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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유고슬라비아의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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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유고슬라비아의 나라들
  • 2009 여호와의 증인 연감
  • 소제목
  • 시작
  • “사진극”이 길을 열어 주다
  • 파이오니아들이 모여들다
  • 파이오니아 봉사의 어려움
  •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다
  • 활동이 금지되다
  • 톨스토이와 여호와 중에서 선택하는 일
  • 전시에 닥친 역경
  • 끝까지 충실을 지키다
  • 사형 선고를 받다
  • 충성의 시험
  • 제한적인 법적 인가
  • “뱀과 같이 조심스럽게”
  • 초창기의 왕국회관
  • 새로운 마련이 영적 성장에 박차를 가하다
  • 마케도니아에서의 격려적인 발전
  • 독일에서 연합하여 함께 모이다
  • 현지 파이오니아들이 필요에 응하다
  • 논에서 침례를 받다
  • 증가된 자유를 신중하게 사용함
  • 젊은 형제들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다
  • 고무적인 국제 대회
  • 도시가 포위되다
  •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
  • 열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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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생전에 이런 날을 보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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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왕국 활동
  • 출판물이 제한을 받다
  • 왕국회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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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다
  • 로마(집시)에게 전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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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심한 물가 상승이 가져온 고통
  • 성서 번역
  • 종교적 반대가 거세지다
  • 여호와의 생각으로 틀 잡히다
  • 연합된 숭배와 가르침
  • 영적 성장
  • 왕국회관과 파이오니아들
  • 병원 교섭 위원회
  • 확장되는 밭의 필요를 돌보는 일
  • 밝은 미래
2009 여호와의 증인 연감
연09 142-255면

구유고슬라비아의 나라들

구(舊)유고슬라비아 지역은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성이 있는 곳입니다. 북쪽으로는 중부 유럽과 동유럽, 남쪽으로는 그리스와 터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종교가 어우러져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고슬라비아라고 하면 대립과 분쟁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된 일로부터 시작해서 좀 더 최근에 있었던 인종 청소에 이르기까지, 발칸 반도에 있는 이 지역은 평화로웠던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지역의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서로 충돌하면서, 공화국들이 독립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해체되었으며, 현재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는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민족적·종교적 분쟁 속에서 사랑과 연합과 신뢰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는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발칸 반도를 조각조각 나게 만든 편견과 적의를 극복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루어 낸 일치와 연합은 그들이 더 우월한 정부인 하느님의 왕국에 충성한 결과입니다.

시작

이 지역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이야기는 유고슬라비아 북부 지역인 보이보디나 출신인 프란츠 브란트라는 젊은 이발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젊은이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진리를 접하게 된 그는 1925년에 진리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한 작은 집단과 연합하였는데, 그 집단 사람들은 미국에 있는 친족들로부터 받은 성서 연구 보조서인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함께 읽고 토의해 왔었습니다.

그 집단 사람들은 전파해야 할 필요성을 분별하였고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는 두 부의 소책자를 세르비아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소책자들이 배부되기 전에, 조직에 등을 돌리고 자신이 이끄는 분파를 만든 한 유력한 형제가 그 집단을 방문하였습니다. 프란츠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설득되어 성경 연구생들을 떠났습니다.

그 후 프란츠는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로 가서 한 이발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발소 주인인 리하르트 타우츠는 그에게서 증거를 받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성서를 믿는 이발사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프란츠와 리하르트는 이발소를 전파 활동의 중심지로 활용하였습니다. 손님들은 주의 깊이 잘 들었는데, 날 선 칼로 면도를 할 때는 움직이거나 말도 없이 더 잘 듣는 것 같았습니다! 손님 중에는 주로 자모냐라는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타자기 수리점 주인인 루돌프 칼레도 손님 중 하나였습니다. 주로와 루돌프는 모두 신속히 발전하였고 얼마 안 있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주로는 정치를 그만두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성경 연구생의 등대사(The Lighthouse Society)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법인체 덕분에 형제들은 자유롭게 전파하고 집회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극”이 길을 열어 주다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 스위스 지부 사무실에서는 두 명의 형제를 파견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큰 도시들에서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진극이 상영되는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청중은 주로가 사진극을 상영할 때 열중해서 보았습니다. 그 “사진극”은 이 나라 전역에서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마리보르에서는 형제들이 슬로베니아어와 독일어를 사용하여 집회를 사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그레브와 주변 지역에서는 크로아티아어로 번역된 출판물들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모임을 갖는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형제들은 「파수대」를 슬로베니아어와 크로아티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은 초창기인 당시로서는 매우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번역이 끝나면 한 자매가 먹지를 사용하여 잡지를 타자하였는데, 한 번에 생산되는 양은 겨우 20부였습니다. 후에 등사기를 구하였고 한 번에 200부의 「파수대」를 찍어 낼 정도로 생산량이 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그렇게 생산된 잡지들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전파하곤 하였습니다. 슬로베니아에 있는 형제들은 종종 지붕이 없는 트럭을 빌려 증인이 아닌 운전사를 고용하였습니다. 운전사는 형제들이 전파하고자 하는 장소까지 운전을 해 주었고 전파 활동이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초창기인 당시의 왕국 선포자들은 훈련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종종 아주 직선적으로 왕국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심으로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사도 13:48.

프란츠 자그마이스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1931년에 이모인 테레지야 그라디치와 이모부인 프란츠로부터 진리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모부는 슬로베니아의 초창기 전도인이었습니다. 이모부는 이전에는 종교를 몹시 반대하였지만 성서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모부의 그러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모부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 배운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교구 사제는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나를 좀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성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성서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였습니다.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제는 거리에서 나에게 다가와 몹시 화를 냈는데,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한 번도 돈을 지불하고 미사를 치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제에게 ‘미사가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백 번 아니 천 번이라도 치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도움이 됩니다. 되고 말고요!’ 사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면 미사가 필요 없을 테고, 지옥에 계시다면 미사가 아무 소용도 없을 겁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옥에 계시다면 어쩔 셈이지요?’ 하고 사제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제님은 저에게 재산이 아주 많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만일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 불멸의 영혼이 있고, 지옥과 연옥이 존재하며, 하느님이 모종의 삼위일체의 신이라는 것을 제게 성서로 증명하실 수 있다면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당신에게 양도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나를 쏘아보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떠나 버렸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모여들다

1930년대에 진리의 빛을 유고슬라비아에 비추는 일이 헌신적인 남녀들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에서는 그레테 슈타우딩거, 카타리나 코네치니크가 그리고 나중에 카롤리나 스트로프니크가 당시에 임시 파이오니아라고 알려져 있던 봉사에 등록하였습니다. 더 남쪽에 있는 헤르체고비나의 주요 도시 모스타르에서는 알프레드 투체크라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진리를 깨닫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출신인 23세의 두샨 미키치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를 구하였습니다. 그 역시 신속하게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열심 있는 독일 형제 자매들이 도착하여 이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세할 것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독일에는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스위스 지부 사무실에서는 마르틴 포에칭거, 알프레트 슈미트, 빈코 플라타이스와 요제피나 플라타이스, 빌리 빌케와 엘리자베트 빌케 등 약 20명의 경험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유고슬라비아로 가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자기희생적인 이 파이오니아들은 슬로베니아어나 세르보·크로아트어를 말할 줄 몰랐음에도 증거 카드를 사용하여 담대하게 전파함으로 장래에 있을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았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의 어려움

여호와에 대한 열심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파이오니아들이 언어 문제와 돈이 부족하여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일 역시 도전이 되었습니다. 외딴 마을들로 가기 위해 악천후와 험한 지형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4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습니다.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할 때 신발을 아끼기 위해 신을 벗고 다니던 일을 기억합니다. 후에 통치체 성원이 된 마르틴 포에칭거는 출판물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 시골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듣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전파하던 시절을 흐뭇한 마음으로 회상하였습니다.

한 스위스 형제가 자전거를 구입하여 이 충실한 파이오니아들에게 기증하였고 그 자전거들이 도착하자 교통 문제가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그 자전거들은 수십 년 동안 봉사 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우호적인 사람들로 알려져 있긴 했지만, 종교적인 반대가 있었고 파이오니아들은 심한 박해에 직면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특히 작은 마을일수록 그러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종종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여 파이오니아들을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은 또한 당국을 선동하여 파이오니아들을 괴롭히고, 출판물을 압수하고,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한번은 빌리 빌케가 크로아티아의 한 외딴 마을에서 전파하던 중에 마을 광장에서 나는 흥분한 군중의 고함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빌케 형제 부부는 또 다른 파이오니아인 그레테 슈타우딩거와 함께 그곳에서 「의로운 통치자」(Righteous Ruler) 소책자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 소책자의 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빌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정말 무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요. 20명가량 되는 성난 군중이 낫을 들고 내 아내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근처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우리 소책자들을 불태우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화가 난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고, 빌케 자매도 그 이유를 알아낼 만큼 현지 언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레테는 독일어와 현지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앞에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대체 무슨 일이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페타르 왕을 원하지 않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레테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 소책자의 삽화를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페타르 왕을 선전하는 이유는 뭐요?”

그레테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전해인 1934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왕 알렉산다르 1세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페타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세르비아로부터 받는 군주 통치보다는 자치제를 더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삽화를 보고 페타르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해가 말끔히 풀렸고, 왕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철저히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소책자를 불태웠던 일부 사람들은 이제는 소책자를 새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행복한 마음으로 마을을 떠나며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이 함께하였음을 느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또한 현지 관습을 염두에 두어야 하였습니다. 이슬람교인이 주를 이루는 보스니아의 마을들에서 전파할 때는 그곳 주민들의 심기를 언짢게 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이슬람교인 여자의 눈을 마주 보게 되면 남편이 안 좋은 반응을 나타내게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에는 회중이나 집단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하루 종일 전파를 하고 나면 밤을 보낼 곳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가진 돈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적당한 여관방에서 밤을 보낼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요제피나 플라타이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가톨릭 사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재워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마을을 떠나려고 할 무렵에는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습니다. 떠나는 길에 큰 나무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밑에 마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었지요. 우리는 그곳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세탁물 가방을 베개로 사용했고 남편은 자전거를 자기 발목에 줄로 매 두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근처에 우물이 있어서 씻을 물도 있었지요.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필요도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돌보아 주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개인의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증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다

파이오니아들인 알프레드 투체크와 프리다 투체크는 슬로베니아에서 불가리아로 여행하는 기회를 이용해 왕국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스트루미차에서 두 사람은 상점 주인인 디미타르 요바노비치에게 증거하고 출판물을 몇 부 빌려 주었습니다. 한 달 후 두 사람은 불가리아에서 돌아오면서 그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가 출판물을 읽지 않았음을 알고, 출판물의 가치를 인식할 만한 사람에게 주려고 하니 출판물을 다시 돌려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에 디미타르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출판물을 읽어 볼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출판물을 읽어 본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깨달았고 마케도니아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디미타르는, 형제간인 알레크사 아르소브와 코스타 아르소브에게 진리를 전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마케도니아에는 세 명의 증인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잡지와 축음기와 강연이 녹음된 레코드를 가지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잡지 한 부가 복음주의 감리교 목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그 잡지를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투쇼 사르체브라는 총명한 젊은이에게 주었습니다. 투쇼는 읽은 내용을 좋아했고 목사를 설득하여 그를 통해 잡지를 더 구했습니다. 투쇼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된 내용에 흥분한 그는 목사에게 그 말을 하였고, 그러자 목사는 더 이상 잡지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투쇼는 잡지에서 마리보르 지부 사무실의 주소를 찾아서 잡지를 좀 더 보내 달라고 편지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디미타르와 알레크사와 코스타에게 연락을 취하여 투쇼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곧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습니다.

1935년에 형제들은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에 있던 지부 사무실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이전하였습니다. 프란츠 브란트와 루돌프 칼레가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활동이 금지되다

그 시절에 우리 형제들이 열심히 활동하였다는 증거를 1933년에 가톨릭교회에서 발행한 한 팜플렛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팜플렛에는 증인들의 전파 활동이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며, 가톨릭교회는 우리의 활동이 곧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그러한 예측은 정말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북부 지역의 교직자들은 파이오니아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인해 화가 났습니다. 왕국 전파 활동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법원에 의해 저지되자 그들은 더욱더 분노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한 예수회 사제가 내무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내린 포고령 중 하나는 등대사를 해체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8월에 우리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당국은 왕국회관들을 폐쇄하고 모든 출판물을 압수하였습니다. 다행히도 회중들에 미리 연락이 갔기 때문에 당국은 압수할 만한 것을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베오그라드에 쿨라 스트라자라(파수대)라는 이름으로 작은 출판 사무실을 개설하였고 집회는 개인 집에서 계속 보았습니다.

공식적인 금지령이 내려지자 정부는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더욱더 압력을 가했습니다. 전 시간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말하는 형제들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파이오니아들 중 많은 사람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활동이 금지되자 유고슬라비아로 온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곳 역시 전파 활동이 금지된 것입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체포와 투옥을 당했지만 열심이 식지 않았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외부 사람들의 방문을 받기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한번은 한 형제가 우리를 보려고 찾아왔지만 면회가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교도소장에게 매우 큰 소리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불안한 시기에, 나치 정부의 정치적 목표를 지지하는 데 있어서 가톨릭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폭로한 「러더퍼드 판사가 제5열을 폭로하다」(Judge Rutherford Uncovers Fifth Column) 소책자를 번역하고 배부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이 소책자는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되었고 각각 2만 부씩 인쇄되었습니다. 애초부터 금지되어 있었던 소책자를 배부하는 일로 인해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이 추방되고 검사가 소책자의 발행인들을 기소하여 10년에서 15년 형을 구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소수의 전도인들은 6만 부의 소책자를 신속히 배부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갈 무렵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충실한 형제 자매들과 긴밀히 접촉했던 리나 바비치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성서 진리에 목말라 있었고 읽는 일을 즐겼습니다.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였기 때문에 나는 출판물을 개인 노트에 손으로 베껴 쓰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색을 받더라도 노트에 쓴 내용이 단지 개인적인 메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와 여호와 중에서 선택하는 일

전 세계가 전쟁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가장 큰 회중들 중 하나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러시아의 작가이자 종교 철학가인 레오 톨스토이의 견해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러시아 정교회 성원이었던 톨스토이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왜곡시킨 부패한 단체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그처럼 모든 종교 조직을 불신하는 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여호와의 조직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그레브 회중을 인도하고 있던 형제는 신뢰받는 입장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남용하여 회중 전도인 대부분이 톨스토이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형제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60명이 넘는 대다수의 회중 성원이 여호와의 조직을 떠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루돌프 칼레는 회중 성원 모두를 만나 보기 위해 베오그라드에서 서둘러 자그레브로 갔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을 통해서 밝혀 주신 기본적인 성서 진리들을 논하였습니다. (마태 24:45-47) 그런 다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누가 이러한 진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었습니까? 톨스토이인가요 아니면 여호와의 조직인가요?” 루돌프는 여호수아 24:15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조직에 머무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단지 두 사람만 손을 들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프더군요.” 루돌프의 말입니다.

회중 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훌륭한 일들이 곧 물거품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루돌프는 손을 든 두 충실한 사람에게 연단으로 나오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만 남게 되었군요. 우리는 이제 이 도시에서 여호와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나는 나머지 분들은 모두 여기서 나가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어서 나가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를 섬기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가서 여러분의 톨스토이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여러분과 교제하고 싶지 않습니다.”

몇 초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더니 하나 둘씩 손을 들면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호와를 섬기고 싶습니다.” 결국 배교한 회중의 종과 그를 따르는 몇 사람만이 거기서 나갔습니다. 그러한 충성의 시험은 머지않아 직면하게 될 훨씬 더 큰 시련에 대비해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전시에 닥친 역경

1941년 4월 6일에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습니다. 베오그라드를 강타한 대규모 공습으로 지부 사무실이 파괴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 베델에 있는 형제들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에 있는 형제들 간에 연락이 한동안 두절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 남쪽에 멀리 떨어진 형제들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연락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갑자기 도전이 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국제적 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은, 가혹하게 시험하고 체질하는 시기를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대한 형제들의 믿음과 사랑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오그라드 지부 사무실이 폐쇄된 관계로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조직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벌금과 투옥으로 그치던 일이 이제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사형을 선고받게 되면서, 분별력을 나타내고 비밀을 지키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수적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고 분할하면서 강제 수용소들이 세워졌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그러한 강제 수용소들이 몇몇 소수 민족과 비가톨릭 소수 집단 그리고 정권에 반하는 모든 종교 집단을 격리시키고 없애 버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세르비아에서 나치 군대는 강제 노동 수용소들을 세웠습니다. 150명이 넘는 헝가리 형제들이 중립 입장 때문에 세르비아의 보르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 정권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파 활동은 주로 비공식 증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전도인들은 자신의 성서와 출판물 한 부만을 갖고 다닐 것을 제안받았으며, 체포될 경우 할 말도 전달받았습니다. 그들은 집회를 소규모 집단들로 나누어 보았으며, 다른 집회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출판물을 안전하게 국내로 반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생산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잡지와 소책자들을 인쇄하고 제본하기 위해 다양한 장소에서 밤새 수고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또한 인쇄 작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형제들은 쉽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거래처를 통해서 인쇄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언제나 구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적·종교적 편견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휩쓸고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연합되어 있었고 생명을 구하는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개인 자금을 한데 모았습니다. 형제들은 구역 내의 고립된 전도인 집단들에게 어떻게 영적 양식을 전달하였습니까?

세르비아계 철도 노동자인 스테반 스탄코비치는 형제들의 배경에 상관없이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스테반은 위험을 무릅쓰고 출판물을 크로아티아로부터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세르비아까지 비밀리에 옮기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어느 날 경찰은 스테반의 서류 가방에서 출판물을 찾아냈습니다. 경찰은 그 출판물이 어디서 난 것이냐고 캐물었습니다. 하지만 스테반은 충성스럽게도 형제들에 관한 정보를 누설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경찰은 그를 구치소로 데려가 취조한 뒤에 근처 야세노바츠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였습니다. 충실한 스탄코비치 형제는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분별 있고 수완이 좋은 형제인 미호빌 발코비치는 그 어려운 시기에 크로아티아에서 배관공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세속 일에 더해 형제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출판물을 전달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의 손자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 다음 마을에서 수색이 있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계획했던 것보다 한 정거장 전에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마을 대부분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포도원으로 통하는 구멍이 뚫린 곳을 찾았습니다. 배낭에는 출판물이 들어 있었고 그 윗부분에는 라키야(집에서 만든 브랜디) 두 병과 얼마의 식료품을 함께 넣었습니다. 조심스럽게 포도원 사이를 걸어가다가 벙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한 군인이 ‘멈춰! 누구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가 가까이 다가가자 군인 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뭘 가져가고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밀가루 조금과 콩 약간 그리고 감자가 좀 있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군인이 병에는 뭐가 들었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냄새를 맡아 보시오. 맛도 한번 보고’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군인이 맛을 볼 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젊은이, 한 병은 가져가서 드시오. 다른 한 병은 내가 마시고.’

할아버지의 대답과 라키야가 마음에 든 그 군인은 ‘어르신, 가도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미호빌의 손자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출판물은 결국 무사히 전달되었지요.”

미호빌은 정말 용감하였습니다. 그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군대가 통제하고 있는 지역들을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때때로 공산주의 유격대와 대면하였으며,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 대원들이나 체트니크 군사들과 마주치기도 하였습니다.a 겁을 내기는커녕 미호빌은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증거를 하였고 성서에서 알려 주는 미래의 희망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였는데, 증인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체포되고,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인 1944년 11월 9일 밤에 유격대는 미호빌의 집을 급습하여 출판물을 압수하고 그를 끌고 갔습니다. 슬프게도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호빌은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요시프 사보는 소년에 불과하였을 때, 크로아티아의 슬라보니아 지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판물을 배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짐받이로 사용할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출판물을 담고 그 위를 신선한 배로 가려 놓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마을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보초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초소를 지날 때마다 보초는 “그 상자 안에는 뭐가 들어 있지?” 하고 요시프에게 물었습니다.

“외삼촌에게 드릴 배가 들어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면 군인들은 배를 한두 개 가져갔습니다. 목적지에 다 와 갈 즘에는 출판물을 가려 주는 배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시프는 몇 개 남지 않은 배와 그 밑에 숨겨진 소중한 출판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끝까지 충실을 지키다

자그레브 출신의 석공인 레스탄 파비얀은 이반 시베르와 프라뇨 드레벤과 필리프 후제크굼바지르에게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육 개월 내에 모두 침례를 받았으며 전파하고 집회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1월 15일 저녁에 군 순찰대가 이반 시베르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왔고 프라뇨 드레벤과 또 다른 형제인 필리프 일리치도 함께 체포하였습니다. 순찰대는 집을 수색하였고 모든 출판물을 압수한 뒤 형제들을 끌고 갔습니다.

레스탄은 형제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필리프 후제크굼바지르와 함께 프라뇨의 모친과 여동생을 위로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유격대가 그 소식을 입수했고 레스탄과 필리프를 체포하였습니다. 다섯 명의 형제는 성서를 사용하여 자신들이 오직 여호와만을 섬긴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군인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무기를 들고 전쟁에서 싸우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형제들은 감금된 채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군인들은 다섯 명의 형제들을 깨워 옷을 벗긴 뒤 숲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숲 속을 걸어가면서 형제들에게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군인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형제들의 결심을 깨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필리프 후제크굼바지르의 임신한 아내와 그의 네 자녀를 언급하였습니다. 필리프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온전히 확신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아내와 자녀가 없는 프라뇨 드레벤에게는 그가 죽으면 누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겠냐고 물었습니다.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겨울의 추위 속에 형제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곧이어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먼저 필리프 후제크굼바지르를 총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잠깐 멈추더니 나머지 형제들에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프라뇨를 처형하였고 다음에는 이반을 그 다음으로는 레스탄을 처형하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인 필리프 일리치는 결국 타협하였고 유격대에 가담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삼 개월 후 그는 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타협을 하면서까지 생명을 부지하려고 했지만 결국 질병으로 인해 때 이른 죽음을 맞았습니다.

슬로베니아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박해에 희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38세의 대장장이였던 프란츠 드로즈그는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나치군은 1942년 6월 8일에 마리보르에서 그를 처형하였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일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프란츠는 총살될 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라는 글이 쓰인 표시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17:14) 그가 총살당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쓴 편지를 보면 그의 강한 믿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루페르트 보게나! 나는 오늘 사형 선고를 받았다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게나. 자네와 자네의 가족 모두에게 내 사랑을 전하네. 하느님의 왕국에서 만나세.”

당국은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하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경찰이 불시에 단속을 실시하여 주민들을 일렬로 쭉 세워 놓고 신분증을 검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감옥행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경찰은 집과 아파트를 수색하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을 자주 경험하였습니다. 경찰이 형제들의 집은 지나치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이미 수색을 한 것으로 착각한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적어도 두 번의 경우는 수색을 당한 형제들의 아파트에 다량의 출판물과 등사기가 있었습니다. 그 위험한 시기에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거듭거듭 “여호와는 애정이 매우 부드럽고 동정심 많은 분”이라고 말하는 성서의 보증이 참됨을 경험하였습니다.—야고보 5:11, 영문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사형 선고를 받다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고, 엄청난 피를 흘린 인류 역사상 최악에 속하는 시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히틀러와 그 동맹국들이 패배하자, 형제들은 제한들이 풀리고 전파 활동의 자유가 회복될 것을 희망하였습니다.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가 출판과 언론과 숭배의 자유를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46년 9월에 15명의 형제와 3명의 자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루돌프 칼레와 두샨 미키치와 에드먼트 스트로프니크도 있었습니다. 5개월 동안 조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당국은 증인들이 국민과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한다는 미명 아래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 가톨릭 사제는 형제들이 종교를 가장하여 미국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앞장서서 고발하였습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형제들은 담대히 자신을 변호하였으며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대해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젊은 형제인 베코슬라브 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는 어머니를 통해 이 종교 즉 성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느님을 숭배했습니다. 독일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누나 둘과 형 역시 어머니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그들을 다하우로 끌고 갔고 거기서 총살시켰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하느님을 숭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과 동일한 종교를 믿고 있다는 이유로 이제는 제가 파시스트라는 혐의를 받고 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법원은 그를 석방하였습니다.

법원은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처럼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고발당한 사람들 중 3명은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1년에서 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공정한 처사는 전 세계 우리 형제들의 신속하고도 강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제도, 유럽의 증인들은 유고슬라비아 정부 앞으로 수천 통의 항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또한 수백 건의 국제 전보도 보냈습니다. 심지어 일부 정부 관리들까지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글을 보냈습니다. 그처럼 강력한 지원의 물결이 쇄도한 결과 사형 선고가 20년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2년 뒤, 슬로베니아 당국은 전파를 하였다는 이유로 야네즈 로바스와 그의 아내 마리야와 함께 동료 증인들인 요제 마롤트와 프란치슈카 베르베츠를 체포하였습니다. 기소장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호와 신봉자 분파’는 ··· 새로운 성원들을 모집하여 현 사회 체제[와] 군 복무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하였다.” 당국은 형제들이 국가의 방위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들에게 3년에서 6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습니다.

1952년에 정책상의 변화로, 수감되어 있던 모든 증인들이 풀려났고, 왕국 소식은 계속해서 전파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약속이 참됨이 증명된 것입니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어나는 혀는 모두 네가 정죄할 것이다.”—이사야 54:17.

하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형제들의 결심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뉴스 매체는 형제들을 “정신병자”나 “광신자”로 낙인찍었습니다. 계속되는 부정적인 뉴스 보도와 감시를 받고 있다는 끊임없는 두려움 때문에 일부 형제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충실한 증인들이 교도소에서 석방되자 회중의 다른 성원들은 그들을 첩자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충성스럽고 장성된 형제들을 통해 계속해서 회중들을 강화해 주셨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정권을 잡자 유고슬라비아에서 군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군 복무를 거절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막론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충성의 시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크로아티아의 아홉 살 된 소년인 라디슬라브 포로는 의무적인 시민 모임에 참석해 가톨릭 사제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라디슬라브는 호기심에서 연단 커튼 뒤편을 보았는데, 그 뒤로 사제가 사제복을 벗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제는 사제복 안에 우스타샤 제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수류탄이 달려 있는 탄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칼을 빼든 사제는 바깥에 있는 말에 올라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형제들이여, 어서 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화시킵시다!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방식대로 처리합시다!”

라디슬라브는 그와 같은 행동이 소위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사제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라디슬라브는 삼촌과 함께 비밀리에 열리는 증인들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 사실을 알고 화를 냈지만 라디슬라브는 계속해서 집회에 참석하였고 영적으로 잘 발전하였습니다.

1952년에 군대에 징집된 라디슬라브는 자신의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관리들은 강제로 입대 서약을 하게 하려고 라디슬라브를 수도 없이 심문하였습니다. 한번은 1만 2000명의 신병이 입대 서약을 하기 위해 집합한 군 막사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군인들은 집합한 모든 사람들 앞에 라디슬라브를 세워 놓고 그의 어깨에 소총을 메 주었습니다. 그는 즉시 소총을 내팽개쳤습니다. 군인들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확성기를 사용하여 라디슬라브가 한 번만 더 그렇게 한다면 그를 총살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집총을 재차 거부하자 군인들은 그를 끌고 가서, 폭탄이 떨어져 생긴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사형 명령이 떨어지자 한 군인이 구덩이 안으로 총을 두 발 쏘았고 군인들은 막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총알은 라디슬라브 형제를 비껴갔습니다!

그날 밤 관리들은 라디슬라브를 폭탄 구덩이에서 끌어내서 사라예보에 있는 교도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그가 교도소에서 범죄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모종의 타협을 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거듭해서 비슷한 내용으로 라디슬라브와 장황한 토론을 벌여 그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라디슬라브는 이렇게 추리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섬기게 된 것이 어떤 사람 때문인가? 아니지!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가? 물론 아니지!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과 생각에 달려 있나? 역시 아니지!’

그러한 영적인 추리는 라디슬라브가 풀려나기까지 4년 반 동안 교도소에 있으면서 충실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동료 숭배자인 아니차의 지원을 받으며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제한적인 법적 인가

티토는 1948년에 소련과 관계를 끊은 후에, 정부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점차적으로 국민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기는 하였지만 종교에 대해 더욱더 관대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표자들을 만나자고 했고 법인의 정관을 새로 작성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것은 증인들의 합법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정관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은 1953년 9월 9일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다시 한 번 법적 인가를 받았습니다.

다른 공산 국가들에서는 우리 형제들이 추방을 당하고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증인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형제들도 출판물을 받고 자그레브에 있는 사무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이 1953년에 종교 단체로서 법적 인가를 받기는 하였지만, 호별 방문 봉사를 합법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기까지는 38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하였습니다.

문제들은 계속되었습니다. 형제들의 중립 입장 때문에 당국은 전파 활동을 선전 유포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비밀경찰과 밀고자들로 이루어진 국가 정보망은 전파 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면 체포되거나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한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체포와 고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슬로베니아가 특히 그러한데, 이곳에서는 가톨릭의 영향이 가장 강하며 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경찰과 그들의 앞잡이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는데, 그들의 목적은 증인들이 관심자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있는 현장을 덮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사람들보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박해의 목적을 무산시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 왔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게”

슬로베니아의 시골 지역에서 전파할 때 형제들은 우선 집주인에게, 팔 만한 달걀이 있는지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 달걀을 사곤 하였습니다. 달걀이 충분해지면, 다음 집주인들에게는 장작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상황이 적절할 경우 거래를 하는 중에 조심스럽게 성서에 관한 주제로 대화의 방향을 이끌었습니다.—마태 10:16.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주변 지역에서는 구역을 체계적이면서도 발각되지 않는 방법으로 돌았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매 열 번째 집만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첫 집을 방문하도록 배정된 전도인은 첫 번째 집, 열한 번째 집, 스물한 번째 집, 서른한 번째 집 등등의 순서로 방문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별 방문 봉사가 야기하는 어려움 때문에, 가장 흔히 사용된 전파 방법은 비공식 증거였습니다.

세르비아의 형제들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다미르 포로비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친할머니 집에서 어떻게 집회를 보았는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할머니 집은 집회 장소로 이상적이었는데, 양쪽 길로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집회에 오가는 사람들은 의심을 사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베로니카 바비치의 가족은 1950년대 중반에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베로니카는 1957년에 침례를 받고 나서 남편과 함께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이주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슬라보니아 지역 출신인 밀리차 라디시치는 1950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밀리차의 가족 역시 보스니아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두 가족이 함께 보스니아에서 왕국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그들 역시 조심스럽게 전파해야 하였습니다. 베로니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경찰에 신고를 당해 출판물을 압수당하였지요. 우리는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교도소에 보내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벌금을 부과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낙담시키거나 겁먹게 하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우리는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었습니다.”

밀리차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루는 한 남자가 왕국회관을 찾아와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환영을 받았고 한동안 형제들의 집에 머물기까지 하였지요. 집회에서는 해설에도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직장에서 우리 딸이 그가 비밀경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그가 우리의 활동을 염탐하기 위해 경찰이 보낸 첩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경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더는 집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초창기의 왕국회관

정부의 인가를 받기 전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개인 집에서 함께 모이는 일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래도 형제들은 체포당하는 일을 무릅쓰고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모이는 일이 허가를 받은 후에도 모임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싫어하였고 증인들에게 건물을 임대해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들은 모임 장소를 위한 건물을 매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곧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중심가에 있는 한 작업장을 찾아냈습니다. 그 작업장을 약 160석을 갖춘 아름다운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또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한 자그마한 사무실도 추가로 지었습니다. 이 왕국회관은 또한 크고 작은 대회들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57년에는 최초로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증인들이 참석한 대회를 개최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몇 년 후 형제들은 자그레브 중심가의 카마우포바가(街)에 있는 주택을 매입하였고, 베델 가족은 1998년까지 그곳을 사용하였습니다.

1957년에 형제들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있는 한 건물을 매입하여 왕국회관과 베델 일을 위한 사무실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있는 한 마구간을 매입하여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1963년에는 사라예보에 있는 차고 한 곳을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최초의 회중이 그곳을 사용했습니다. 일부 건물들은 건축하기 위해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지만 형제들은 자신의 힘과 자산을 아낌없이 바쳤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새로운 마련이 영적 성장에 박차를 가하다

1960년에는 회중들을 돕고 격려하도록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주말” 순회 감독자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형제들은 쉬는 날을 기꺼이 사용해서 그 초창기에 여행하는 일을 하며 형제들을 격려하고 연합을 증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 지부 위원인 헨리크 코바치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약 1년간 주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전 시간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형제들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고 우리는 수도나 수세식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자주 묵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우리의 방문에 대해 깊은 감사를 나타냈고 특별한 사랑과 후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우리를 위해 잠자리를 내주었고 자신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어떤 회중들에서는 한 집에 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매일 밤 다른 집에서 묵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세르비아 전국 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샨도르 팔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말 감독자로 봉사한 일은 쉽지는 않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지요.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순회 감독자의 방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행사였던 것입니다.”

밀로시 크네제비치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지부 사무실의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공산 정권이 집권한 수십 년 동안 크네제비치 형제는 우리 형제들을 상대로 제기된 많은 법적 소송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의 격려적인 발전

1968년에 자그레브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마케도니아 코차니 출신의 한 젊은이가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온 그는 친족들과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코차니 출신으로 최초로 침례를 받은 스토얀 보가티노브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젊은이는 내 이종 사촌이었습니다. 나는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종종 동료들과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한번은 그런 대화를 하고 난 뒤에, 정교회 신자 한 사람이 식사를 하러 들어왔습니다. 그의 주문을 받던 나는 하느님에 대해 정말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성서 한 권을 구해다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한번 구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개인용 ‘신약’ 성서를 한 권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일을 마치고 성서를 읽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향했지요.

집으로 가는 길에 자그레브에서 돌아온 사촌을 만나게 되어 놀랐습니다. 사촌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지금 집에 가서 성서를 읽을 생각에 마음이 너무 들떠 있어서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촌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저한테 있어요. 성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들이 집에 있거든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집으로 갔고, 나는 크로아티아어로 된 전역 성서와 팜플렛들과 「파수대」 잡지 몇 부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사촌은 내게 그 출판물들을 주었고, 나는 즉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나는 읽고 있는 내용이 뭔가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사촌이 자그레브로 돌아갈 때, 나도 같이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비차 파블라코비치라는 한 친절한 증인이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3일간 머무르면서 많은 질문을 하였고, 그는 언제나 성서를 사용해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점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회중 집회에도 참석하여 따뜻한 형제 관계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비차는 나를 자그레브 베델에도 데려가 주었고, 나는 출판물을 손에 가득 들고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며칠간을 보낸 후에 나는 발견한 영적 보물을 가지고 코차니로 돌아왔습니다. 근방에 증인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비차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내 편지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보냈습니다. 지식이 늘어 가면서 나는 배운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고, 아내와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우리 가족은 진리로 연합되었고 성서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뻤고 친족들과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에 대해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파 활동은 박해를 가져왔습니다.”

독일에서 연합하여 함께 모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우리 형제들은 다른 공산 국가의 형제들만큼 고립된 상태에 있지는 않았지만, 수가 적었고 세계 전역에 있는 형제들의 사랑을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1969년에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에 출국 허가를 요청하였습니다.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였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대회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넓은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그곳은 불과 20여 년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고 위협했던 히틀러가 자신의 군대를 사열했던 곳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여러 언어로 제공되었는데,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대표자들은 주 경기장 근처에 있는 숲이 우거진 운동장에서 자신들의 언어로도 회기가 제공될 것임을 알고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 운동장에 큰 연단을 설치하여 대표자들의 절반은 연단을 중심으로 한편에 앉아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나머지 절반은 다른 한편에서 슬로베니아어로 프로그램을 들었습니다. 8일간의 대회 프로그램을 통해 형제들은 참으로 지식이 깊어지고 믿음이 강화되었습니다!

대회 전에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대표단을 독일로 태우고 갈 열차와 버스들을 예약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온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부푼 우리들은 객차 창문에 대회를 광고하는 표시를 자랑스럽게 붙여 놓았지요.”

형제들은 세계 본부에서 온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프랜즈를 직접 보고 그들의 연설을 듣게 되어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한 대표자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그 형제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앉은 구획으로 왔을 때 흥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형제들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치른 많은 희생은 그들이 받은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르비아에서 온 밀로시야 시미치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대회 참석을 위한 여행 경비로 두 달 치 월급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열흘간의 휴가를 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죠. 돌아와서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가 않았지만 나는 꼭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회는 정말 굉장했지요!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회상해 보면 기쁨의 눈물이 날 정도랍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온 동료 증인들과 함께 모여 연합된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경험하고 집으로 돌아간 형제들은 앞에 놓인 어려움을 직면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지 파이오니아들이 필요에 응하다

1930년대 초에 독일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은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는 데 있어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이제 전도인들이 증가하면서 파이오니아 봉사 대열에 들어서는 유고슬라비아 형제 자매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슬로베니아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더 크게 필요한 더욱 먼 지역으로 경험 많은 파이오니아들을 보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파이오니아들은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워야 하는 도전에 용감히 응하였습니다.

욜란다 코챤치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코소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프리슈티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알바니아어와 세르비아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민카 카를로브셰크와 나는 두 언어를 모두 할 줄 몰랐지만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고, 그런 방법으로 언어를 배웠습니다. 첫 집에서 우리는 한 체코계 과부의 큰아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세르비아어 표현이 일부 섞인 슬로베니아어로 이렇게 서론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가족에게 성서의 좋은 소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들어오세요. 어머니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인 루지차가 우리를 보려고 서둘러 왔습니다. 그는 14일 전에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그분에 대해 가르쳐 줄 누군가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루지차의 언니는 현재의 체코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동생에게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해 보라고 여러 차례 권했던 것입니다. 루지차는 우리가 방문한 것이 자신이 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루지차는 우리에게 세르비아어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그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학생들도 성서 연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준 알바니아어 사전은 우리가 그 언어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몬테네그로의 조란 랄로비치는 소년이었을 때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출신의 한 파이오니아로부터 성서 한 권을 받았습니다. 5년 후인 1980년에 세르비아에서 온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조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디스코텍에서 만난 친구들과 교제를 끊느라고 아주 힘들었어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자 신속히 발전할 수 있었고 몇 개월 만에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고 나서 곧바로 공개 강연 임명을 받게 되었는데, 형제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포드고리차 시에서 모든 집회를 사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논에서 침례를 받다

마케도니아 출신인 스토얀 보가티노브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으면 내가 침례를 주었지요. 우리에게는 침례에 사용할 욕조가 없었고, 인근에 강이 있었지만 너무 얕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지역에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논에는 물을 대는 용수로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일부 용수로에는 침례에 사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깊고 깨끗한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논에서 처음으로 침례를 주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논을 가로질러 용수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소리쳤습니다. ‘스토얀, 새로운 일꾼들을 데려온 모양이구먼!’

‘그래, 맞네. 할 일이 아주 많지’ 하고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마케도니아에서 진행 중인 영적 추수를 위한 일꾼들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마케도니아 형제들은 지부 사무실과의 연락이 제한되어 있었고, 신권적 절차와 관련해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았습니다. 스토얀 스토이밀로브는 독일에 있을 때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코차니에서 증인들을 발견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독일에서 집회들이 어떻게 사회되고 있는지 형제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즉시 나에게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고 공개 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형제들에게 내가 아직 침례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설명하였지만 형제들은 내가 가장 자격을 잘 갖춘 사람이 분명하다며 강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결국 아내와 나는 잘 발전하여 역시 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코차니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는 베셀린 일리에브는 “우리는 신권 조직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진리에 대한 사랑은 넘쳤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때가 되자 여호와께서는 문제들이 시정되게 해 주셨습니다. 일례로 마케도니아어로 더 많은 출판물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왕국 진리가 증진되고 회중들이 강화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증가된 자유를 신중하게 사용함

유고슬라비아는 러시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의 장막 안에서는 얻기 어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비자를 폐지하고 국경의 통제를 완화하였습니다. 여행의 자유가 신장되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북부 지역의 우리 형제들은 소련과 국경이 접해 있는 나라들로 출판물을 가져가는 일을 맡았는데, 그러한 나라들에서는 전파 활동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출판물을 화물 트럭에 실어 독일에서 유고슬라비아로 운반해 왔습니다. 현재 크로아티아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로 란디치는 자신이 살던 집이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출판물 창고 역할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 가족들의 차에는 바닥과 계기판 부분에 위장 공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발각될 경우 차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 가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이 출판물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생각하면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었지요.”

세르비아에서 불가리아로 출판물을 배달했던 밀로시야 시미치 자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출판물을 배달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는 달랑 주소 하나뿐이었지요. 한번은 버스에서 내려 집을 찾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 구획을 빙 돌아 다른 방향으로 와서 다시 시도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하루 종일 십여 번이나 반복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는데, 나중에 그 주소가 틀린 주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나는 그 출판물을 복사하고 다시 타자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전해 주지 못한 출판물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로 다시 가져와서 유용하게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복표를 사 두긴 했지만 버스를 갈아탈 정류장까지 갈 표도 필요하였습니다. 보통은 출판물을 배달하면 출판물을 받은 형제들이 내게 그런 표를 살 돈을 주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불가리아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돈의 액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매표창구로 다가갔고 여자 매표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창구 앞에 오니 때마침 남자 직원이 자리를 뜨고 여자 직원이 교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출판물을 싸는 데 사용했던 옷을 주면서 차표와 바꾸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동의했고, 나는 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 형제들은 알바니아어와 마케도니아어로 출판물을 번역하여 손으로 쓴 원고를 베오그라드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보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시미치 자매는 타자기와 먹지를 사용하여 한 번에 여덟 부를 생산해 냈습니다.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원고가 손으로 쓴 것인 데다가 시미치 자매가 그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젊은 형제들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다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지만 정부는 우리의 중립 입장이 유고슬라비아의 연합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형제들은 반대에 직면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립을 지키기 위해 죽기까지 충실함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30년 동안은 모두가 그와 같이 강한 믿음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왕국 활동을 지원하였지만 군사 훈련에 소집될 경우에는 훈련에 참여하는 것을 합리화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중립 입장을 취한 젊은 형제들은 많게는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게다가 만 30세가 되기 전에 몇 차례 더 선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충절의 시험에 직면하여 타협하기를 거절한 사람들 중에는 이제 막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책임 맡은 형제들로서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무적인 국제 대회

유고슬라비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제 대회를 개최하는 즐거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1991년에 통치체가 “자유 애호자” 국제 대회 중 하나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열릴 것이라는 발표를 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었습니까? 국내외 대표자들의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형제들은 많은 기도와 심사숙고 끝에 대회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시어도어 재라스는 대회가 열리기 몇 주 전에 크로아티아로 가서 대회를 조직하는 일을 지원하였습니다. 자그레브에서 계획된 다른 모든 공식 행사들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은 디나모 경기장에서 있을 행사에 집중되었습니다. 대회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국내의 상황은 계속해서 불안정해졌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날마다 위험 요소들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습니다. ‘준비를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회를 취소해야 하는가?’ 형제들은 여호와께 끊임없이 기도로 간청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구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었고, 1991년 8월 16일에서 18일까지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대조가 되는 상황을 떠올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주변 국가들이 맹렬한 전쟁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크로아티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경건한 자유 애호자”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수많은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b 많은 현지 주민들이 해외로 도피하고 있는 판국에 15개국에서 온 형제 자매들은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함께 모이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서방 국가들에서 큰 규모의 대표단들이 비행기 편으로 도착하였습니다. 군사적인 상황으로 인해 자그레브의 공항이 폐쇄되었고 비행기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착륙해야 하였습니다. 대표자들은 거기서 버스를 타고 자그레브로 이동하였습니다. 자그레브를 방문한 형제들이 보여 준 용기는 일반 대중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으며 그들이 함께한 것은 현지 형제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3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가장 큰 대표단이 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따뜻한 애정과 열정의 불길은 대회를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데살로니가 첫째 5:19.

다섯 명의 통치체 성원의 방문은 특히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케어리 바버, 로이드 배리, 밀턴 헨첼, 시어도어 재라스, 라이먼 스윙글이 했던 연설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회상하곤 합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이 형제들은 그 불안정한 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곳을 찾아 격려적인 연설로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당국자들은 정치적 불안 상태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각지에서 온 대표단들 사이에 민족적 충돌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 자매들이 평화롭게 함께 모이는 것에 더해 따뜻한 형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크게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배치된 경찰관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이 대회는 여호와의 증인이 진정으로 세계적인 형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해 보는 것은 형제들이 앞으로 겪게 될 시련 중에도 연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있는 검문소를 마지막으로 통과한 차량 가운데에는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온 대표자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안전하게 국경을 넘어간 후에 국경이 봉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때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였던 공화국들이 계속해서 자체 정부를 가진 독립 국가를 설립하였습니다. 뒤이은 격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우리 형제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제는 독립 국가가 된 나라들에서 여호와께서는 계속된 왕국 전파 활동을 어떻게 축복해 오셨습니까? 이제부터 그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현대 역사

“1992년 5월 16일, 박격포 포탄들이 폭발하면서 그 파편이 사라예보를 뒤덮고 있었을 때 13명쯤 되었던 우리는 아파트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두 개의 포탄이 우리가 몸을 피하고 있던 그 건물에 명중하였습니다. 우리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출신들이었습니다. 건물 밖에서는 이 세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순결한 숭배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포격이 줄어들자, 우리는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아파트를 버리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전날 밤에 했던 것처럼 기도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할림 추리.

당시 인구가 40만이 넘었던 사라예보는 현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길고도 극심하다고 할 만한 포위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형제 자매들은 이 나라를 철저히 분열시키고 있던 그 모든 민족적·종교적 분쟁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이었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알려진 이 나라는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문화적·가족적 유대가 강하며, 사람들은 후대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 이웃집에서 터키식 커피를 음미하거나 카피치(커피숍)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길 좋아합니다.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하지만 보스니아 사람들은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독실한 종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나라 국민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종교입니다. 보스니아인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는 반면에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회를,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에 종교적 편협과 인종 간의 증오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인종 청소라는 비극적인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진군하는 군대는 자신들이 속한 종교 집단만 거주하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지역을 만들기 위해 작은 마을이든 큰 도시이든 할 것 없이 민간인들을 몰아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중립의 시험이 되었습니다.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와 같은 종교를 믿으며 가족의 성(姓)을 보면 대개 그 가족의 종교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되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은 가족과 가족의 전통을 저버린 배신자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여호와에 대한 충성이 보호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시가 포위되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유고슬라비아의 형제들은 1991년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경건한 자유 애호자” 대회에서 나타난 사랑과 연합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대회는 앞에 놓인 시련에 대비하여 그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한때는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사라예보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가 사라예보를 포위하였고 우리 형제들을 포함한 모두가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정치 상황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이긴 했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라예보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던 할림 추리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매달 지급되는 식량은 밀가루 몇 킬로그램, 설탕 100그램, 기름 0.5리터가 고작입니다. 도시 안에 경작이 가능한 땅은 모조리 채소를 심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라예보의 나무들을 베어 땔감으로 쓰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없어지면 요리와 난방을 위한 연료로 쓰기 위해 자기 아파트에 있는 마룻바닥까지 벗겨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에 타는 것은 무엇이든, 심지어는 낡은 신발까지 연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라예보가 포위되었을 때, 릴랴나 닌코비치와 남편 네나드는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고 두 딸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릴랴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두 자녀가 있고 아파트에 살며 차가 한 대 있는 평범한 가족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을 자주 경험하였습니다. 릴랴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을 나서자마자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폭격을 당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일들에서 기쁨을 찾았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공원에 가서 민들레 잎을 좀 따다가 샐러드를 만들었고 그래서 흰 쌀밥 말고도 먹을 것이 더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어떤 것이든 당연히 여기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지요.”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물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집에 수돗물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저격병들이 표적으로 삼는 곳들을 통과하여 멀게는 5킬로미터까지 걸어가야 하였습니다. 물을 뜨는 장소에서는, 가지고 간 통들에 물을 받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였고 그런 다음에는 무거운 물통들을 들고 힘들게 집까지 다시 걸어와야 했습니다.

할림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잠깐 동안 집에 물이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험이 되었습니다. 물이 나오게 되면 누구나 샤워와 빨래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용기에 물을 받아 두어야 하였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고대해 온 물이 나오는 시간이 회중 집회 시간과 겹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그럴 경우 집회에 갈 것인지 아니면 물을 받기 위해 집에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마련도 필요하기는 하였지만 형제들은 영적인 마련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 깊이 인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집회 때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것에 더해 누가 투옥되었고, 누가 부상을 당하였으며, 심지어는 누가 죽임을 당했는지에 관해 자세한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회중 장로로 일하고 있는 밀루틴 파이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가족 같았습니다. 집회를 보기 위해 모이면 자리를 뜨고 싶지가 않았지요. 집회가 끝나면 대개 몇 시간이고 남아서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고, 형제들은 생명의 위협을 자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관심사를 첫째로 두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사분오열된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백성들은 서로 간에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더 가까워졌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나타낸 충성의 본을 잘 관찰하였고 그들 역시 여호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배양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도시인 비하치는 거의 4년 동안 고립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도, 구호물자가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 도시의 유일한 형제였던 오스만 샤치르베고비치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전쟁 초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상황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뭔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놀랍게도 포격이 시작되자 긴장이 누그러졌는데, 수류탄이 전부 다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수류탄은 아예 폭발하지도 않지요.”

내전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베델은 서로 협력하여 사라예보, 제니차, 투즐라, 모스타르, 트라브니크, 비하치에 있는 왕국회관과 증인들의 집에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들을 비축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내전이 계속됨에 따라 도시들은 갑작스런 포위를 당해 고립될 수 있었습니다. 보급로가 예상치 못하게 끊기게 되면 필요한 물자가 금방 바닥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스니아의 여러 도시가 외부 세상과 단절된 반면, 여호와의 증인의 형제 연합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던 극심한 민족적·종교적 증오와는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매일 필수품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에 더해 사라예보 주위에 배치되어 무고한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하는 저격병들로 인한 위험도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포격이 계속 비 오듯 하였고 사망자가 속출하였습니다. 포위된 도시 안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도 종종 위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지혜와 용기를 균형 있게 나타내면서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한 장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공격이 더욱 심했던 어떤 날에는 단 하루에도 사라예보에 수천 개의 포탄이 터졌습니다. 형제들은 토요일이었던 그날 아침에도 장로들에게 전화를 하여 ‘야외 봉사 모임이 어디서 있나요?’ 하고 물었지요.”

한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진리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바로 그 사실이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단지 인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갖는 데 도움이 되었답니다.”

많은 현지 주민들은 성서의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우리를 찾고 있어서 우리가 사람들을 찾으러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왕국회관에 불쑥 나타나서는 연구를 요청합니다.”

전쟁 중에 전파 활동이 성공을 거둔 데에는 사람들이 뚜렷이 볼 수 있었던 연합된 그리스도인 형제 관계가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해 온 나다 베슈케르 자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형제들의 연합은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보스니아 형제들과 세르비아 형제들이 함께 봉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자매와 과거에 이슬람교인이었던 자매가 함께 세르비아 사람과 성서 연구를 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형제들이 나타낸 열심의 결과를 지금까지도 볼 수 있는데, 현재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바냐루카에 있는 회중은 백 명의 전도인이 다른 회중으로 갔는데도 성원 수가 두 배로 증가하였습니다.

충실했던 한 가족

언제나 우리 형제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있다가 “때와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게 된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전도 9:11) 세르비아계 사람인 보조 조렘은 1991년에 자그레브에서 열린 국제 대회 때 침례를 받았습니다. 사라예보로 돌아간 후에 그는 몇 차례 교도소로 보내졌고 중립 입장 때문에 가혹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1994년에는 1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인 헤나와 다섯 살 난 딸 마그달레나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조가 석방된 후 얼마 있지 않아 비극이 닥쳤습니다. 조용한 어느 날 오후, 세 사람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터진 포탄으로 인해 그 오후의 고요함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헤나와 마그달레나는 즉사하였고, 보조는 후에 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중립

사람들의 편견이 고조되어 갔고, 중립 입장에 대한 관용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바냐루카 회중은 군대가 전쟁에 사용하기 원하는 젊은 형제들이 회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중립을 고수했기 때문에 구타를 당했습니다.

오스만 샤치르베고비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경찰은 우리를 자주 취조하였고 자기 가족도 지키지 않는 겁쟁이라고 부르곤 하였죠.”

오스만은 경찰과 이런 식으로 추리하곤 하였습니다. “가지고 계신 총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갖고 다니시는 거지요?”

“물론이지.” 경찰이 대답했습니다.

“대포가 있다면, 보호를 더 잘 받기 위해 총을 대포로 바꾸시겠습니까?”

“그래야지.”

“대포를 탱크로 바꿀 수 있다면요?”

“물론 그렇게 하겠지.”

그러면 오스만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시겠다고 한 건 모두 더 강력한 보호를 받기 위한 것이지요. 저는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느님 여호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저를 더 잘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요점은 분명하였고, 경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주의적 구호물자가 도착하다

이웃 나라들에 사는 형제들은 보스니아의 증인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동안은 필요한 구호물자를 형제들에게 수송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10월에 당국은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0월 26일에 16톤의 식품과 땔감을 실은 다섯 대의 트럭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떠나 보스니아로 향했습니다. 수송 차량들은 아직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많은 지역을 어떻게 통과할 것이었습니까?c

형제들은 가는 도중에 매우 위험한 상황을 몇 차례 겪었습니다. 운전사로 일한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날 아침에 늦게 출발해서 보니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실은 다른 몇 대의 트럭이 내 앞에 가고 있었습니다. 검문소 중 한 곳에 다가가고 있을 때, 앞서 간 트럭들이 모두 멈춰 섰고, 장교들은 서류를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격병의 총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증인이 아닌 한 운전사가 총에 맞은 것을 보았습니다.”

운전사들만 트럭을 가지고 사라예보로 진입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같이 간 다른 형제들은 도시 밖에서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현지 형제들을 격려하려는 생각으로 전화를 찾아 사라예보의 전도인들과 연락을 취했고, 전화선을 통해 전도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격려적인 공개 강연을 해 주었습니다. 내전 중에,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베델 봉사자들과 전국 위원들은 여러 차례 죽음을 무릅쓰면서 형제들이 영육 간에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하치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거의 4년 동안 화물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육적 양식은 바리케이드를 뚫고 고립된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형제들은 얼마의 영적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형제들은 전화선과 팩스를 이용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주기적으로 「우리의 왕국 봉사」와 「파수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받은 출판물을 타자하여 가족당 한 부씩 공급하였습니다.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비하치에는 세 명의 침례받은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밖에 없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12명의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들이 연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기 위한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 2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고립된다는 것은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스만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내 성서 연구생들은 대회에 가 본 적도,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형제 관계를 맘껏 누릴 수 있게 될 날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1995년 8월 11일에 “여호와의 증인의 구호물자”라고 뚜렷이 표시된 차량 두 대가 비하치에 도착하였을 때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 도시가 포위된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싣고 온 첫 차량들이었습니다! 마침 그때는 형제들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점에 달했다고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형제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보는지를 관찰하였는데, 그중에는 깨진 창문을 수리해 준 일도 있었습니다. 오스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웃 사람들은 그 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우리에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할 정도로 그 일은 그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현재 비하치에는 34명의 전도인과 5명의 파이오니아로 이루어진 열심 있는 회중이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여행!

형제들은 거듭거듭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내전으로 찢긴 보스니아의 도시들로 식품과 출판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1994년 6월 7일에는 그와는 다른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전국 위원회 성원들과 그 밖의 일할 형제들을 태운 트럭 세 대가 그날 아침 일찍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를 출발하였습니다. 목적은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3년 만에 처음으로 단축된 특별 대회일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특별 프로그램이 제공된 곳 중 하나는 투즐라 시였습니다.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 회중에는 침례받은 전도인이 20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200명이 넘는 사람이 대회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30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투즐라에는 세 개의 회중이 있으며 전도인이 300명이 넘습니다.

제니차에서는 형제들이 적절한 모임 장소를 찾았지만 침례를 위한 알맞은 물웅덩이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쓸 만한 큰 통을 구했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통에서 나는 냄새였는데, 그 통은 물고기를 담는 데 사용해 온 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의 초대를 받아들인 침례 지원자들은 그런 냄새쯤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마태 4:19) 현재 크로아티아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헤르베르트 프렌젤은 침례 연설을 하기 위해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침례받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해 온 지원자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 그들은 승리했다고 느꼈지요!” 현재 제니차에는 68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열심 있는 회중이 있습니다.

사라예보에서는 저격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한 교차로 부근 외에는 대회를 열 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회장에 안전하게 도착한 형제들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침례를 줄 장소뿐만 아니라 침례에 쓰일 귀중한 물을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모든 지원자들에게 침례를 주기에 충분한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원자들을 체구에 따라 줄을 서게 하였고 몸집이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 순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형제 자매들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어떤 무서운 일도 그들이 함께 하느님을 숭배하면서 느끼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반감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사라예보에는 번성하는 세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내전의 폭풍이 지나간 뒤

보급로가 다시 열리면서 형제 자매들의 생활이 어떤 면으로는 좀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인종 청소와 그로 인한 강제 이주가 계속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는 이비차 아라바지치는 바냐루카에 있는 집에서 자신의 가족이 강제로 쫓겨났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총을 든 한 남자가 오더니 이 집이 이제는 자기 집이라면서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더군요. 그는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크로아티아의 시베니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보고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연구생이었던 군 경찰관이 중재에 나서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습니다. 결국에는 우리 집을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세르비아인의 집과 우리 집을 맞바꿀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게 도와준 회중과 우리가 살던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짐만 챙겨서 크로아티아에 있는 ‘새로운’ 집으로 이주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하지만 시베니크에 도착해 보니 이제 우리 집이 된 그 빈집에 벌써 누군가가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그곳의 형제들은 즉시 우리를 환영해 주었고, 집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한 장로가 자신의 집에서 일 년 동안 살게 해 주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구의 거의 40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진리는 번성하고 있습니다. 내전이 끝난 이후로 형제들은 새 왕국회관들을 건축해 왔습니다. 특히 바냐루카에 있는 왕국회관은 절실히 필요한 모임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왕국회관은 법적 승리의 상징입니다. 수년 동안 우리 형제들은 세르비아 정교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지역에서 왕국회관을 짓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전이 끝나고 보스니아 형제들은 법적 인가를 받았음에도 바냐루카에 왕국회관을 짓기 위한 허가를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많은 기도와 부지런한 노력 끝에 필요한 서류를 얻어 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그 지역에 앞으로 왕국회관을 다시 짓게 될 경우, 법적 선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숭배의 자유로 인해, 다수가 외국 출신인 32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이 나라의 더 크게 필요한 곳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봉사에 대한 열심과 신권적 절차에 충성스럽게 고착하는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큰 축복이 되어 왔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형제들이 저격병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일이 일상사였던 사라예보는 현재 구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온 대표자들이 평화롭게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산이 많은 이 아름다운 나라가 지난 세기의 전쟁으로 황폐되었지만, 여호와의 백성은 “위선이 없는 형제 애정”의 띠로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베드로 첫째 1:22)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16개의 회중과 연합하여 참하느님이신 여호와께 한목소리로 찬양을 돌리고 있는 1163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현대 역사

1991년에 자그레브에서 열린 국제 대회가 끝나고 나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국경이 갑자기 봉쇄되었습니다. 주요 도로와 다리들은 파괴되거나 군대가 친 바리케이드로 막히게 되었으며, 크로아티아 동부에서 온 많은 참석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많은 증인들은 따뜻한 형제 사랑을 풍성하게 나타내어, 자신들도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형제들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자그레브에서는 폭격을 경고하는 사이렌이 밤낮으로 울려 댔습니다. 사람들은 대피소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몇 주 또는 몇 달씩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델 지하실은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에 시 당국에 의해 방공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증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들이 생겼고, 사람들은 몸을 피하기 위해 그곳에 왔다가 그 이상의 유익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는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은 평상시대로 서둘러 전차에서 내려 베델 지하로 대피하였습니다. 모두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는 동안, 베델에서 봉사하는 한 장로는 사람들에게 몇 달 전에 자그레브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관한 환등 강연을 볼 생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였고 사람들은 제공된 내용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정말 큰 도전이 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총알이나 수류탄으로 인해 일부 왕국회관이 손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영적 양식을 소중히 여겼으며 이 사랑스러운 형제들은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10:25) 예를 들어, 시베니크에서는 6개월 동안 로켓 추진식 수류탄이 비 오듯 떨어졌고, 그 때문에 형제들이 왕국회관에서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한 장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도시 밖에 살고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모여 서적 연구와 「파수대」 연구를 보곤 하였습니다. 상황이 어려웠지만 우리는 전파 활동에서 느슨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주위 마을들에서도 전파하였습니다. 누구나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요. 그들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시에 나타난 형제 사랑

집을 잃은 많은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의 집으로 피신하였고 회중들은 필요한 도움을 베풀기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하였습니다. 일례로, 보스니아의 투즐라에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오시예크로 피신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가족이 있었는데,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에 있는 형제들은 그 가족을 왕국회관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회중 성원들은 그 가족 가운데 부인이 영적 자매라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기뻤습니다.

당국에서는 그 가족이 한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집은 낡아서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의 낡고 열악한 상태를 알게 된 형제들은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토브를 가져왔고 창문을 달아 준 사람도 있었으며 문과 침대를 마련해 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건축 재료들을 가져왔고 음식과 땔나무를 가져다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방 하나가 살 만한 공간으로 꾸며졌습니다. 하지만 그 가족이 그 집에서 겨울을 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중에서는 더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을 만들었고 전도인들은 각자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숟가락에서 지붕 재료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물품을 모았습니다.

내전이 계속되면서 식품이 금방 바닥났고, 지부에서는 우리 형제들의 물질적·영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부는 통치체와 협력하여 식품, 의류, 신발, 의약품을 모으는 일을 조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현지 형제들이 도움을 주었지만, 그들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의 형제들은 영적 공급품에 더해 의류와 의약품을 관대하게 기부하였습니다. 트럭들이 밤낮으로 도착하였는데, 자신의 개인적 안전보다 크로아티아 형제들의 필요를 우선시한 사람들이 자원해서 트럭들을 운전해 온 것이었습니다. 구호물자들이 자그레브의 중앙 보관소로부터 필요한 회중들로 보내졌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받은 크로아티아 형제들은 이제 어떻게 보스니아의 형제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까? 16톤의 식품과 땔나무를 실은 트럭들이 보스니아 국경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는데, 군인들이 제멋대로 군사 작전을 펴면서 나쁜 짓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물자를 운반하다가 그러한 군인들과 마주칠 경우,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뺏기게 됨은 물론 죽음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숲 지대를 통과해 가면서 검문소들을 하나하나 지나고 어떤 때는 최전선을 따라서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스니아의 트라브니크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군인은 형제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뛰어가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이 트럭을 몰고 여기에 왔습니다.’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식품을 집 안으로 들여놓았고, 몇 마디 말을 하고는 신속히 떠나야 하였습니다. 아직 들러야 할 곳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죠.”

많은 형제들이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자그레브 베델 앞으로 썼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쓴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러분의 수고로 인해 우리가 모든 영적 양식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내 주신 구호물자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형제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노고와 사랑에 찬 관심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난민이 된 형제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수입이 없는 형제들도 있고요. 도움을 받은 형제들은 얼마나 풍부한 도움이 베풀어지는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제들의 사랑에 찬 관심과 관대함 그리고 비이기적인 태도는 그들에게 깊은 감명과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믿음을 지탱시켜 주는 영적 양식을 형제들에게 공급하는 일에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극심한 고난을 인내하고 영적으로 더 강해지도록 여호와의 영이 실제로 도움을 주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야고보 1:2-4.

삶을 지탱시켜 준 희망의 소식

인도주의적 단체들이 나름대로 물질적 지원을 베풀기는 하였지만 오직 여호와의 증인만이 영속적인 구제를 가져오는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형제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저 내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세르비아 국경 근처에 있는 부코바르에서는 극심한 파괴로 인해 우리 형제들을 포함하여 주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야라는 한 자매는 그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4년 동안 크로아티아의 형제들과 연락이 끊겼지만 도시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러한 열심은 참으로 풍성한 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96년에 열린 지역 대회에 부코바르에서 온 20명으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참석한 것을 보고 크로아티아 형제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희망의 소식은 또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전 초기에 크로아티아군의 한 정예 부대 소속이었던 한 젊은 군인은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1994년에 그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에 「이 세상의 통치자는 과연 누구인가?」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전도지를 읽은 그는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책임이 여호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진리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군인이 된 한 가지 이유는, 19세 된 여동생과 가족인 다른 두 명을 내전 중에 살해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살해한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갈 계획을 이미 다 세워 놓았지만 전도지를 읽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수년간 자신의 인간성을 변화시킨 끝에 1997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결국 가족을 살해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정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하는 대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봉사의 직무에 대한 전도인들의 열심은 가장 격심했던 분쟁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크로아티아에서 가슴 벅찬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내전이 시작된 해인 1991년부터, 내전이 끝난 해인 1995년까지 파이오니아의 수는 132퍼센트 증가하였으며, 성서 연구 건수는 63퍼센트, 전도인 수는 35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로아티아의 형제들은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기울인 노력을 풍성하게 축복하셨습니다.

자기희생적인 일꾼들

1991년에 열린 국제 대회가 있기 얼마 전에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최초의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캐나다 출신인 대니얼 니전과 헬렌 니전이었습니다. 그에 더해 현지어를 배운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의 부부들도 크로아티아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그러한 부부들 중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인 하인츠 폴라크와 엘케 폴라크가 있는데, 그들은 덴마크에 있는 유고슬라비아어 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가 1991년에 크로아티아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들이 여행하는 봉사를 막 시작했을 때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배정받은 첫 순회구에는 달마티아 해안과 보스니아의 일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지역은 전부 내전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인츠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전시에 보스니아에서 회중들을 방문한다는 것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차량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불안정한 버스 운행 체계에 의존하여 여행을 해야 하였습니다. 짐을 많이 갖고 다닐 수 없어서 여행 가방 몇 개에 타자기 하나 정도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기지를 발휘해야 하였습니다. 한번은 투즐라에서 제니차로 이동하는 중에 군인들이 우리가 탄 버스를 멈춰 세웠습니다. 너무 위험해서 더 이상은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이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니차에 있는 형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태워다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적합한 서류를 갖춘 기름 수송 트럭 기사들이 우리를 태워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가는 동안 운전사에게 증거를 하였고 그는 주의 깊이 잘 들었습니다.

교전이 있어서 또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곁길을 이용해야 하였습니다. 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멈춰서 눈 속에 빠진 다른 트럭들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 지역을 벗어나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목적지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바레시까지 올 수 있었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멈추었습니다.

운전사는 운전석에서 누워 잤고, 아내와 나는 운전석 뒤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꼭 붙어 있었습니다. 살면서 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우리는 결국 제니차에 도착하였고 우리를 본 형제들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여행은 힘들었지만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곳 형제들은 수돗물이나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 후대를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유했으며 진리에 대한 사랑이 넘쳐흘렀습니다.”

내전이 끝난 이후로 거의 5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그 밖의 나라들에서 크로아티아로 임명되었습니다. 후에 여호와의 조직은 더 많은 선교인들을 보내서, 강하게 하는 도움과 격려를 더욱더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한 열심 있는 전 시간 종들은 야외와 회중에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 생전에 이런 날을 보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1980년대 후반까지 「파수대」는 베델 밖의 형제들에 의해 독일어에서 크로아티아어로 번역되어 월 1회 발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부터 베델 내의 번역 팀이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통치체에서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의 번역을 시작하는 일을 승인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150년 된 성서 번역판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 번역판에는 고어를 비롯한 많은 생소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어 번역 팀이 작업을 주도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어 그리고 마케도니아어 번역 팀과 밀접하게 협력하였습니다. 세 번역 팀 모두 서로의 작업과 정보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1999년 7월 23일 금요일은 크로아티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있어서도 오래도록 기억될 날입니다. 모두 네 곳에서 열린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 지역 대회에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로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또한 청중들은 마케도니아어로도 번역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분이고 울려 퍼지는 큰 박수갈채에 연사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많은 참석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한 오래된 장로는 “내 생전에 이런 날을 보다니 믿기지가 않네요!”라고 말했습니다. 2006년에는 이 세 언어로 「신세계역」 완역 성서가 발표되었습니다.

1996년까지는 전국 위원회가 오스트리아 지부 사무실의 감독 아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돌보았습니다. 1996년에 네 명으로 이루어진 지부 위원회가 그 지역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고, 그러한 마련 위에 여호와의 축복이 함께하고 있음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과 왕국회관들

다른 곳에서처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베델 가족도 신권적 성장의 영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베델 가족의 규모는 10명에서 약 50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델 집이 단지 네다섯 쌍의 부부가 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숙소를 추가로 임차해야 하였습니다.

지부 위원회가 구성되고 얼마 안 있어 통치체는 지부 위원회가 자그레브에 새로운 베델 집을 짓기 위한 부지를 매입하게 하였습니다. 현지 자원 봉사자들과 국제 종들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아름다운 지부 시설을 금세 완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과 왕국회관이 1999년 10월 23일 토요일에 봉헌되었으며, 자그레브 중심에 지어진 두 개의 왕국회관으로 된 건물도 함께 봉헌되었습니다. 15개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으며, 그중 한 사람이었던 통치체 성원 게리트 뢰시가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큰 체육관에서 4886명이 모여 즐거운 영적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그날은 크로아티아의 여호와의 백성에게 있어서 정말 잊지 못할 날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현대 역사에서 극도로 어려웠던 시기를 겪으면서도 50년 이상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겨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왕국회관을 짓기 위한 광범위한 건축 프로그램 역시 진행되어 왔습니다. 1990년까지 많은 회중들은 지하실이나 개인 아파트에서 모였습니다. 예를 들어, 스플리트에 있는 한 회중은 20년 동안 개인 집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의자가 50개밖에 없었지만, 어떤 때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 서 있어야 하였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크고 작은 대회들도 열렸으며 그런 경우에는 150명 이상이 참석하였습니다. 현재 스플리트에 있는 네 개 회중은 두 채의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보고 있습니다. 전도인 수의 증가로 대회는 호텔 회의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는 독일 젤터스에 있는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의 감독 아래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계속해서 조직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 건축을 위해 노소를 막론하고 자원하여 일한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양의 일이 수행되어 왔습니다. 현재까지 25채의 새로운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으며, 7채의 왕국회관이 개축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왕국 활동이 확장되었고 이 모든 일을 통해 여호와께 찬양이 돌아갔습니다.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왕국 활동

1991년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했을 때, 그 나라의 행정부는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종교에 대한 기존 법을 고수하였습니다. 새로 독립한 국가는 국민의 거의 90퍼센트가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직자들이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이전에 누린 법적 지위와 우리 형제들의 나무랄 데 없는 평판으로 인해 2003년 10월 13일에 법무부는 여호와의 증인이 크로아티아에서 이제 종교 단체로 등록되었음을 포고하였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세월을 견뎌 온 크로아티아의 여호와의 종들이 그처럼 법적 인가를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1990년대 초반에는 구유고슬라비아 지역 전체를 통틀어 파이오니아 학교가 단지 한 학급밖에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만 해도 매년 여러 학급이 열리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2008년 9월 현재, 크로아티아에는 69개의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5451명의 전도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놀랍게도 2008년 기념식 참석자 수는 9728명에 달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크로아티아에서 앞으로 더 큰 성장이 있을 가능성이 참으로 높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종교적 편협이 널리 퍼져 있고 일상생활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지만 이 지역의 모든 여호와의 종들은 분노에 찬 사탄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화를 터뜨린다 해도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계속해서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그 어느 때보다 굳게 다지고 있습니다. (계시 12:12) 하루하루 힘들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개탄스러운 도덕 상태에 대해 한숨지으며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9:3, 4; 마태 5:6) 현재 그러한 사람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으며, 그들은 오직 한 분의 참하느님을 숭배하도록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 길을 교훈하실 것이니, 우리가 그 길로 걸을 것이다.”—이사야 2:3.

마케도니아의 현대 역사

1세기에 사도 바울의 환상에 나타난 한 남자는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사도 16:8-10) 아직 봉사되지 않은 그 구역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하느님께서 인도하고 계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바울과 그의 동료 전파자들은 기꺼이 그 초대를 받아들였고 머지않아 그리스도교는 마케도니아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마케도니아 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현대의 더 작은 마케도니아 역시 참숭배에 있어서 어떻게 그와 비슷한 성장을 경험해 왔습니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케도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1991년에 마케도니아는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2년 뒤인 1993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새로 설립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지부 위원회의 감독 아래 마케도니아에 사무실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93년에 스코페의 알지르스카가(街)에 있는 한 주택을 매입하였고,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 있던 마케도니아 번역 팀이 새로 매입한 베델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순회 봉사를 위해 독일에서 미카엘 시벤과 디나 시벤이 왔으며, 세르비아에서 봉사하던 캐나다 출신의 대니얼 니전과 헬렌 니전이 마케도니아로 임지가 변경되었습니다. 전국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베델이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출판물이 제한을 받다

여호와의 증인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했지만 출판물을 수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정부는 잡지 수입량을 전도인 일인당 한 부씩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성서 연구생들을 위해 「파수대」 연구 기사의 복사본을 만들어야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또한 우편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보내온 잡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마케도니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소량의 잡지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몇 해에 걸친 법적 소송 끝에, 결국 대법원은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그때부터 원하는 만큼 출판물을 수입하는 것이 허가되었습니다.

2000년 8월에는 전도인 수가 1024명에 달하여 전파 활동을 보고한 사람들이 최초로 1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마케도니아어로 더 많은 출판물이 발행되고 전도인들이 증가하면서 알지르스카가에 있는 비좁은 주택으로는 늘어나는 베델 가족의 필요를 돌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이웃한 작은 주택 세 채를 매입하였고 새로운 두 채의 건물을 지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 주택들을 허물었습니다. 현재 34명의 마케도니아 베델 가족은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세 채의 건물에 살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베델 가족은 2003년 5월 17일의 봉헌식 프로그램을 위해 통치체의 가이 피어스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게 되어 기뻤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마케도니아 전역의 형제 자매들은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에서 왕국회관 건축을 돕는 마련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다섯 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건축 팀이 현지 회중들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1년부터 2007년 사이에 아홉 채의 새로운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이 다국적 건축 봉사자들은 어떠한 민족적 편견도 없이 평화와 연합 가운데 일함으로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완공된 왕국회관을 찾은 한 상인은 왕국회관이 훌륭한 기술로 지은 수준 높은 건물임을 알아보고는 “이 건물은 사랑으로 지어진 게 틀림없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건축 봉사자들이 슈티프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왕국회관을 짓고 있었을 때, 한 이웃 주민은 그 공사가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젊은 건축 봉사자들이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국회관이 완성되자, 그는 새로 지을 자기 집의 도면을 건축 현장으로 가져와서는 젊은 형제들에게 자기 집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높은 작업 수준에 감탄한 나머지 보수는 충분히 지불하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돈벌이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왕국회관을 건축하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그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신세계역」

한편, 헌신한 남녀로 이루어진 또 다른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은 다른 작업을 수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것은 「신세계역 성경」을 마케도니아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셨고, 불과 5년 만에 「신세계역」 전체의 번역이 완료되었습니다. 스코페에서 열린 2006년 “임박한 구출!” 지역 대회에서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가 이 훌륭한 새로운 성서 번역판을 발표했을 때, 참석자들은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열광적인 박수갈채가 길게 이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점심 휴회 시간에 이 새로운 성서를 받고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하느님의 말씀이 모국어로 번역된 이 뛰어난 번역판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성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르한은 6년 전에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연구를 사회한 형제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3년 전에 침례를 받은 이후로 성서를 여섯 번이나 통독하였습니다!

한동안 레센이라는 도시에는 증인이 오르한 한 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때 문맹자였던 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호의적인 말을 하였고, 어떤 부모들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자녀와 연구를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자기 자녀도 오르한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자라게 되었고 결국 레센에 주간 회중 서적 연구 집회가 생겼습니다. 관심자 한 사람이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고, 현재 오르한은 정규 파이오니아와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다

마케도니아 인구의 25퍼센트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어권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돕기 위해 2004년 7월에 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가 알바니아에서 왔습니다. 그 부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는데, 알바니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50만 명이 넘는 데 반해, 전도인이라고는 그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 년 뒤에 알바니아에서 온 두 번째 부부가 그들과 합류하였고, 이제 이 네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마케도니아 내의 알바니아 공동체 중심부에 위치한 키체보라는 곳에서 일곱 명의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은 집단의 성원들은 이듬해 봄에 알바니아어와 마케도니아어로 제공된 기념식 연설에 61명이 참석하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 집단은 17명의 열심 있는 전도인이 있는 집단으로 성장하였고, 평균 집회 참석자 수는 3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통치체는 마케도니아의 구역 전체를 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특별 운동을 수행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그 특별 운동의 목적은 아직 봉사한 적이 없는 구역에서 전파하고, 알바니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열렬한 호응이 있었는데, 7개국에서 온 337명의 형제 자매들이 기꺼이 자원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좋은 소식이 마케도니아 전역의 200여 곳에 전파되었는데, 40만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그러한 곳들에 살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좋은 소식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개월간의 특별 운동 기간에 2만 5000부가 넘는 서적과 팜플렛 그리고 4만 부가 훨씬 넘는 잡지가 배부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에 약 2만 5000시간이 사용되었으며, 200건이 넘는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들을 찾아왔는지 듣고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읽은 내용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별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진심 어린 감사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 교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정말 신선한 내용이네요!’”

한 전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 임지와도 같은 이 구역을 떠나기가 정말 아쉽네요. 우리는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절실히 진리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떠날 시간이 되어 성서 연구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니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한 부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휴가를 더 내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곳이 얼마나 크게 필요한 곳인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대변하여 한 전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처음입니다.”

일단의 전도인들은 테토보 시 근처의 산악 지대에 자리한 아무도 증거한 적이 없는 한 마을에서 전파하였습니다. 두 전도인은 길 왼편을 따라, 다른 두 전도인은 길 오른편을 따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겨우 세 집을 방문하여 증거를 했을 무렵에,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이 집집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인들의 방문 소식이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졌고 관심을 가진 많은 여자들이 자매들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길을 따라 좀 더 떨어진 곳에서는, 16명의 남자들이 모여 형제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네 개의 의자를 가져와 전도인들이 앉을 수 있게 하였고, 한 남자는 전도인들을 위해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전도인들은 모두에게 출판물을 나누어 주고, 성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하였고 모두가 주의 깊이 잘 들었습니다. 방문을 마치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씩 직접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한 나이 든 여자가 지팡이를 치켜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여자는 지팡이로 형제들을 가리키면서 “당신들 이걸로 혼 좀 나야겠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전도인들의 무슨 행동이 그 여자를 화나게 한 것입니까? 그 여자는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책을 주었잖아!”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웃집 사람이 받은 「성서 이야기」 책을 가리키면서 “나도 저 큰 노란색 책을 갖고 싶단 말이야” 하고 말했습니다. 지체 없이 형제들은 마지막 남은 「성서 이야기」 책 한 권을 그 여자에게 주었습니다.

로마(집시)에게 전파하다

마케도니아에는 마케도니아어를 말하기는 하지만 몇 가지 방언이 섞여 있는 구전 언어인 로마니어(집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많은 로마가 있습니다. 수도인 스코페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는 로마 거주 구역이 있으며, 약 3만 명의 로마가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슈토오리자리라고 하는 이곳에 두 개의 왕국회관이 한 건물에 있는 복합 왕국회관이 하나 있는데, 세 개의 로마니어 회중이 이 왕국회관을 사용합니다. 200명의 전도인들이 이곳의 생산적인 구역에서 즐겁게 봉사하고 있는데, 이곳의 전도인 비율은 주민 150명당 1명꼴로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합니다. 2008년 기념식에 708명이 참석한 것을 보면 로마들이 얼마나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리에 굶주린 로마들이 모국어로 하느님의 목적에 관해 배우도록 돕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2007년 특별 강연 골자를 로마니어로 번역하여, 로마계인 한 장로가 506명의 청중에게 강연을 하였고 청중은 인식 깊은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2007년 지역 대회에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이 로마니어로 발표되어, 출신 배경이 다른 모든 민족—로마계, 마케도니아계, 알바니아계—의 전도인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도인들은 마케도니아어로 된 출판물을 가지고 자신의 모국어로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로마니어 「요구」 팜플렛을 사용하여 진실한 로마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현재 마케도니아에는 21개 회중에, 1세기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르고자 열심히 일하는 1277명의 전도인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갈구하는 수많은 마케도니아인들이 나타내 온 인식 깊은 반응을 보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기 위한’ 현대의 활동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르비아의 현대 역사

발칸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1935년에 구유고슬라비아의 구역들을 돌보기 위해 바로 이 나라의 베오그라드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고, 그로 인해 놀라운 신권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세르비아 형제들은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새롭게 형성된 나라들에 어떤 도움을 주어 왔습니까?

나라들의 국경이 봉쇄되고 종교적·인종적 증오가 확산되고 있는 중에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형제들이 평화롭게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베델 밖에서는 인종적·국가적 편견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결국 세르비아 형제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1992년에 출판물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일이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재개되었습니다. 그처럼 장소를 옮긴 것은 지혜롭고도 시기적절한 일이었습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보스니아에서는 인도주의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지부 사무실은 사랑 많게도 구호물자를 보내는 일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 형제들은 그러한 물자를 세르비아인들의 통제 아래 있는 보스니아의 지역들로 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전투가 세르비아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전쟁으로 인한 영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상 제한으로 인해 독일에서 인쇄되어 오는 출판물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회중에 최근 호 잡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좀 더 최근에 나온 잡지가 도착할 때까지 이전 기사들을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결국 모든 호의 잡지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강하게 하는 도움’

길르앗 졸업생인 대니얼 니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991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는 정치적으로 크게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온통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나타낸 열심에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내와 내가 첫 특별 대회일에 참석하여 50명쯤 되는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모습에 큰 격려를 받았지요.”

니전 부부는 베오그라드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열 명이 일하기에 충분한 크기의 원래 사무실은 밀로라다 미트로비차가(街)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아래층에는 왕국회관도 하나 있었습니다. 번역 팀이 커지면서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부지가 선정되었고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말에 베델 가족은 새로운 시설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점점 더 어려워진 상황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을 나타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도인 수가 증가하면서 사랑에 찬 감독을 베풀 필요성 역시 증가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그러한 필요를 일부 충족시켜 주었는데, 그들은 활력이 넘치고 자기희생적인 전 시간 종들로서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습니다. 전시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세르비아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강하게 하는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골로새 4:11.

다른 나라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은 여러 가지 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세르비아 전국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라이너 숄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신권적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세르비아에 있는 55개 회중은 7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도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물가 상승이 가져온 고통

세르비아는 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피할 수 없었는데, 특히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이 문제였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93년 10월에서 1994년 1월 24일 사이, 116일 동안의 누적 물가 상승률이 500조 퍼센트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1982년부터 베델에서 일해 온 미라 블라고예비치는 그저 약간의 채소를 사는 데도 돈이 가득 든 자루를 통째로 들고 시장에 가야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또 다른 자매인 고르다나 시리슈키는 말하기를 자신의 어머니가 월 생활 보조금을 타 보니 그 가치가 겨우 두루마리 화장지 한 개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르다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이 갑자기 무가치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우리는 세계적인 형제 관계 덕분에, 해외에서 온 구호물자를 받았습니다. 은행과 정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형제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성서 번역

여러 해 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번역 팀들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한 장소에서 긴밀한 협조 아래 함께 일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각 번역 팀들은 해당 나라로 가게 되었지만 자그레브에 있는 번역 팀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세르비아어 번역 팀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 번역을 시작했을 때 특히 유용하였습니다. 목표는 1999년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그 성경을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번역자들이 성서 번역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세르비아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폭격이 있게 되면 전화 통신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렇게 되면 베오그라드의 번역자들이 인쇄 시설이 있는 독일로 자료를 전송하기가 어려워지게 될 것이 뻔하였습니다. 3월 23일 화요일, 공습이 임박한 상황에서 형제들은 밤샘 작업을 하여 아침 일찍 전자 문서 파일을 독일로 전송할 수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폭격이 개시되었고, 번역 팀은 대피소로 몸을 피하면서도 참으로 흐뭇하였습니다! 인쇄된 성서가 4개월 후에 베오그라드 대회에서 발표되었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폭격과 잦은 정전 속에서도 형제들은 계속해서 다른 출판물들을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던 일을 멈추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힘든 시기였지만, 모두는 절실히 필요한 영적 양식을 생산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행복해하였습니다.

형제들의 많은 수고와 여호와의 축복 덕분에, 1999년 7월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세르비아어로 발표되었습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된 그 번역판을 받은 대회 참석자들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넘쳐흘렀습니다. 그 후 2006년 대회에서 세르비아어 「신세계역」 전역 성서가 키릴 문자와 로마자로 발표되었습니다.

종교적 반대가 거세지다

세르비아의 지배적인 종교가 세르비아 정교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세르비아인과 정교회 신자를 동일시합니다. 그들은 정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세르비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성서에 근거한 희망의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1999년에 내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전도인 수가 거의 두 배로 늘어 최고 전도인 수가 4026명에 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의 그러한 영적 번영은 정교회의 분노를 샀습니다. 정교회는 국가주의적 열기를 더욱 부추겨서 우리의 그리스도인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은 노골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형제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21명의 형제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내전이 끝나고 얼마 후에 석방되었으며, 시련을 겪는 내내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2001년 4월 9일에 연방 내무부는 돌연 우리 출판물의 수입을 금지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우리 출판물이 그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금지된 출판물 목록에는 성서도 들어 있었습니다!

텔레비전과 신문에 나온 우리의 활동에 관한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때때로 일부 집주인들은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별 방문 봉사를 할 때 종종 집주인들은 우리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뺨을 때렸습니다. 어떤 때는 돌을 던지기도 하였지요.” 그에 더해 일부 왕국회관이 고의적인 파괴 행위로 손상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세르비아의 우리 형제들은 여전히 조심성을 나타내야 하기는 하지만 합법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특별 전파 활동을 조직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형제들이 휴가를 이용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배정되지 않은 구역에서 전파 활동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역에 살고 있는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현재 베오그라드에 있는 베델은 공원 같은 동산에 자리 잡은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명으로 구성된 전국 위원회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활동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과거 내전으로 황폐되었던 이 지역에서 여호와의 축복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해 왔으며, 이제 세르비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열심과 결의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코소보의 현대 역사

1980년대에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 상태는 1990년대에 와서 공공연한 전투로 표출되었고, 그 결과 많은 고통과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온갖 민족적 배경을 가진 동료 신자들에게 “위선이 없는 형제 애정”을 나타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첫째 1:22) 그에 더해 그들은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해 왔습니다. (마태 5:43-48)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때때로 도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알바니아어를 말하며 한때 이슬람교인이었던 살리우 아바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과거에 이슬람교인이었던 형제들이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항상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종교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은 우리가 그들을 버렸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립니다. 또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 긴장 관계 때문에, 과거에 이슬람교인이었던 사람들이 세르비아인들에게 전파하는 것도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러 민족적 배경을 가진 30명의 사람들이 살리우의 집에서 함께 집회를 보았습니다. 살리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시절에는 집회가 세르비아어로 열렸고, 우리는 베오그라드에서 오는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경찰이 우리 집에 불시에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베오그라드에서 온 형제들이 막 우리에게 출판물을 전해 주고 모두가 함께 교제를 나누고 있던 때였습니다. 내가 경찰들에게 그들이 모두 내 형제들이라고 말하자, 경찰들은 어떻게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이 형제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1998년에 이 집단의 전도인들은 코소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프리슈티나에서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장소를 임차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봄에는 민족 간의 긴장과 국가주의가 눈에 띄게 고조되었습니다. 살리우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웃에 사는 한 사람은 아들과 내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당시에 팽배한 정치적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의 세르비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이 집행될 수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폭력적이 되고 제멋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에서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1999년에 일어난 분쟁 중에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이웃 나라들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극도의 민족 분쟁 속에서도, 살리우는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고 세르비아인 형제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생각으로 틀 잡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에는 심한 증오심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습득된 것이지요. 심지어 진리를 알게 된 후에도, 그러한 감정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큰 변화를 해야 하였습니다. 그러한 증오심 때문에 나는 여호와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배우고 있으면서도,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회중의 한 자매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서를 계속 연구하면서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서로를 분열시키지만 여호와의 말씀의 진리는 서로를 연합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변화시키는 힘은 이 자매가 그리스도인 새 인간성을 입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세르비아인 형제 자매들과 함께 같은 회중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골로새 3:7-11; 히브리 4:12.

진정한 그리스도인 연합은 종교적으로 분열된 이 세상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국가주의의 영향을 받아 집들을 불태우고 수류탄을 던지고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1998년 7월에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집시),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 평화롭게 함께 버스에 타 있었습니다. 침례를 받으러 그 대회에 가고 있던 다슈리에 가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군인들이 버스를 세웠을 때, 우리는 그들의 깜짝 놀란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들을 휩쓸고 있는 민족적 긴장 관계 속에서도 버스 안에 있던 우리들은 하나의 백성, 바로 여호와의 백성으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로마계인 한 젊은 여자는 어렸을 때, 외국에 사는 이모들에게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가 극복해야 했던 첫 번째 장애물은 글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성서 연구를 하는 삼 년 동안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함께 사는 외할아버지였습니다. “나는 집회에 가려고 집에서 몰래 빠져나오곤 하였지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집회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맞곤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진리 때문에 신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지요. 충실한 사람인 욥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여호와에 대한 강한 사랑을 갖고 있었고, 연구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글을 모르는 두 소녀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학교에 다닌 적이 전혀 없지만, 신권 전도 학교에서 받은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뎀 그라이체브치는 1993년에 독일에서 진리를 배우기 전에는 이슬람교를 믿었습니다. 그 후 1999년에 그는 고향인 코소보로 돌아왔고 새로 증인이 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가족의 편견과 반대를 극복해야 하였습니다. 아뎀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사탄이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점과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잔학 행위의 배후에는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뎀의 아버지는 아들이 새로 갖게 된 그리스도인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에게 여호와와 가족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뎀은 여호와를 택했고 계속해서 영적으로 꾸준히 발전하여, 현재는 그리스도인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뎀의 아버지는 태도가 누그러졌고 지금은 아뎀의 결정을 더 존중해 줍니다.

아뎀의 아들인 아드난은 어렸을 때는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드난은 무술에 심취해 있었고 경쟁 상대들에게 ‘킬러’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리가 그의 마음에 이르게 되자, 아드난은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잘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드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물질적으로는 상황이 좋았지만 영적으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봉사를 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변화를 해야 할 때라고 판단한 나는 직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드난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봉사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후에는 알바니아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현재 장로인 아드난은 아내 헤디예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드난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전 시간 봉사를 선택한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연합된 숭배와 가르침

현재 코소보에 있는 여섯 개의 회중은 모두 임차한 시설을 왕국회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중들은 규모가 작은데, 예를 들면 페치 시에 있는 회중은 전도인이 28명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임명된 형제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매주 공개 강연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회중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페치 시에 있는 형제 자매들처럼 매주 「파수대」 연구와 그 밖의 회중 집회를 위해 충실하게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세르비아 전국 위원회는 여러 해 동안 극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코소보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2000년에 통치체는 변화하는 형제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알바니아 지부가 코소보의 전파 활동을 돌보도록 임명하였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코소보의 여호와의 증인은 대다수가 세르비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집회가 세르비아어로 열렸고, 형제들은 알바니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코소보의 형제들은 대부분 알바니아인입니다. 세르비아어 회중 하나를 빼고는 집회들이 모두 알바니아어로 진행되며, 형제들은 세르비아 형제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연설들을 기꺼이 통역해 줍니다. 크고 작은 대회들도 이 두 가지 언어로 열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08년 지역 대회 프로그램 전체가 세르비아어 통역과 함께 알바니아어로 제공되었으며, 주요 연설들은 코소보 장로들이 세르비아어로 하였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밖에는 증오심이 가득하지만, 대회장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가족입니다.”

코소보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인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성서를 존중하며 종교에 관해 기꺼이 대화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소보의 형제들은 2008년에 164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여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구역을 돌보기 위해 노력하면서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몬테네그로의 현대 역사

지중해의 숨은 진주인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 해의 연안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몬테네그로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상적인 다양성과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는 매혹적인 아드리아 해변이 293킬로미터가량 펼쳐져 있습니다. 타라 강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깊고도 긴 협곡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스쿠타리 호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조류 보호 구역 중 하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면적이 스위스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나라 안에 전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의 역사는 전쟁과 분쟁과 고난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들은 몬테네그로 사람들의 전통과 사고방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그들은 용기, 충절, 품위, 겸손, 자기희생 정신,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과 같은 특성들을 높이 평가하며, 그러한 가치관이 그들의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잘 이겨 내는 몬테네그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였으며, 성서 진리를 충성스럽게 옹호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

1991년에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대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구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모인 형제들이 보여 준 연합과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사보 체피르니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운이 감돌고 있던 터라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여행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문제없이 대회에 도착하는 수많은 버스들을 보면서 매우 놀랐습니다. 더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증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평화와 연합이었지요. 대회 첫째 날에는 수많은 경찰관이 배치되었지만, 우리가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다음 날부터는 소수의 경찰관들만 근무를 섰습니다.”

내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한 부부가 정기적으로 크로아티아에서 몬테네그로까지 와서 사보와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이제 국경이 봉쇄된 상황에서 사보는 어떻게 성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사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구 진도가 더 많이 나간 관심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한 침례받은 형제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나와 연구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면서, 침례받지 않은 한 사람이 나와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1992년 무렵에는 헤르체그노비 시에서 회중 서적 연구와 「파수대」 연구 집회를 보던 집단의 성원 수가 15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사보는 아내와 딸과 함께 계속 잘 발전하였고 1993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아름다운 이 해안 도시에는 왕국회관이 하나 있으며 25명의 전도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에 한 집단의 전도인들이 수도인 포드고리차 시에서 집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집단은 계속 발전하였고, 1997년에 왕국회관을 지을 부지를 매입할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형제들이 매입한 땅에는 담장이 있었는데, 형제들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 담장을 그냥 놔두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웃 건물 지하에 사는 한 경찰관이 자신이 사는 어두운 집에 빛이 더 잘 들 수 있도록 담장을 헐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웃인 그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형제들은 담장을 허무는 데 동의하였고 그 대신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형제들이 그처럼 이웃 사랑을 나타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 건물의 다른 세입자들이 형제들에게 말썽을 피웠을 때, 그 경찰관은 그들에게 왕국회관을 공격했다간 모두 고발 조치를 당하게 될 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현재 그곳에는 아름다운 왕국회관과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숙소와 지붕이 있는 넓은 주차 공간이 있으며, 이 주차장은 대회를 여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닉시치에 있는 형제들의 경우에는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1996년에 부지를 매입하였지만, 지역 주민들이 자기 지역에 왕국회관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건축 공사를 하는 동안 이웃 사람들이 건물을 훼손할 것을 우려하여 밤낮으로 경계를 섰습니다. 어느 날 그 지역의 사제가 선동한 200명의 군중이 총과 몽둥이를 들고 공사 현장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공중으로 총을 쏘아 대더니 왕국회관의 벽돌을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들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상황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다른 부지를 찾아보았습니다. 4년 후에 한 건물을 발견하였고, 그 건물을 수리해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과 아무런 마찰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왕국회관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의에 찬 형제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공사를 시작해 새로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몬테네그로에 있는 네 개의 회중은 세르비아 전국 위원회의 감독을 받고 있습니다. 인구 대 전도인 비율은 2967 대 1로, 201명의 전도인들은 6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지원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종교가 성서를 읽는 일보다는 전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의 우리 형제 자매들은 충성스럽게 끈기를 나타내면서 좋은 소식을 담대하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슬로베니아의 현대 역사

슬로베니아는 1991년에 독립을 얻기 전까지, 유고슬라비아의 북서쪽 지역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독립 후 경제적으로 꾸준한 성장을 이룩하였고, 2004년에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비교적 국토 면적이 작지만, 참으로 다양한 자연경관을 자랑합니다. 장엄한 알프스, 산속의 호수, 울창한 숲, 거대한 석회 동굴, 매혹적인 슬로베니아 해안 지방이 모두 이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한 시간 남짓이면, 서늘한 알프스의 산비탈을 타고 기후가 온화한 아드리아 해변가의 올리브나무 숲과 포도원까지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에 더해 슬로베니아의 문화적·역사적 유적지들은 무궁무진한 탐구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국립공원이나 역사적인 도시보다 이 작은 나라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풍부한 영적 유산을 가진 나라입니다.

왕국회관과 파이오니아들

앞에서 “성서를 믿는 이발사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믿음에 관해 전파했던 도시가 마리보르였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발전한 작은 집단은 한 식당을 편리한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이 식당에는 적절하게도 노비 스벳(신세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증인들은 아름다운 왕국회관에 모여 숭배를 드리고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도인의 증가와 더불어 1990년대에 상황이 더 나아졌기 때문에 지역 건축 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의 지원과 해외로부터 온 기금에 힘입어 회중들은 1995년 이래로 14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하거나 개축해 왔습니다.

전도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정규 파이오니아의 수도 증가하였는데, 1990년에는 10명에 불과했지만 2000년에는 107명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 중에 아니차 크리스탄이 있었는데, 그는 진리를 받기 전에는 정치에 활발히 참여하던 여성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슬로베니아로 와서 봉사한 형제 자매들은 전파 활동에서 큰 자극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92년에 슬로베니아 최초의 선교인들인 프랜코 다고스티니와 데비 다고스티니가 도착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임지가 아프리카로 바뀌자, 오스트리아 출신의 새로운 두 선교인 다니엘 프리들과 카린 프리들이 슬로베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길르앗 선교인들인 제프리 파월과 토니아 파월, 요켄 피셔와 미카엘라 피셔가 이곳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여호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나타내 왔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

1994년에 병원 안내부가 베델에 생겼고, 두 개의 병원 교섭 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임명된 일부 형제들이 보건부 장관을 만났고, 그는 슬로베니아의 모든 병원장들과의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병원 교섭 위원회의 역할과 여호와의 증인이 수혈을 거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의사들과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들 사이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의학지들에 무수혈 치료에 대해 설명하는 기사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1995년에 슬로베니아의 의사들은 최초로 피를 사용하지 않고 개심 수술을 하였습니다. 대중 매체는 성공적이었던 그 수술에 관해 보도하였고, 수술을 담당한 의사와 마취과 의사는 그에 관한 학술 기사를 썼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무수혈 치료를 위한 길이 열리게 되었고 현재 더 많은 의사들이 치료와 관련된 여호와의 증인의 선택을 기꺼이 존중해 줍니다.

확장되는 밭의 필요를 돌보는 일

1991년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고 나서 통치체는 왕국 활동을 더 잘 돌보기 위해 슬로베니아에 사무실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 중심에 있는 1층짜리 건물을 매입하였습니다. 그 건물을 개축하였고 1993년 7월 1일에 베델 성원들이 입주할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처음에 베델 가족은 10명이었지만, 10년이 채 안 되어 그 수는 3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따라서 근처에 있는 한 건물을 임차하여 주방과 식당과 세탁실로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사무실 공간을 늘리기 위해 베델 성원들은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하였습니다. 슬로베니아 사무실은 1997년에 여호와의 증인 지부 사무실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슬로베니아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건축하라는 통치체의 승인이 나자 형제들은 적절한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40군데의 부지를 자세히 검토한 뒤에 형제들은 캄니크 근처의 부지를 선정하였는데, 이곳은 수도에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아름다운 알프스의 산봉우리들 기슭에 위치한 곳입니다. 곧 건축법에 따른 요구 조건들이 충족되었고 건축 허가가 났으며, 부지를 매입하였고 건설 회사와 계약을 하고 국제 종들이 건축 공사에 초대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사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이웃 주민들은 서둘러 공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던 날, 반대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쳐서 공사 현장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고는 공사를 반대하는 구호를 적은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엿새 후 정오 무렵에, 30명가량의 경찰이 반대자들이 쳐 놓은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는 일을 맡은 시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착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은 경찰에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사는 연기되었고, 그날 형제들은 물론 건설 회사 사람들 중 아무도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공사가 연기되면서 반대는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형제들은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이 세 번이나 건축 현장 울타리를 무너뜨렸지만 결국 한 달 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더 이상의 방해 없이 공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 그러한 반대는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대중 매체의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건축 공사에 관한 150개가 넘는 보도 내용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습니다. 약 11개월 후에 공사가 끝났고 2005년 8월에 베델 가족은 새로운 시설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형제들과 이웃 주민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많은 이웃 주민들이 지부 시설을 방문하였습니다. 이전에 공사를 반대했던 한 사람은 후에 건축 공사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지부 시설을 견학하면서 그는 형제들의 따뜻한 환영과 깨끗한 건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내가 이제는 여러분들 편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그토록 반대했던 것만큼이나 이제는 그들 편이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하고 대답합니다.”

2006년 8월 12일은 참으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통치체의 시어도어 재라스는 그날 약 20개국에서 온 144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류블랴나에서 열린 특별 모임에서 슬로베니아 전역은 물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3097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습니다.

밝은 미래

슬로베니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도와 축복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앞날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2004년 지역 대회에서 슬로베니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을 받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현재 그들은 시설이 잘 갖추어진 새로운 지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봉사하는 많은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자신들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습니다.—마태 28:19, 20.

국민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 슬로베니아에서는 공산 통치 기간을 겪으면서 많은 무신론자가 생겨났습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염려에 짓눌려 있거나 물질주의의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운동 경기나 오락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약속에 이끌리는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성장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2008년 8월에는 1935명의 전도인 최고 기록에 달하였으며, 전도인들 중 약 4분의 1이 어떤 형태로든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외국어 구역으로는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 수화, 알바니아어, 영어, 중국어, 크로아티아어 밭이 있습니다. 과거 단 두 명의 이발사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던 미미한 시작과는 달리, 현재 슬로베니아에서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열심 있는 많은 전파자들이 참하느님 여호와를 섬기고 싶어 하는 합당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마태 10:11.

발칸 반도의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은 많은 분쟁과 아픔과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적 편협과 민족 간의 증오 속에서도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존재한 사랑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참제자로 식별시켜 주었으며, 여호와에 대한 참숭배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그 무엇보다도 높은 위치로 드높여 왔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랑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순결한 숭배로 이끌어 왔으며, 우리 형제들이 일치 연합하여 영원히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굳은 결심을 확고히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이사야 2:2-4; 요한 13:35.

[각주]

a 우스타샤는 가톨릭교회의 지원을 등에 업고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파시스트 혁명 운동 조직이었다. 우스타샤는 그 잔인성으로 악명이 높았다. 체트니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결성된 세르비아 민족주의 유격대를 가리킨다.

b 정치적인 분위기 때문에, 형제들이 추구하는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경건한”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c 「파수대」 1994년 11월 1일호 23-27면에 실린 “보스니아에 있는 믿음 안의 가족을 도움” 기사 참조.

[165면 삽입]

국가적·종교적 편견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휩쓸고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173면 삽입]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가? 물론 아니지!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과 생각에 달려 있나? 역시 아니지!’

[144면 네모]

구유고슬라비아 지역 내의 상반되는 점들

일단의 사람들에게 구유고슬라비아 지역 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에 관해 물어보면 아마 서로 다른 몇 가지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동의할 만한 점이 있다면,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한다고 공언하며 문자 체계와 언어마저 다른 뚜렷이 구별되는 7개의 민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민족들을 구분하는 주된 기준은 종교입니다. 1000여 년 전에 그리스도교국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한 쪽과 가톨릭 정교회를 신봉한다고 공언하는 쪽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의 한가운데를 경계로 이 양편이 나뉘어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국민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 반면,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국민들은 대부분 정교회를 믿습니다. 보스니아에는 이슬람교와 가톨릭교와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언어 역시 사람들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 왔습니다.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소보를 제외하고는 남슬라브어를 사용합니다. 각국이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공통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몬테네그로인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코소보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비교적 어렵습니다. 19세기 말에 유사한 언어들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그러한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지난 10년간 구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나라들은 단어들을 선별하여 사용함으로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148면 네모와 삽화]

시계 수리공이 슬라보니아에서 진리를 널리 전하다

1930년대에 안툰 아브라모비치는 크로아티아의 마을들을 다니면서 시계를 수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 여관에서 그는 우리 소책자를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안툰은 소책자를 읽고 즉시 그것이 진리임을 인식하였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부에 편지를 써서 출판물을 더 요청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안툰은 헌신한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마을들을 다니며 사람들의 시계만 고쳐 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증거도 하였습니다. 그처럼 전파 활동을 위한 구실을 갖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는데, 전파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프리블라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는 작은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진리는 그곳에서부터 빈코브치와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아브라모비치 형제는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배부되는 출판물을 비밀리에 인쇄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였기 때문에 1947년에 장기 투옥형을 선고받은 14명의 형제들 중에 포함되었습니다. 석방된 후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봉사에 대한 그의 강한 열심은 생애 전체에 걸쳐 변함이 없었습니다.

[151면 네모와 삽화]

지휘자가 파이오니아가 되다

친위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알프레드 투체크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알려진 지역에서 프리츠 그뢰거라는 동료를 통해 오래전에 성서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1920년대 후반에, 알프레드는 마리보르에 있는 등대사에 연락을 취해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파이오니아들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보수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여 그 직업을 포기하였고 ‘뒤에 있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누가 9:62) 1930년대 초에는 독일에서 온 파이오니아 형제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전파 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구역 카드를 만드는 일도 도왔습니다. 그는 1934년에 독일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프리다와 결혼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첫 임지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였습니다. 후에 그들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에 가서도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오토바이를 이용하였습니다. 비록 당시에 좋은 소식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파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155, 156면 네모와 삽화]

건강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마르틴 포에칭거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파이오니아 집단을 감독하는 일을 맡기 전에 중부 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후에 그와 결혼한 독일 출신의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 자매인 게르트루트 멘데를 만난 것도 그 시기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건강을 돌보는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해야 하였습니다. 의료 보험이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필요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종종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께서는 호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포에칭거 형제가 자그레브에서 몹시 앓게 되었을 때, 멘데 자매가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게르트루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30년대 중반에 마르틴과 나는 둘 다 사라예보에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마르틴은 몸이 좋지 않았고 그날 밤에 열이 거의 40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마르틴이 어떤지 보려고 그가 사는 곳으로 갔을 때, 여주인이 그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여주인과 나는 현지 민간요법을 사용하여 설탕을 듬뿍 넣어 끓인 포도주를 가지고 치료를 해 보려고 했지만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지요. 나는 전화번호부를 보고 여러 의사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런저런 핑계를 댔고, 즉시 오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요.

여주인이 병원에 전화해 보라고 하였고 그래서 나는 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마르틴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구급차를 보내 주었습니다. 구급차에 실리는 마르틴을 보며 여주인은 내게 ‘그 사람을 다시는 못 보게 될 거예요’ 하고 말했습니다.

걱정이 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데 돈 문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파이오니아들이 가진 돈이라고는 출판물에 대한 기부금으로 받는 것이 전부였고, 그 돈으로 가까스로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정도였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치료를 받는 데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몰랐습니다. 탈러 박사는 마르틴을 검사하고 나서 이렇게 진단을 내렸지요. ‘늑막염입니다. 수술이 필요해요. 회복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탈러 박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였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나는 여러분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마르틴의 수술 비용을 청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의 병으로 인해 우리는 사라예보로 가지 못하고 독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삽화]

마르틴 포에칭거, 1931년 독일

[161, 162면 네모와 삽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인쇄를 하다

리나 바비치

출생 1925년

침례 1946년

소개 활동이 합법화된 때인 1953년 이후로 베델에서 봉사해 왔다. 잡지와 출판물을 인쇄하고 발송하는 일을 도왔다. 지금도 자그레브 베델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형제들이 교도소에서 풀려난 후, 잡지를 생산할 준비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얼마 없었고 해야 할 일은 많았습니다. 상황을 알게 된 나는 그 일에 자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세속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하루 종일 세속 일을 하고 밤늦게까지 출판물을 인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지부는 아직 시내에 소유한 부동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인 페타르 옐리치와 옐레나 옐리치는 출판물을 등사하는 데 자신들의 원룸 아파트를 사용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은 가로세로 4.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마천을 펼쳐 놓은 나무틀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인쇄한 종이들을 쌓아 놓았습니다.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는 수동식 등사기를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에 약 800페이지를 인쇄하였습니다. 현대식 인쇄기에 비하면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끝에 필요로 하는 출판물을 모두 생산할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옐리치 부부는 우리가 일을 마치고 쌓여 있는 인쇄된 종이들을 옮겨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결코 불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불평은커녕 그들은 행복해하였고 그런 식으로 왕국 활동을 지원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눈빛이 역력하였습니다. 옐레나는 가능할 때면 다른 연로한 자매들과 함께 인쇄된 종이를 모으고, 철하고, 접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한 도움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1958년에는 전기 등사기를 들여왔고 그 덕분에 인쇄가 더 용이해졌습니다. 1931년에 겨우 20부의 잡지를 생산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 초에는 세 개 언어로—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키릴 문자), 슬로베니아어로—2400부를 인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적을 생산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소책자들을 인쇄하였습니다. 1966년에는 인쇄량이 최고 기록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책이 현지 인쇄 업자를 통해 소책자 12부의 형태로 생산되었습니다. 12부의 소책자를 한데 모으면 한 질의 전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 개 언어로 5만 권에 해당하는 책을 인쇄하기 위해 소책자 60만 부를 인쇄해야 하였습니다.

현재 나는 자그레브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봉사를 드린 내 생애와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의 활동을 여호와께서 어떻게 축복해 오셨는지를 되돌아보노라면 정말 흐뭇한 마음이 듭니다.

[176, 177면 네모와 삽화]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비차 제믈랸

출생 1948년

침례 1961년

소개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섯 번 투옥되었다. 후에 주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으며 현재 자그레브에 있는 한 회중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은 진리 안에 계셨고, 우리는 집에 있을 때면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군대에 징집되어 출두하게 되었고, 내 입장을 진술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중립 입장을 설명한 후에 나는 재판을 받고 9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풀려나 보니 영장이 또 나와 있었습니다. 나는 또다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번에는 1년 형이었습니다. 출소 후 세 번째 영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다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15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네 번째에는 20개월 형을, 다섯 번째에는 2년 형을 받아서 도합 6년이 넘는 기간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1966년에서 1980년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있었습니다.

두 번은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골리오토크로 보내졌습니다. 그 섬 전체가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을 위한 교도소였습니다. 나는 정치범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바다를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무 상자에 돌을 담아 섬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날라다가 바다 속에 던졌습니다. 돌을 담은 나무 상자는 한 상자에 100킬로그램이 넘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걸어 돌아와 또 돌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골리오토크로 보내졌을 때는 신입들 모두를 한 달씩 독방에 가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독방에 갇혀 완전히 홀로 남겨지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기에 이전 어느 때보다도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성서도 성서 출판물도 없었습니다.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격려를 준 것이라고는 부모님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 나는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력합니다”라고 한 말에 담긴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12:10) 그곳에서 풀려나 직업을 구하였을 때, 나는 참으로 기뻤고 강한 상태였습니다.

다른 교도소에서는 한 심리학자의 상담을 받아야 하였는데, 그는 아주 가혹한 사람이었고 내게 모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내게 소리를 지르면서 무엇보다 내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을 변호하는 말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 심리학자는 또다시 나를 부르더니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이 교도소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 같군요. 교도소 밖에서 일할 자리를 알아봐 주겠어요.” 놀랍게도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가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를 여호와와 더 가까워지게 해 준 그 모든 경험들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179면 네모와 삽화]

‘사람들은 축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나요?’

헨리크 코바치치

출생 1944년

침례 1962년

소개 1973년에는 주말 순회 감독자로, 그 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전 시간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현재 크로아티아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우리는 봉사를 하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오해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거리에서나 집집에서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안 되고 그러한 목적으로 등록된 장소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헤미야가 했던 것처럼 나는 합당한 말을 찾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짤막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수사관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축구에 대해 축구 경기장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나요?” 그는 어디에서든 축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관해서도 교회나 숭배 장소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분명하겠군요.” 나와 짝은 다섯 시간 동안 취조를 받긴 했지만 결국 풀려났습니다.

아내인 아나와 나는 지난 40년간의 봉사를 돌이켜 보면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이서 거의 70명의 사람들이 진리를 알도록 돕는 특권을 누려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임무는 그 무엇이든 우리의 삶을 언제나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습니다.

[195, 196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할림 추리

출생 1968년

침례 1988년

소개 사라예보에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조직하고 구호물자를 분배하는 일을 도왔다.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장로와 병원 교섭 위원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대표자로 일하고 있다.

사라예보 시는 1992년에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출판물을 받을 수 없었을 때 우리는 지난 호 잡지들을 연구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구식 타자기를 사용하여 구할 수 있는 연구 기사들을 타자하였습니다. 전도인이 52명밖에 없었지만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약 240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1993년 11월에 내전이 한창이었을 무렵, 우리 딸인 아리야나가 태어났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기에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한 번에 몇 주씩이나 수돗물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구를 태워 연료로 사용했고, 집회에 참석하려면 위험한 곳들을 지나가야 하였습니다. 저격병들이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어떤 거리나 바리케이드는 뛰어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조용한 날, 집회가 끝나고 아내와 우리 아기와 드라젠 라디시치 형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기관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우리는 길에 엎드렸지만 나는 복부에 총을 맞았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고, 용기 있는 몇몇 젊은이들이 집에서 뛰어나와 우리를 안전한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사들은 신속히 수혈을 하기 원했습니다. 나는 의사에게 양심적인 이유로 수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의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며 압력을 가했지만 나는 확고하였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의사들은 두 시간 반 동안 수술을 하였고, 나는 수혈을 받지 않고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수술 후에는 요양이 필요하였지만 전쟁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라예보를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은 공항 밑으로 나 있는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뿐이었습니다. 그 터널은 길이가 900미터에 높이가 대략 1.2미터 정도였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업고 나는 짐을 들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술로 인한 상처 때문에 그나마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머물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라예보를 떠나기 전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우리 형제들과 창조주께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 특히 어머니 곁을 떠난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라예보를 빠져나와 요양을 좀 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하느님께 하였음을 가족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정말로 좋습니다. 이제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사라예보의 형제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아내인 암라는 나를 크게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12월에, 우리는 사라예보에 있는 터널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바깥에서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터널을 통과해 사라예보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죠? 모두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데 당신들은 포위된 도시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겁니까?” 나는 사라예보 왕국회관에서 우리 형제들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동적인 재회를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 것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210면 네모]

크로아티아의 섬들

1778킬로미터에 달하는 크로아티아 해안의 앞바다에는 1000개가 넘는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데, 그중 약 50개의 섬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섬들의 크기는 면적이 1제곱킬로미터가 안 되는 것에서부터 약 4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섬 주민들은 주로 고기잡이를 하며 올리브나무를 재배하고 포도원을 돌보며 텃밭을 가꿉니다. 140개의 섬들과 산호초들로 이루어져 있는 군도인 코르나티 국립공원은 잠수를 통해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크라판 섬과 즐라린 섬 주민들은 산호와 해면동물들을 채취하기 위해 잠수를 합니다. 흐바르 섬에서는 라벤더, 꿀, 로즈메리유(油)가 생산됩니다. 불모지에 가까운 파그 섬에 사는 주민들은 섬에서 나는 약초와 소금기 있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억센 양들의 젖으로 고급 치즈를 만듭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모든 섬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떤 섬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반면,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증인들은 집단적으로 특별 활동을 조직하여 며칠씩 섬에 가서 전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섬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전이 되기도 하는데, 섬 사람들이 본토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방언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기쁘게도, 섬 사람들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코르출라 섬에는 52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하나 있습니다. 고립된 곳에 회중이 있다 보니 연사들이 공개 강연을 하러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울이는 노력은 고립된 곳에 있는 이 회중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계속 연합되어 있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베드로 첫째 5:9.

[224면 네모와 삽화]

“나는 구치소에 11일 먼저 출두하였다”

파블리나 보고에브스카

출생 1938년

침례 1972년

소개 1975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1977년에 마케도니아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80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다.

전파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받곤 했는데, 어떤 때는 취조가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법정에서는 내가 국가의 정적(政敵)이며, 서방 국가들의 선전을 퍼뜨렸다는 거짓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20일, 또 한 번은 30일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필이면 20일 형을 살아야 하는 기간에 지역 대회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법원에 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치소에 11일 먼저 출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구치소 직원들은 내가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능한 빨리 구치소에 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11일 뒤에 한 경찰관이 내가 구치소에 출두했는지 보려고 왔습니다. 구치소 직원들로부터 내가 벌써 11일 동안 그곳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결국 나는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232면 네모와 삽화]

‘그들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주었다’

샨도르 팔피

출생 1933년

침례 1964년

소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공산주의 유격대가 세운 수용소에서 부모가 진리를 배웠다. 그는 주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현재는 세르비아 전국 위원회의 한 성원이다.

우리 가족은 헝가리계였기 때문에 잠시 동안 유격대가 세운 수용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잘된 일이었는데, 나의 부모가 바로 그곳에서 진리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 대였던 나는 진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 몇 년간 살았던 프란츠 브란트 형제는 내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한 헝가리어 출판물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해 달라는 그의 요청에 응하였고 그래서 내가 그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출판물은 번역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내가 그 출판물을 꼭 읽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은 효과가 있었고 나는 얼마 후인 196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일 중 하나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그 일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는데, 형제들의 형편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나는 온 가족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치른 모든 희생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방문을 간절하게 기다린 형제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236, 237면 네모와 삽화]

“그 사람들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아그론 바쇼타

출생 1973년

침례 2002년

소개 코소보 해방군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현재는 정규 파이오니아와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살해되는 것을 비롯해서 전쟁 때문에 일어난 모든 끔찍한 일들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모든 고통에 대해 뭔가 조처를 취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세르비아인들과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내 생각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나는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이슬람교인이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고 코소보 해방군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해방군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많은 존경과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공격적이고 교만하게 되었는데, 무엇이든 명령만 하면 안 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내에게도 그러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나는 아내가 내가 말하는 대로 하고 언제나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내인 메리타는 전쟁 중에 증인들과 접촉하였고, 증인 출판물을 몇 부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게 “이 책들을 한번 읽어 보세요. 하느님에 관한 책들이에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가 하느님에 관해 나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아내는 나와 더 이상 다투지 않으려고 침실로 자러 들어갔습니다.

혼자 있게 된 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느님께 참다운 복종을 해야 할 때」(The Time for True Submission to God)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이슬람교인이었던 나는 거기에 코란에서 인용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몇 부 읽었습니다. 그날 밤늦게, 나는 침실로 가서 아내를 깨우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구한테서 이 책들을 받았어? 그 사람들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읽은 내용이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나를 믿기 어려워했고,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날 밤에 우리는 한 증인에게 전화를 했고, 언제 어디서 집회가 열리는지 알아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집회에 갔습니다. 나는 형제들의 친절함과 따뜻한 환대에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집회를 보는 중에 나는 한 가지 질문이 생겼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로들은 내가 그들과 그토록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 긴장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일 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장로들은 정말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바로 그날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내 인간성을 많이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흡연을 중단하고 싶었고 이전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와 정기적인 집회 참석을 통해서 나는 과거의 행로를 회개하고 새 인간성을 입었습니다. 진리는 내 인생과 우리 가족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현재 아내와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2006년에 나는 봉사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현재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조만간 어떻게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인지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249, 250면 네모와 삽화]

“마치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신 것 같았습니다”

야네즈 노바크

출생 1964년

침례 1983년

소개 믿음 때문에 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으며, 현재 슬로베니아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군 당국은 1984년 12월에 내게 반복해서 입대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국자들은 우리 집 문 앞에 징집 통지서를 붙여 놓았고 헌병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군 막사에 가서 나의 신념에 대해 설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설명을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군인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내 머리를 밀고, 입고 있던 옷을 빼앗은 뒤에 군복을 주었습니다. 군복을 입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내게 강제로 옷을 입혔고, 그런 다음 내 손에 펜을 쥐어 주고는 군 입대 문서에 강제로 서명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나는 조기 체조와 기 경례와 같은 활동에도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네 명의 군인이 나를 연병장으로 끌고 가 체조를 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나는 팔을 위로 들어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 팔을 강제로 들어 올리려고 하다가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깨닫고는 그만두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총을 겨누고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때로는 커피와 케이크를 주면서 나를 달래 보려고도 하였습니다.

내가 신념을 굽히지 않자 일부 군인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국가 원수였던 티토의 사진을 내 얼굴 앞에 대고 침을 뱉으라고 하였지만 내가 거절하자 몹시 화가 난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들은 내가 무기를 들게 하려고 시도하였고, 역시 나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군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어 나는 한 달 동안 막사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감방에서 몇 주를 보냈습니다. 감방 안에는 밤새도록 붉은색 등이 켜져 있었고, 나는 교도관이 기분이 좋을 때에만 화장실에 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3년 형을 선고받고 중죄인들을 보내는 곳인 아드리아 해에 있는 골리오토크 섬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싸우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양손이 사슬로 묶인 채, 죄수들 간의 폭력으로 악명이 높은 그 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중립 입장 때문에 수감되어 있는 다른 증인 네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서나 다른 어떤 출판물도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서 한 권이 이미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위장한 상자 바닥에 「파수대」를 숨겨서 보내 주었습니다. 교도관들은 결코 우리 출판물을 발견하지 못했고, 우리는 그리스도인 집회를 보면서 한 번도 발각된 적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출판물을 그대로 꺼내 놓은 상태에서 교도관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눈앞에 출판물을 두고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신 것 같았습니다.

1년 뒤에는 슬로베니아로 이감되었고 그곳에서 형기를 마쳤습니다. 아직 교도소에 있는 동안 나는 라헬라와 결혼하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석방되었고 아내와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1993년부터 슬로베니아 베델에서 봉사해 오고 있습니다.

[244, 245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구유고슬라비아의 나라들

1920년대 슬로베니아의 마리보르에서 한 작은 집단이 모여 성서를 토의하다.

1930년대 독일어를 말하는 파이오니아들이 유고슬라비아로 오다.

1935년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1940

1941년 독일군의 침공, 극심한 박해가 뒤따르다.

1950

1953년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다. 하지만 호별 방문 활동이 제한을 받다.

1960

1969년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이 경기장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다.

1970

1990

1991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최초의 국제 대회가 열리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최초의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오스트리아 지부의 감독 아래 슬로베니아에 사무실이 개설되다. 내전이 발발하다.

1993년 마케도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등록되다.

1994년 슬로베니아에 병원 교섭 위원회가 설립되다.

2000

2003년 크로아티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다. 마케도니아에서 새로운 베델이 봉헌되다.

2004년 슬로베니아어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발표되다.

2006년 슬로베니아에 새로운 지부가 봉헌되다.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로 「신세계역 성경」 완역이 발표되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중국어 집단이 형성되다.

2007년 마케도니아에서 최초로 로마니어 특별 강연을 하다. 로마니어 최초의 출판물이 발표되다.

2010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14,000

10,500

7,000

3,500

1940 1950 1960 1970 1990 2000 2010

[14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체코

오스트리아

빈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헝가리

부다페스트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

티라나

이오니아 해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

구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마리보르

캄니크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슬라보니아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

프리블라카

야세노바츠

시베니크

스플리트

달마티아 해안

골리오토크 섬

파그 섬

코르나트 섬

즐라린 섬

크라판 섬

흐바르 섬

코르출라 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비하치

바냐루카

투즐라

트라브니크

제니차

바레시

모스타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보이보디나

보르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닉시치

헤르체그노비

타라

스쿠타리 호

코소보

페치

프리슈티나

마케도니아

스코페

테토보

코차니

슈티프

키체보

스트루미차

레센

참고: 국제 연합은 “코소보는 [2008년] 2월에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코소보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엔 총회는 “국제 사법 재판소의 자문”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142면 전면 삽화]

[145면 삽화]

프란츠 브란트

[146면 삽화]

루돌프 칼레와 그의 타자기 중 하나

[149면 삽화]

슬로베니아에서 트럭을 빌려 전파하는 모습

[154면 삽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 초창기 파이오니아들

[157면 삽화]

알프레드 투체크와 프리다 투체크 그리고 그들이 타고 다닌 자전거

[158면 삽화]

루돌프 칼레,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베델 앞에서

[168면 삽화]

프란츠 드로즈그와 그가 쓴 편지의 복사본

[180면 삽화]

오른쪽: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마구간을 개조하여 만든 왕국회관

[180면 삽화]

아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최초의 왕국회관 중 하나

[182면 삽화]

스토얀 보가티노브

[184, 185면 삽화]

배경: 1969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 왼쪽: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대회 열차; 오른쪽: 네이선 노어

[188면 삽화]

주로 란디치

[192면 삽화]

1991년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경건한 자유 애호자” 국제 대회에서 밀턴 헨첼이 연설하는 모습과 침례 광경

[197면 삽화]

딸들과 함께한 릴랴나

[199면 삽화]

오스트리아에서 트럭 편으로 보낸 인도주의적 구호물자

[200면 삽화]

조렘 가족, 1991년

[204면 삽화]

물고기 통에서 침례를 받는 모습, 제니차, 1994년

[209면 삽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 비축되어 있던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들

[215면 삽화]

엘케 폴라크와 하인츠 폴라크

[216면 삽화]

크로아티아 지부 위원회와 지부 사무실

[228면 삽화]

보스니아에서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배달하는 모습

[233면 삽화]

세르비아 전국 위원회와 베오그라드에 있는 베델 시설

[235면 삽화]

살리우 아바지

[243면 삽화]

포드고리차에서 전파하는 모습; 포드고리차에 있는 왕국회관

[247면 삽화]

슬로베니아의 오래된 도시인 피란

[251면 삽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이전 지부 사무실, 2002년

[253면 삽화]

슬로베니아 캄니크에 있는 지부 사무실, 2006년

[254면 삽화]

슬로베니아 지부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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