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하게 가르침
1, 2.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온유를 가져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온유를 배양해야 될 또 다른 이유가 있읍니다. 물론 온유는 그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그는 사이좋게 지내기가 더 쉬우며, 온유는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더 잘 받아들이게 해 줌으로써 그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또 있읍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위험한 마지막 날에 행하도록 위임받은 대전과 사업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의 진리는 인류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악한 사물의 제도가 끝나기 전에 전세계적으로 증거되어야만 합니다. 부가적으로, 이미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계속 섭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여건은 보다 많은 교육을 요합니다. 그리고 온유는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가르치는 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는 거기에 들어 있는 지식을 온유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3-5. (ㄱ) 우리는 온유하게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임을 어떻게 압니까? (ㄴ) 왜 양같은 사람들은 예수께 매력을 느꼈읍니까?
3 온유하게 가르치는 일은 올바른 방법이며, 성경적 방법이며, 진리의 탐구자들로부터 최대의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교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에게 진리를 가르칠 때 온유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옳은 방법임을 압니다. 이 독특한 성품인 온유는 그의 성격의 일부였으며, 그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가르치실 때 온유를 사용하여 현저한 효과를 보셨읍니다.
4 예수께서 온유한 성품을 가지셨음은 예수 자신이 분명히 하셨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태 11:28, 29)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온유한 방법으로 인해서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읍니까! 열성을 가진 양같은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설파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다녔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복지는 하나도 염려해 주지 않고 뽑내기만 하는 사납고, 억압적인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무서워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무서워하지 않았읍니다.
5 예수께서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매우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평민들을 보시고 가없이 여기셨읍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태 9:36) 짓밟히고 학대받는 백성들을 보시고 동정심을 품으신 온유하신 예수께서는 참으로 그들의 영혼을 소생케 할 원천이셨읍니다. 그는 그들이 지금까지 대해 오던 사람들과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의 앞에 있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사나운 주인들과 같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온유하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아량있고, 자애로우셨읍니다.
6.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의 온유한 방법에 매력을 느꼈읍니까?
6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의 온유한 방법에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양과 같지 않고 진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태도를 어리석고, 이 각박한 세상에서는 비실용적인 태도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악인들도 응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로 끌어들이려고 하시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른 것을 사랑하고 옳은 것을 미워하는 자들을 부르지 않으셨읍니다. 그의 온유한 태도는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 즉 의의 애호가들의 마음에 호소하였읍니다. 예수께서 찾으신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는 『염소』가 아니라 『양』을 사냥하러 다니셨읍니다.
7.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남을 비난할 때는 어떠한 주의를 하여야 합니까?
7 예수께서 강한 언어와 행동을 취하신 것은 악하고 염소같은 사람들을 상대하실 때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셨지만 약하지 않았읍니다.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셨고, 특히 위선적 종교가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읍니다. 그는 그들에게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을 여러번 사용하셨읍니다. (마태 23:13-36) 때때로 어떤 하나님의 종들은 다른 사람을 책망해야 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가지신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유해서는 안될 때는 반드시 예외여야 하며, 그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오늘날 가지지 못한 권세와 분별력을 가지셨읍니다.
「바울」은 온유하게 가르쳤다
8. 「바울」은 온유하게 가르쳐야 함을 어떻게 보여 주었읍니까?
8 사도 「바울」은 온유하게 가르치는 예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며, 본받을 만한 방법임을 알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 10:1) 그가 남을 대하는 방식에 관하여 데살로니가 전서 2:5-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을 유의하십시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유순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 「바울」은 온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읍니다. 사실 그는 그러하였읍니다.
9, 10. 다른 이들은 「바울」의 온유함에 어떠한 반응을 표시하였읍니까?
9 그리스도인 회중내의 형제들은 온유한 태도를 가진 이 사도에게 어떠한 반응을 보였읍니까? 「바울」이 「에베소」 회중의 장로들에게 그들이 자기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 유의하십시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였더라].』 (사도 20:37, 38) 이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태도를 가진 사도를 사랑하였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 하나님의 종과 함께 있을 때 생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그들을 슬프게 하였읍니다. 그가 떠날 때, 차가운 형식적 이별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눈물, 그리고 그가 그들을 섬긴데 대한 감사로 넘쳐 흐르는 이별이었읍니다.
10 만약 「바울」이 가르치는 데 있어서 사납고, 세상적인 방식을 사용하였더라면, 그와 같이 진정한 애정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나운 사람에게 사랑과 감사의 표현을 성실히 할 수 없읍니다. 왜냐 하면 사나움은 끄는 것이 아니라 쫓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정하고 잔인한 주인이 떠날 때는 눈물이 있을 수 없읍니다.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쉴 것입니다.
자유 의사에 호소
11, 12. 사나움은 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까?
11 인도하고 가르치는 데 사나운 방법은 공포를 줍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신임과 사랑을 고취할 수 없읍니다. 일시적인 순종은 얻을지 모르나 자진적인 순종은 받을 수 없읍니다. 남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보통 오래 가지 못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팽개쳐집니다. 그러므로 강요된 순종은 바람직한 것도 아니며 오래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사를 주셨으며, 인간의 자진적 순종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2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나움, 압력, 억압을 증오하며 저항합니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엄하게』 하였을 때, 피압박자들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읍니까? (출애굽 1:13) 출애굽 1:14에 의하면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읍니다. 「르호보암」 왕이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고 말하였을 때, 백성들은 반역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예언하셨읍니다. (열왕 상 12:14) 그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예수깨서는 청중들에게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11:30) 그 당시의 진리 탐구자들이 사나운 종교 지도자들 대신 그를 따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읍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마태 23:4.
13. 「바울」은 「빌레몬」의 자유 의사에 어떻게 호소하였읍니까?
13 「바울」이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에 관한 문제를 취급할 때, 「빌레몬」의 자유 의사에 어떻게 호소하였는가를 유의하십시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모」는 그를 잘 시중들었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노예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그러나 「바울」은 그 노예를 자기를 위해 머물르게 하였읍니까? 아닙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다만 네 승락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러한 태도는 얼마나 차이가 있읍니까! 만일 「바울」이 「「빌레몬」, 나는 너의 노예가 필요하다. 그러니 네가 뭐라고 말하더라도 그를 여기에 머물르게 하겠다.」라고 말하였다면 「빌레몬」이 어떻게 생각하였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더 잘 알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온유하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레몬」을 사납게 다루거나 혹은 그의 자유 의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자신이 불편을 당하기를 원하였읍니다.—빌레몬 13, 14절.
14. 자진성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어떠한 다른 예들이 있읍니까?
14 관대함에 관해서 말하자면, 「바울」은 역시 온유하게 상대방의 자유 의사에 호소하는 원칙을 따랐읍니다. 그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9:7) 「베드로」가 조직의 장로들에게 그들이 감독의 지위에 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될는지를 충고할 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고 권면하였읍니다. 이 장성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자유 의사에 일치하게 양 무리를 쳐야 할 것입니다.—베드로 전 5:2.
15. 「자기 훈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합니까?
15 온유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자유 의사에 호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한 각자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무를 온전히 이행한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읍니다. 처음에 어떤 이들은 어떤 요구 조건은 매우 행하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에 관한 인식과 사랑을 배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그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읍니다. 예를 들어 기쁜 소식을 전파할 필요성에 관하여 말할 때, 「바울」은 어떤 이들은 처음에 그 일을 하기 원치 않을지 모르며, 그들이 지금까지 생활해 오면서 형성되어 온 의사에 반대될지도 모름을 시인하였읍니다. 「바울」은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말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9:17) 「바울」은 다른 이들이 그 일을 하도록 자기를 강요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읍니다. 그가 말한 것은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여야 할 필요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처음에 불완전한 육체가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항상 즐거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사에 반해서 그 일을 하는 자들까지도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남의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에 반(反)해서까지 그렇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 9:27)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종류의 순종도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자진적이며,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른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훈련시키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전도할 때
16. 「베드로」는 예수와 「바울」의 방법에 동의하였읍니까?
16 여호와께서 그의 새질서에서 살기를 원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진리의 호소력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온유하게 가르칠 때, 가장 효과적입니다. 호별방문이나 그러한 관심자들을 재방문하거나 그들 가정에서 성서를 가르칠 때, 가르치는 사람은 온유하고 상냥한 방법으로 호소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원칙과 논리, 진리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방법이 우리가 남을 가르칠 때 사용하여야 할 방법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베드로 전 3:15.
17, 18. 온유의 결핍은 가르침을 어떻게 방해합니까?
17 그리스도인이 온유함으로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제공된 재료에 더 잘 집중할 수 있읍니다. 성급하고, 다투기를 좋아하고, 불쾌한 선생은 어떤 학생들의 주의를 연구 재료로부터 자신에게로 돌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발전이 되지 않읍니다. 사나운 선생은 심지어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며 진리로부터 떨어지 나가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 반면, 온유하게 가르치는 사람은 이러한 성품이 하나의 자산임을 알 것이며, 「바울」이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였다고 말한 바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도 후 6:3.
18 남에게 전도할 때는 참을성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상대방의 발전이 더디거나, 그의 소식에 무관심할 때, 쉽사리 마음의 평형을 잃지 않읍니다. 그는 온유함이 없는 사람보다 더 오래참습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성급하고, 쉽사리 화를 내고,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전이 느리다거나,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온유함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며, 우리가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9. 반대가 온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어서는 안됩니까?
19 온유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항상 「듣는 귀」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십시오. 사실상 어떤 이들은 과거에 예수에게 한 것처럼 가장 겸손한 사람들까지 반대하고 대항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의 선생에게 반대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닌 소식 때문이며, 그가 지존자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하기 때문이지, 그가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무례하다거나 사납기 때문이어서는 안됩니다.
20, 21. 우리는 반대하에서도 왜 우리의 온유를 유지해야 합니까?
20 한편 도발을 당했을 때, 온유를 나타내는 것은 반대자들 중 얼마의 마음을 변화 시키기까지 합니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한다고 말합니다. 반대하는 사람, 특히 무지(無知)로 인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는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에 잠언 25:15에서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유한 성품은 편견과 반대를 꺾읍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디모데 후 2:24, 25.
21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전도인이 보인 그리스도인 성품에 감화되어,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검토하게 되고, 마침내는 자신도 하나님의 헌신한 종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몰지각한 사람들을 상대할 때,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여야 할 얼마나 강력한 이유입니까! 그러나 반대가 계속될 경우라도, 그리스도인은 보복하지 않읍니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일어난 사건을 기억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니라].』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읍니다. 하나님은 심판장이시며, 정하신 때에 완고한 반대자들을 처리하실 것입니다.—로마 12:17; 누가 9:54, 55.
그리스도인 형제들 사이
22. 또 어디에서 온유가 필수 조건입니까?
22 온유는 그리스도인 회중 밖이나 가족 사회 밖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상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온유가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대할 때는 더욱 더 온유해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외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간판으로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격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온유하여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라디아 6:10.
23. 오해가 일어났을때, 온유는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23 만약 그리스도인 형제들간에 오해가 일어난다면, 온유한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골로새 3:12, 13) 온유한 정신을 기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들과 더 잘 빨리 화해하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바와 같이 용서합니다.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마음을 품고, 동료 의식을 표시하고, 형제애를 나타내고,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들의 온유함은 그들도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게 해 줄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는 그러한 일을 칭찬하여,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4:8) 그리스도인 형제들간의 관계에 있어서 온유함과 상냥함과 감정 이입과 사랑을 표시하고, 냉냉하고 무정한 정책을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읍니다.
24. 잘못을 범한 사람을 어떻게 충고합니까?
24 때때로 어떤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할지 모릅니다. 그때 그는 충고가 필요합니다. 충고를 어떻게 주어야 하겠읍니까?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 6:1)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온유함으로 시정받을 때, 회복될 가능성이 있읍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그리고 상습적으로 악행을 범한다면, 그리스도인 회중은 그러한 행악자를 처벌하여 회중을 보호합니다.—고린도 전 5:11-13; 요한 2서 9-11.
25, 26. 인도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주의를 해야 하며, 그들의 형제들과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입니까?
25 감독자들과 봉사의 종들은 온유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매우 조심하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많은 책임들 그리고 그들이 처리할 여러 가지 문제와 난관들 때문에 만일 그들이 자신의 불완전한 인간적 사고 방식과 영에 호소한다면, 온유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의뢰하고, 그의 성령으로 지도해 달라고 계속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온유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를 산출하는 온유한 목자들은 회중을 북돋아 주며, 격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나운 목자는 낙담시키고 파괴시킵니다.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데 계속 사납게 구는 자들은 때가 되면 그들의 형제들을 섬길 특권을 박탈당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인도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였읍니다.—베드로 전 5:3.
26 예수께서는 인도하는 자들이 그들의 형제들을 섬겨야 됨을 보여 주셨읍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시니라].』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다른 경우에 그는 추종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종류의 겸손을 본따르기 원합니다. 온유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온유와 겸손은 원래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3:5, 13-15; 마태 20:26, 27.
27. 온유는 어디에서 필수적입니까?
27 온유는 회중의 최소 단위 즉 가족 사회 내에서 필수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그리고 자녀들에게 온유하게 대해야 하며, 나쁜 성품이나 부당함을 나타내서는 안됩니다. 가족의 머리인 남편은 많은 충고와 징계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그러나 온유하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자녀를 다루는데 이와 같은 온유한 방법은 자녀들의 마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들은 어릴 때 부터 온유가 남을 대하는 방법임을 배울 것입니다. 그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감에 따라, 온유한 정신도 함께 성장하여 마침내 그들의 그리스도인 성격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28. 온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8 그러므로 온유하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 회중 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 회중 내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충고할 때, 가족 내에서 교훈하고 시정할 때, 온유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온유는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화목하고 행복하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온유하게 일하고 생활하고 교훈하는 사람들의 사회 내에 거하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이겠읍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하셨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