‘쯔빙글리’가 독신률을 무시하고 1522년에 미망인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하다.”

그후 1523년 1월 29일에 소집된 ‘쭈리히’ 시의회 회의날이 왔다. 이것은 중대한 회의였다. 왜냐 하면 그 회의의 목적이 교회의 내분을 조성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67개조에 달하는 토론점을 제시하였다. ‘쯔빙글리’는 사방으로부터 교회법상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회의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았으며 시의원들과 가까이 있는 희랍어와 ‘히브리’어와 ‘라틴’어 성서들로 둘려 있었다.

그 다음에 ‘쯔빙글리’의 차례가 되었을 때 장내는 술렁거렸다.—‘쯔빙글리’가 많은 비난에 대하여 대답할 시간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처음으로 그를 본다. 키는 보통이고 여위었으며 머리칼은 붉으레하였고 혈색이 좋았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와 신중한 어조로 청중을 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신사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여기 있는 토론점 가운데서 이단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가 대답하겠읍니다!”

정오의 휴회가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시의원들이 ‘쯔빙글리’가 이단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훌륭하게 성공하였으며 그의 일을 수행할 권한을 받았다. ‘상갈’ 주의 시장 ‘요아킴 바디안’은 깊이 만족하였다.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 ‘세바스티안 메이어’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가리켜 “전 [스위스] 연방의 복음 전도를 위한 승리의 메아리”라고 묘사하였다.

‘쯔빙글리’가 수행한 일

그 후로는 신속한 진전이 있었다. ‘알프스’ 산에서 ‘스위스’ 골짜기로 내리 부는 건조성 열풍과도 같이 교회 혁명의 바람이 휩쓸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본을 받아 ‘쯔빙글리’의 제자들은 교회에 난입하여 우상과 십자가와 기타 성물들을 부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아야 된다고 한 영감받은 말씀을 몰랐거나 무시하였다. (디모데 후 2:24) 또한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거짓 종교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데 필요한 것이 완력이 아니라는 말씀도 그들은 잊었다.—고린도 후 10:3-6.

‘쭈리히’ 대성당은 문이 닫히고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였다. 개혁은 착착 진행되었다. 미사는 주의 만찬으로 대치되었으며 참여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다. 수녀들과 수도승은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결혼을 하거나 세속적인 직업을 갖기 시작하였다. 사제들은 독신 생활을 탈피하였다. 그리고 이 때는 1523년이었으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파가 아니었다!

‘쯔빙글리’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유포된 숭배 형식과 미신적이고 세상적인 관습을 철저히 정화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가 교회의 개혁을 합법적으로, 단계적으로 수행할 질서정연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그를 지지한 시의원들과 신부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그의 철저한 노력으로 6년 동안에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놀라운 개혁이 이루어졌다.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업적은 그가 ‘바아젤’에 있었을 때부터의 친구였던 ‘레오 유트’의 도움으로 성서를 발행한 일이다. 그 당시의 독일어로 된 이 성서는 ‘루터’의 성서보다 먼저 나왔다. 그것은 ‘루터’의 번역판보다 질에 있어서 약간 떨어지지만 사람들이 그들이 아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다른 중요한 점들

‘쯔빙글리’는 그의 사업의 초기에 그의 설교를 열심히 들은 사람들이 ‘스위스’ 연방의 다른 곳으로 가서 그들이 알고 있는 성서 지식을 전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몇몇 주들은 ‘로마’의 권세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쯔빙글리’를 잠잠하게 하고 그의 일을 좌절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는 강력한 ‘가톨릭’의 중심지에서 토론에 초대되었지만 ‘쭈리히’ 시의회 의원들은 ‘쯔빙글리’가 극단적인 원수들에게 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그 전세기에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휴스’를 속여서 형주에 태워죽인 일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베른’과 ‘쭈리히’는 개혁 운동의 두 요새였다. 그리고 ‘쯔빙글리’가 1528년에 자진하여 간 곳이 ‘베른’이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특히 주의 만찬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 경우에도 ‘쯔빙글리’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다음에 그는 ‘베른’ 대성당에 가서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 끝에 연로한 한 남자가 그의 법의를 벗어놓고 이렇게 엄숙히 선언하였다. “만일 미사가 그러한 것이라면 나는 오늘부터 어느 때도 미사를 거행하지 않겠소.” 그리하여 ‘베른’ 대성당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아마 ‘쯔빙글리’의 경력 가운데 또 다른 특기할 만한 점은 ‘마르린 루터’와 처음으로 상면한 일일 것이다. 이 때쯤 ‘비텐베르크’의 개혁자에 대한 그의 당초의 열정이 식었다. ‘루터’의 용감한 태도가 ‘쯔빙글리’로 하여금 비슷한 행로를 취하도록 힘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후에 “나는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배웠다” 하고 선언하였다. 그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반대였다. ‘루터’는 역경 가운데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염세적이었고, 반대로 ‘쯔빙글리’는 ‘알프스’의 행복한 소년이었으며 쾌활하고 낙관적이었다. 주의 만찬과 그 중요성에 대한 문제가 마침내 그들 사이에 논쟁의 주요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충돌을 막기 위하여 ‘헤쎄’의 군주 ‘필립’은 양쪽 견해의 수석 대표자를 초대하여 ‘마르부르크’ 성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때는 1529년이었다. ‘바아젤’의 ‘쯔빙글리’와 ‘에콜람파드’가 한 쪽의 대표였으며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이 반대편 의견을 대표하였다. 토론은 이리저리 진행되었지만 ‘루터’는 시종 요지부동이었다. 처음부터 힘있게 “이는 내 몸이라” 하는 말을 분필로 쓰고 그의 견해를 강조하였다.

‘쯔빙글리’는 그의 신념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표상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의 실제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며 신비적인 의미로도 그렇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표상물이 그의 위대한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그의 몸을 의미 혹은 대표한다는 개념을 알릴 의도로 말씀하셨다고 ‘쭈리히’ 개혁자는 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반대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헤쎄’의 ‘필립’은 그들을 설득시켜 그들이 동의한 기본적인 교리의 성명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검을 잡음

한편 증오와 반대의 불길한 구름이 ‘스위스’ 연방을 덮고 있었다. 원래부터 ‘스위스’의 다섯 개의 ‘가톨릭’ 주들은 ‘베른’과 ‘쭈리히’의 강력한 두개의 주에 대하여 전적으로 분개하였다. 1531년 봄에 ‘베른’의 지도자들은 ‘가톨릭’ 주에 식량 공급을 하지 않음으로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쯔빙글리’는 재난을 막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며 논쟁을 평화롭게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쭈리히’는 뒤늦게 방비 태세를 갖추었다. ‘가톨릭’ 세력이 공세를 취하였으며 ‘쭈리히’ 사람들은 ‘베른’의 군대가 그들을 원조하기 전에 ‘카펠’에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군목으로 복무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보다 실제 검을 든 사람들을 지지하였다. (에베소 6:17) 그는 자신의 성서 번역판에서 예수께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고 경고하신 말씀을 틀림없이 읽었을 것이다. (마태 26:52) 그리고 ‘쭈리히’ 개혁자의 최후는 바로 그 말씀대로였다. 아침에 그의 시체는 의기양양한 적군들에 의하여 전쟁터에서 확인되었다. 그의 시체는 ‘가톨릭’ 주의 수효대로 다섯 동강을 내어 태웠다.

회고하여 보면

‘쯔빙글리’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성서에 예언된 대로 성서의 가르침이 명백해질 때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5:19; 17:16; 야고보 4:4) 그는 세상적인 길과 세상적인 운동에서 떠나야 하고 왕국과 하나님의 의를 첫째로 구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마태 6:33) 개혁된 회중 내에서도 이교의 사상과 태도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인간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 내고 있으며 그 말씀을 헛되게 하고 있다.

‘쯔빙글리’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는 축복을 받을는지 모른다. 왜냐 하면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영의 계몽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거짓 종교가 “큰 바벨론”에 속하였음을 이해할지 모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큰 ‘바벨론’을 머지 않아 종결시키실 것이다. 큰 ‘바벨론’은 개혁의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전적으로 위배되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하여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계시 18:1-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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