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우리 모두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가?
“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읍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 이 이름 밖에는 없읍니다.”—사도 4:12, 새번역.
1. 우리 모두 공동으로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구세주(救世主)—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류 세상이 매우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전 인류의 구출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혈육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곳에서 출발하였읍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같은 우주선(宇宙船)인 이 지구를 타고 있읍니다. 만일 이 우주선이 침몰한다면 우리 모두는 한없는 우주 공간의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버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닥칠 것입니까? 우리의 우주선인 이 지구상의 사태 진전을 보면, 세계적인 대격변이 현대 과학자들의 예측 보다도 훨씬 가까운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참화가 참으로 발생할 것입니까? 그런 참극을 예방할 수 있는 구세주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읍니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대답을 알기를 원합니다.
2. 오늘날 어떤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구세주가 임해 있지 않으며, 어떤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합니까?
2 오늘날 구세주는 국제 연합 건물이 서 있는 미국 ‘뉴우요오크’ 시에 임해 있지 않습니다. 세계 평화와 안전을 도모한다는 그 기구의 회원국들인 144개국은 자기 나라만이라도 침몰하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읍니다. 구세주는 독재자들이 대를 이어가며 세계 공산화의 환상을 가지고 철권 통치를 해온 소련의 ‘모스크바’에 임해 있지 않습니다. 구세주는 세 가지 세계적인 종교가 관심을 두고 상호 분쟁을 일삼는 지역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임해 있지 않습니다. 구세주는 과거나 현재에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띤 어느 다른 도시에도 임해 있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국가들의 고민과 악화되는 국민들의 탄식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3. 세상적인 사람들은 무슨 진리를 거절하며, 구세주를 어디에 기대하는 것이 논리적이며 이치적입니까?
3 세계 상태는 전혀 장래를 약속해 주지 못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사고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분명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한사코 거절합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필요로하는 세계적 구조가 인간보다 높은 근원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물론적 정신을 가진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강력하고 지성적인 구조자는 오직 인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람들의 사상을 따른다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자도 아니요 우리 자신의 피조물도 아님을 잘 알고 있읍니다. 우리가 단순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감탄스럽게 설계되어 만들어졌으며 너무나 훌륭합니다. 우리를 설계하고 우리를 만드신 분, 우리를 이 우주선인 지구에 두신 분은 초인간적인 분임에 틀림없읍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분일 것입니다. 인간은 그분의 감탄스런 작품이므로 그분은 마땅히 우리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세주를 마련해 주실 분으로 그분을 기대하는 것은 현대주의적 생각은 아닐지 모르지만 논리적이며 또한 이치적인 일입니다.
4. 누가 인간의 가슴 속에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넣어 주었으며, 오래 전에 그분은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셨읍니까?
4 그러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이분이 인간의 가슴 속에 온 인류의 구출에 대한 희망을 넣어 주셨으며, 구세주를 기대하게 하신 분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한 당돌하고 웅장한 사상이 다른 어느 곳에서 나올 수 있겠읍니까? 통용 기원이 시작되기 700여년 전, 그리고 불교 기원이 시작되기 1세기 이상 전에, 그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케 하셨읍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를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이사야 45:22-24.
5. 무엇이 우리로 구원을 위해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해서는 안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여호와에 의한 구원은 땅끝까지 이를 수 있으며, 인류의 온 세상을 포함할 수 있읍니다. 그분에게만이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우리가 앙망하며, 그것을 확신있게 간구할 수 있읍니다. 세상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미워한다고 하여 우리가 그분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분을 등져서는 안됩니다. 그분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모두 그분 앞에 직접 나아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은, 강제에 의하지 않고 그분을 앙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성서의 마지막 책에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라는 여호와의 옛날의 초대가 세계적인 호응을 받을 것을 어떻게 알려 주고 있읍니까?
6 여호와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앙망하라는 초대는 성서 스물 세째권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 책에는, 고대 중동 지방의 ‘예루살렘’ 사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영감받은 예언이 들어 있읍니다. 그 하나님의 초대가 세계적인 호응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계시록」 혹은 「묵시록」이라고 하는 책에 예언되어 있읍니다. 「계시록」은 성서 가운데서 예순 여섯권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며, 기원 제1세기에 기록된 책입니다. 영감받은 필자, ‘세베데’의 아들 ‘요한’은 그 책 제7장 9절과 10절에, 그가 본 예언적 환상을 기술하였읍니다. 우리 시대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향할 것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썼읍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
구세주가 밝혀지다
7, 8. (ㄱ) “어린 양”이라는 칭호는 어떤 방향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ㄴ) 「계시록」에서는 어디서부터 그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무엇을 알려 줍니까?
7 그런데, 모든 인종과 나라와 피부색의 사람들로 구성된 이 무리가 외친 말 가운데,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께 만이 아니라 “어린 양에게”도 있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상징적으로 “어린 양”이라고 한 이분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읍니까? 있읍니다!
8 확실히,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낼 필요가 있읍니다. 먼저, “어린 양”이라는 이 칭호는, 귀염둥이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칭호는, 희생, 곧 우리 모두에게 매우 필요한 희생과 관련이 있읍니다.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라는 칭호가 이분에게 27회 사용되었읍니다. “어린 양”에 대한 설명은 제5장에 처음 나오는데 거기에는 필자 ‘요한’이 “어린 양”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록이 있읍니다. ‘요한’은 이런 말을 들었읍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계시 5:5) ‘요한’은 울음을 그친 다음 무엇을 보았읍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 ···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시 5:6.
9. 이 ‘유대’ 지파의 사자는 누구이며, 이 칭호는 그 분에 관해 무엇을 나타냅니까?
9 그러면, 성서에서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 하였고 ‘예루살렘’의 초대 ‘유대’ 왕 ‘다윗’의 “뿌리”라고 한 이 어린 양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족장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며, ‘유대’ 지파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창세 49:9, 10; 마태 1:1-6) 그가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예언된 “실로”이며, “모든 백성이 복종”할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그분이 실제 정부의 왕(그분의 조상 ‘다윗’의 경우와 같이)이 될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그 정부는 지상의 모든 백성이 거기에 복종하여 유익을 받을 정부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기름부음받은 자가 된 것과 같이 그분의 자손인 이분도 기름부음받은 자가 될 것이었읍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야”라고 불렀으며, 희랍어를 사용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라고 불렀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예수 기름부음받은 자) 혹은 “그리스도 예수”(기름부음받은 예수)라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왕같은 ‘유대’의 사자로 비유되었으면서 왜 “어린 양”으로도 비유되었읍니까?
10. ‘요한’이 본 사실에 의하면, 이 어린 양은 과거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그 결과 무엇을 샀읍니까?
10 필자 ‘요한’은 그가 계속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기술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가] 책을 취하시매 ···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시 5:8-10.
11. 이 어린 양같은 분은 무슨 목적으로 죽임을 당하셨으며, 이사야 53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예언하였읍니까?
11 그러므로 왕국을 삼을 이 “‘유대’ 지파의 사자”는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하였읍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서 죄를 씻기 위해 흠없는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도록 규정된 바와 같았읍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의로운 “종”이었읍니다. 그분에 관하여 영감받은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예고하였읍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7, 12; 사도 8:30-35.
12. 우리는 범죄자이며 범법자이므로 어린 양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왜 부인할 수 없읍니까?
12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강력한 이유를 밝혀 줍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 곧 인간의 창조주께 바친 희생의 어린 양과 같으므로 우리는 그분을 필요로 합니다. 앞서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범죄자와 범법자에 대해 말하였읍니다. 현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범죄자나 범법자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결함이 있고 범죄의 경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어디선가 받았읍니다. 우리는 모두 그 책임을 우리 부모에게 돌릴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의 부모로부터 불완전성과 범죄의 경향을 받았읍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부부에게까지 갈 수 있읍니다. 성서에서는 이 최초의 부부를 ‘아담’과 ‘하와’라고 부릅니다. 후손에게 불완전성과 범죄의 경향을 물려 준 부모의 책임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서 끝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불완전성과 죄를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활동은 완전”하시므로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완전하게 만드셨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신명 32:4, 신세; 누가 3:38; 창세 1:26-28.
13. 우리의 출생 장소에 관하여 무슨 질문이 생기며, 무엇 때문에 우리 모두는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하였읍니까?
13 지난 6천년 동안 우리 가운데 낙원 곧 ‘에덴’ 동산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창조된 후 ‘에덴’에 있게 되었읍니다. (창세 2:7-25) 물론, 본래의 그 지상 낙원은 오늘날 모든 인류를 안락하게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온 땅에 확장되어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세계적인 낙원에서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모두 불완전하게 태어났고 나쁜 경향을 가지고 있고 병들고 죽게 되었읍니까? 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오직 우리 모두의 조상인 최초의 인간 부부가 나쁘게 되었다는 것밖에 없읍니다. 그런데, 성서에 들어 있는 사실적인 역사 기록은 그러한 합리적인 설명과 일치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를 갖기 전에 잘못을 범하였읍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죄하였읍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완전성의 과녁으로부터 빗나간 것입니다.
14. 왜 하나님께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 밖으로 추방하실 권리가 있으셨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비를 베푸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살아 있읍니까?
14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입법자이며 재판관인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역을 하면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읍니다.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아담’과 ‘하와’에게 형벌을 선고하신 데 대해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읍니까? 비난한다면 정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하신 데 대해서는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읍니까? 그럴 수 없읍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창설자이시므로 재산권을 가지고 계셨읍니다. 그분은 자기의 부동산 내에 누구를 입주시킬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계셨읍니다. 이기적이고 지각없는 사람들이 훌륭한 건물을 누추한 빈민굴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보십시오. 전반적인 인류가 이 땅을 얼마나 황폐시키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핵전쟁으로 온 땅에 위협을 주고 있으며, 심각한 황폐와 오염으로 지구 표면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읍니다. 잠간 생각해본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낙원 밖에서 살아 가도록 허락하시어 지구상에 사람이 오늘날과 같이 많이 불어나도록 하신 것은 감탄스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계속 살도록 허락하신 것은 확실히 자비로운 일이었읍니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6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지구상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창세 3:1부터 4:2.
15. ‘아담’은 자기 자손에 대해 어떤 종류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정하였으며, 우리는 어떻게 ‘아담’ 안에서 모두 범죄하였읍니까?
15 자기 아내 ‘하와’와 함께 범죄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후손에 대해 어떤 종류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였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완전하게 순종하며 그분과 튼튼한 관계를 가진 아버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수여자께 반항하여 죄에 대한 형벌로 사망의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였읍니다. (창세 2:15-17) ‘아담’은 우리에게 후자와 같은 아버지가 되기로 결정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성과 죄에 대해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읍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할 도리없이 제1세기 성서 필자,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쓴 대로 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 5:12) 하나님께서 첫 남자 안에 후손을 낳을 씨를 넣어주셨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우리 모두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 그의 허리 안에 들어 있었읍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 사망의 단죄 아래 태어난 것입니다.
16.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이 평형을 이루는 어떤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고린도 전서 15:21, 22에서는 이 점을 어떻게 확실히 알려 줍니까?
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죄와 그의 형벌인 사망에 대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담’에게 책임을 지우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말소하고 죄중에 태어난 인류의 세상에서 죄의 형벌을 제거하시는 데 대해서도 다른 한 사람 곧 ‘아담’과 동등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명하고 자비로운 마련에 따라 공의의 저울은 완전한 평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것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의 성서 고린도 전서 15:21, 22(새번역)에서는 그 점을 확실히 말하고 있읍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왔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7. ‘아담’과 동등한 자는 지상에서 어떻게 해서만이 마련될 수 있었으며, 그분의 탄생은 누구에게 적절히 통고되었읍니까?
17 이것은 실로 훌륭하고 경제적인 마련이며, 또 매우 간단한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완전성을 지니고 죄가 없던 당시의 ‘아담’과 동등한 한 사람 뿐이었읍니다. 최초의 인간 부부의 자손인 우리는 아무도 ‘에덴’에서 무죄하던 당시의 ‘아담’과 동등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지상에서 어떻게 그러한 사람이 출생할 수 있겠읍니까? 필요한 그 사람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만 마련될 수 있었읍니다. 이 하나님의 기적은 기원전 1세기 말에 실제 발생하였읍니다. 그 결과 「계시록」에서 여러 차례 “어린 양”이라고 부른 그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분은 어린 양 같기도 하였지만, “‘유대’ 지파의 사자”이며 “‘다윗’의 뿌리”였읍니다. 하나님의 성서의 모든 증거는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기원전 2년 초가을에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음을 지적해 줍니다. 그분이 희생의 어린 양과 같이 되신 사실과 조화되게, 그분의 탄생은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선택하신 증인들, 밤에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통고되었읍니다.—누가 2:4-18; 마태 2:1-18.
18.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이분은 죽음에서 부활됨으로써 누구의 아들로 인정되었읍니까?
18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이 칭한 바와 같이 “복음” 곧 좋은 소식이었읍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 1:1-4.
19. 예수께서는 부활받으심으로써 어떤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으셨읍니까? 그러나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어떤 신분이었읍니까?
19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누가복음 3:23-38에 수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 족보에 의하면,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불순종하여 죽었으며, 우리 모두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었읍니다. 그는 지금도 죽어 있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된 일이 없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상실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부활되셨으며, 그렇게 하여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고 지상에서 가졌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을 받으셨읍니다. 그렇지만, 지상에 계시던 때에도, ‘마리아’라는 ‘유대’인 처녀를 통하여 인간 육체로 나셨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20. 침례자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 것은 왜 자신의 생각에 근거하여 한 말이 아니었읍니까?
20 그 당시의 상태로 보아서 지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필요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필요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 그분은 30세로 성인이 되셨을 때에 ‘사가랴’라는 ‘유대’ 제사장의 아들, 침례자 ‘요한’에게 물에서 침례를 받으셨읍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고 선언하였읍니까? 침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요한’은 자기 혼자 생각하여 이 문제를 알아낸 것이 아니었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예수께 침례를 베푼 직후 ‘요한’은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태 3:13-17; 마가 1:9-11; 누가 3:21, 22) 그러므로, ‘요한’은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였읍니다.—요한 1:34.
21. 왜 예수에게는 인간 아버지, 육적인 아버지가 없으셨으며, 누가 그의 아버지임을 밝히셨읍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그가 ‘유대’ 처녀 ‘마리아’를 통해 인간으로 탄생하신 때에 비롯된 것이 아니었읍니다. 예수께서는, ‘아담’의 남자 후손과 성적 관계를 갖지 않은 처녀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인간 아버지, 육적인 아버지가 없으셨읍니다. 아무 천사도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었읍니다. 방주 건축자 ‘노아’ 시대에 악명 높은 ‘네피림’의 어머니들은 육체화한 천사들과 성적 관계를 가졌었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읍니다. (창세 6:1-4)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기적으로 예수를 낳을 것을 설명하였지만, 그 천사도 ‘마리아’의 첫 아들의 아버지는 아니었읍니다. (누가 1:26-38; 마태 1:18-25) 현대 과학자들은 예수의 처녀 탄생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마리아’의 생각에서 의문을 완전히 제거하였읍니다. (누가 1:37, 새번역)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윗’ 계통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의 아버지이심을 모든 우주 앞에 밝히셨읍니다.
22. ‘요한’의 말과 하나님께 드린 예수의 기도의 말씀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계셨었음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22 이 모든 일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신 것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때가 처음이었읍니까? 아닙니다! 예수 보다 약 여섯달 먼저 태어났던 침례자 ‘요한’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으신 예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르킴이라.” (요한 1:29, 30) 그러면,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침례자 ‘요한’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으셨는데, 어디서 ‘요한’보다 먼저 존재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늘에서였읍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기에 존재하셨었읍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천적 아버지와 직접 접촉하셨으며 교제하셨읍니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순교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 밤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 17:4, 5.
23. 하나님께서는 어디로부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어떻게 보내셨읍니까?
2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분은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와 나란히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셨었읍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인간 아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조치에 따라 생명이 하늘로부터 ‘유대’ 처녀 몸속의 인간 난자(卵子)로 변화해야 하였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던 때에도 계속 그의 아버지이셨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기적으로 옮기신 것은 하늘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관원 ‘니고데모’에게 그 점을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 3:16, 17.
24. 우리가 “어린 양”인 하나님의 아들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4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한 사람, ‘에덴’ 동산에서 완전하고 죄없던 당시의 ‘아담’과 동등한 한 사람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이 사람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하기 위해 하나님께 자신을 제공할 수 있었읍니다. (요한 1:29) 이것은 우리의 죄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필요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