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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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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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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8
파88 5/1 21-25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이시이 마쓰에의 체험담

근 1년 동안, 나는 좁고, 불결하고, 이가 들끓는, 일본 센다이에 있는 형무소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 기간을 통틀어 목욕은 물론 샤워 한번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 몸은 빈대에 물려 궤양이 생겼다. 신경통 때문에 몸이 쑤셔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었다.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을 정도로 마르고, 체중이 30킬로그램도 되지 않은 채, 거의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다.

그러면 왜 그곳에 가게 되었는가? 왜 당국자들이 1939년 6월 21일 아침 5시에 내 집에 들이닥쳐, 나를 체포하였는가? 무슨 죄목으로 말인가?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 일본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상황 그리고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

나는 히로시마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구레 시에서 1909년에 태어났다. 부모는 쌀가게와 옷가게를 경영하였다. 내가 아홉살 되던 해에, 스페인 독감이 우리 마을을 강타했다. 곧 이어 시체를 넣은 관이 화장터에 수북이 쌓였다. 언니와 나도 그 병에 걸렸는데, 1주일이 지나자 언니가 죽었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러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일까?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가 열렬한 불교 신자였기에, 나는 그 대답을 알아내기 위하여, 여러 불교 사원을 찾아다녔다. 거기서 승려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사람은 왜 죽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부처에게 계속 의지하고, 주문만 외면, 틀림없이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극락에 들어갈 수 있어요.”

17세가 되었을 때, 성서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성서 한권을 구하기는 하였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구레 시에 있는 “그리스도교”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죽는 이유가 아담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열렬한 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이러한 여론이 촌락가에서 종종 표명되었다. “야소[그리스도인]교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내가 최초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수치를 끼친다고 나를 비난하면서 마을에서 거의 쫓아낼 듯한 기세였다. 부모도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성서 진리를 배움

내가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전혀 알지 못하던 열렬한 불교 신자인 이시이 지조라는 사람과 나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의 형은 어떤 불교 사원의 주지승이었다. 지조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이해해 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오사카로 이사하여, 19세에 당시 양복점 경영자이던 지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지조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사카, 도조초에 있던 우리집 뒤에, “만국 성경 연구회 오사카 지부”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집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그룹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 집을 방문했다.

문에 나온 젊은이에게 “주의 재림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1914년에 이미 이루어졌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깜짝 놀라, 그럴 수가 없다고 말을 하자, 그는 “이 책을 읽어 보셔요”라며,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을 건네 주었다.

그 책이 남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려고, 목탄이 들어 있는 가마니 속에 책을 숨겨 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것을 읽었다. 144,000명만이 하늘에 가며,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위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독생자며,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고, 언니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도 성서 예언의 성취 중 일부라는 등, 알게 되는 사실 하나하나가 섬광처럼 나에게 와닿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침내 남편은 내가 그리스도교 서적을 읽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믿음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자, 남편은 어떤 중요한 것이 관련되어 있지는 않나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직접 「하나님의 거문고」를 읽어 보았다. 나는 이듬해인 1929년 3월 23일에 침례를 받았고, 곧 이어 남편도 침례를 받았다.

콜포처로서 봉사함

우리는 양복점 문을 닫고, 고용인들을 내보냈다.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오사카에서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 착수했다. 1929년 9월에, 나는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당시 전 시간 봉사자들을 일컫는 콜포처가 되었고, 남편은 좀더 뒤에 콜포처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오사카, 교토, 나고야, 도쿄, 센다이, 삿포로, 오카야마 그리고 시코쿠 섬 등지를 포함하여 일본 영토의 사분의 삼 정도를 여행하였다. 각 지역에서 약 6개월씩 셋방을 얻어 머물면서 출판물 배부에 전력하였다.

우리는 「황금 시대」(현재의 「깰 때이다」)와 「파수대」는 물론 「하나님의 거문고」, 「구출」, 「창조」, 「화목」, 「정부」 등 일어로 번역된 출판물을 사용하였다. 콜포처로서, 우리는 호별 방문을 하는 데 달마다 180시간을 바쳤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했지만, 봉사의 즐거움은 컸다.

당시의 일본 콜포처들은 경비를 따로 지급받지 않고, 출판물을 배부한 후 생긴 돈의 절반을 생활비로 받았다. 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동료 콜포처가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나 역시 그 환자를 간호하다가, 이질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었다. 나고야에서 봉사할 때는 우리가 살던 집의 옆집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고 있던 옷차림만으로 이층에서 달려 내려와,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던 소지품과 배부용 출판물 모두가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무일푼이 되었다.

오카야마에서 봉사하던 때에는, 남편이 며칠 동안 고열이 나더니,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 당시에 결핵은 보통 치명적인 병이었다. 만일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전파 활동이 전혀 수행되지 않은 곳에 증거하기 위하여, 최북단 섬, 홋카이도에 있는 삿포로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30년 9월에, 홋카이도로 이사했는데, 거기가 남편의 임종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곳은 공기가 신선하고, 우유와 감자의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남편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어 갔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가 봉사의 직무에서 풍성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다.

우리가 센다이에서 처음으로 봉사할 때, 도호쿠 제국 대학교 총장인 이노우에 씨는 나의 개인 면담 신청을 수락하였다. 그는 내가 가지고 갔던 서적들을 받고는, 나를 문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호별 방문 증거를 하는 동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유명한 문학가인 도이 반수이를 만났다. 그는 「창조」 책을 받았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감사하게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시노모리 출신의 미우라 가족이 있었다. 아내인 하기노가 센다이에 있는 우리집을 방문한 것은 그가 17세였을 때다. 밤을 새워 성서를 토론한 후에, 하기노는 우리가 전하는 소식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곧 온 가족이 도쿄로 이사를 와서, 하기노와 그의 남편 가쓰오는 콜포처로 봉사하였다. 가쓰오는 사망할 때까지 충실한 증인이었고, 하기노는 아직도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아들인 쓰토무는 워치 타워 협회의 일본 지부에서 번역자로서 수년 동안 일해 오고 있다.

임시 벧엘 봉사

1930년대에 우리 부부는 도쿄, 오기쿠보에 있는 벧엘에서 매년 몇달씩을 봉사하곤 했다. 당시 벧엘 봉사를 하던 사람은 약 20명이었다. 두대의 요란한 인쇄기로 「황금 시대」를 인쇄했다. 남편과 나는 의류부에서 일을 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콜포처들은 해진 옷가지들을 벧엘에 보냈다. 우리는 그것을 빨고, 수선하고, 다림질하여 그들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심지어는 콜포처들을 위해 새 옷을 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끝나게 되면, 우리는 본연의 임무인 콜포처 일로 돌아갔다.

벧엘에서의 소중했던 기억 중의 하나는 1931년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역사적인 대회와 관련된 것이다. 한 형제가 해외 방송을 청취하기 위하여 단파 라디오를 조립했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다이얼을 돌리면서, 대회 프로그램을 청취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워치 타워 협회장, J. F. 러더퍼드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 왔다. 한 형제가 즉석에서 통역을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채택한다는 결의 사항을 듣게 되었고, 찬성을 표시하는 우뢰같은 박수 소리도 들었다. 머나먼 이곳 일본 벧엘에서도, 미국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과 일치 연합하여 환호의 함성을 지르게 된 것이다. 그후 몇분이 지나자, 라디오의 수신 상태가 엉망이 되어 버려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우리도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셨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거함

제 1차 세계 대전 후 세계 대공황중,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소용돌이가 일본을 휩쓸었다. 천황은 전 국민이 충절을 바쳐야 할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입니다.”

사람들은 반문했다. “그러면, 천황이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오?”

우리는 이렇게 설명했다.“하나님의 왕국이 가져다 줄 웅대한 미래가 있읍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천황의 통치 말고 다른 통치를 원한다는 말이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건, 우리 말은 곡해되고, 우리는 반역자로 불렸다. 당국자들은 우리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강화시켰고, 사복 형사들이 우리를 뒤쫓는 일이 빈번해졌다.

보통 1년에 한번, 공개 강연이 열렸다. 도쿄에 증인이 약 20명밖에 없었는데도, 도쿄의 요도바시 공개 홀에서 있은 “그리스도교 문명의 몰락”이라는 강연에 500명이 참석했다. 경찰관들이 연단 위의 연사를 포위하고는, 만일 연사가 그들이 생각하기에 못마땅한 말이라도 한다면, 가차없이 “연사, 중단!”이라는 말을 내쏘았다. 그럴 때면 연사는 재치있게 성구를 언급하고는 그것을 낭독했다. 성서는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연사는 연설을 계속할 수 있었다.

체포 그리고 구금

콜포처 봉사를 시작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대거 체포하는 일이 일어났다. 1939년 6월 21일, 바로 그 결정적인 날 아침, 나는 이시노마키에 있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천장에 검댕이 너덜너덜 달려 있는 캄캄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곧 이어 센다이로 이송되어, 독방에 감금되었다. 남편도 역시 체포되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 행방을 몰랐다.

불결한 독방에 수감되어 1년쯤 보내자, 거의 죽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기간 중에 당국자들은 일본 지부의 감독자였던 아카시 준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에게 심문이 시작되었다. 욕설을 퍼붓는 심문관은 “성서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그것을 밟으라”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에 그는 나에게 아카시의 조사 기록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책략으로 생각되었다.

“아카시를 믿는가?”라고 심문관이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카시는 단지 불완전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카시가 성서의 원칙을 계속 따랐다면, 아카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성서에서 벗어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나의 형제가 아닙니다.” 슬프게도, 실제로 아카시는 진리를 버렸던 것이다!

마침내, 형을 선고받고, 센다이 여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독방에 감금당했다. 보잘 것 없긴 하였지만 식사 마련이 있었다. 여간수의 감시하에, 아침마다 30분 동안 걷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번은, 여간수가 이렇게 말했다. “시기가 좀더 좋다면, 당신이 우리를 가르쳐 줄 수 있을텐데. 시기가 나쁘니, 기다려야 되겠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격려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했고, 이 일이 세계 무대를 장식했다. 체포된 지 5년 반 만인, 1944년 말경, 나는 석방되었다. 1945년 8월에는 원자 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일본이 패전하였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남편과 나는 구레 시로 돌아가 전후(戰後)의 무질서 속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였다. 옛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거의 아무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4년쯤 되었을 때, 미국으로부터 선교인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일본에서 왕국 사업이 재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 후에 입양한 여섯살 된 아들을 데리고, 남편은 고베의 다루미에서 열린 전후 첫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대회는 1949년 12월 말에 시작되어 해를 넘겨 1950년까지 열렸다. 1939년 이래로 일본에서의 왕국 사업이 ‘암흑기’에 처해 있었지만, 마침내 빛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1951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이던 네이선 H. 노어가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긴 하였지만, 그 날짜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1951년 4월 27일, 한밤중까지 옷을 지으면서 그날의 라디오 마감 뉴스를 듣고 있는데, “워치 타워의 협회장인 N. H. 노어 씨가 일본을 방문하여 교리쓰 강당에서 강연을 할 것입니다”라고 아나운서가 말했다. 그 다음날 나는 기차를 타고 90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무질서한 전후의 빈곤 속에 처해 있는 도쿄로 갔다. 4월 29일에, 나는 노어 형제의 연설을 경청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후 처음으로 일어 「파수대」를 출판한다는 발표를 듣고 가슴이 설레었다. 새로 출판된 1951년 5월 1일호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을 회고해 볼 때, 그때보다 더 행복했던 때는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제 일본에서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재개되었으니, 예언된 바대로, 여호와의 사업이 증가하여, 하나가 천을 이룰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여호와의 조직과 온전히 연합하는 즐거움을 누려 왔다. 1951년 8월에 처음으로 에이드리언 톰슨 형제가 순회 감독자로서 우리를 방문하였다. 집회가 시작되었고, 일본 최초로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가 구레 시에 임명되었다. 회중은 점차 성장하였고, 남편은 회중의 종으로 봉사하였다.

전쟁 전에 일본에 있던 약 130명의 증인은 어떻게 되었나? 지부 감독자였던, 아카시 준조의 나쁜 본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다. 소수는 그를 따랐고, 어떤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또 다른 일부는 박해하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 열명 남짓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봉사에서 활동적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의 건강을 축복으로 받아, 아직도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수년 동안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일해 왔다. 남편은 71세가 되었을 때, 심한 각혈을 하여 병원에 급히 입원했다. 감사하게도, 의사들은 남편의 수혈 거부를 존중해 주었다. 남편은 상당히 회복된 듯하였지만, 6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양아들 고조는 수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를 해왔으며 지금은 그리스도인 장로다.

회고해 보건대, 전쟁 전부터 능력과 지력을 자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다란 압력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조직을 떠난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의존했을 것이다. 충실하게 남았던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않았고 남의 이목을 끌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확연코 우리 모두는 항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한다.—잠언 3:5.

마침내 “큰 환난”이 다가올 것이 확실하다. (마태 24:21) 그때 우리는 과거의 시련은 상대가 안 될 훨씬 더 큰 시련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시련을 견딘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며, 마음을 다해 그분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분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그분을 충실하게 섬기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종들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다.—시 37:25.

[23면 삽화]

나는 전혀 알지 못하던 이시이 지조와 결혼했다

[25면 삽화]

1951년에 노어 형제는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 나고야 및 고베(위)에 있는 선교인들과 그곳 대회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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