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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받는 조직에서의 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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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8
파88 3/1 10-17면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받는 조직에서의 나의 생애

앨버트 D. 슈로더의 체험담

1934년 6월의 첫 일요일에 알렉스 존스와 나는 뉴저지 주, 저지시티에서 호별 방문 전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관들이 우리가 있는 아파트로 몰려와 우리를 체포하고 차에 난폭하게 밀어 넣은 다음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3일 후에, 한 판사가 우리에게 무면허 행상이라는 유죄 판결을 내리고 10일간의 구류를 언도했다. 우리는 허드슨 군(郡) 교도소로 이송되어, 옷을 벗고 방역을 위해 목욕을 한 후 죄수복을 입도록 요구받았다. 그런 다음 독방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단지 23세였으며 브루클린 벧엘에서 전 시간 봉사자로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행복해 했다. 그곳에서 돌이켜 본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할머니에게 감사함

특히 내게 정겨웠던 추억은 외할머니, 엘리자베스 다거에 관한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부모는 1870년 이전 어느 때인가 독일에서 가족을 이끌고 미시간 주로 이주했다. 외할머니는 공립 학교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내가 태어난 미시간 주, 새기노 시에 있는, 루터교인이었던 내 부모 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외할머니와, 교편 생활을 하던 외할머니의 자매들은, 현재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만국 성경 연구생과 연합하게 되었다.

부모는 내가 루터교 주일 학교에 나가도록 요구했지만, 할머니가 자신이 믿고 있던 감동을 주는 성서 교리에 관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성서를 라틴어와 희랍어로 읽을 수 있었고 나에게 원어로 성서를 연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 주었다. 다니엘 2:44의 말씀과 같이 조만간 땅을 떠맡게 될 하나님의 왕국 정부를 중심 화제로 하여 외조모 및 그 자매들과 나누었던 고무적인 성서 토론이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랐다.

1923년에 할머니는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워치 타워 협회 서적을 사용하여 나와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새기노 회중의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나는 그러한 집회와, 멀리 뉴욕, 브루클린으로부터 WBBR을 통해 방송된 워치 타워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하던 일, 그리고 내 인생을 틀잡아 준 기타 경험들을 되돌아보았다.

예를 들어, 워치 타워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 판사가 1927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성경 연구생의 대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라디오를 통해 듣던 일이 생각났다. 1928년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나는 처음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러더퍼드 형제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 대회에서, 나는 “사단을 반대하고 여호와를 지지하는 선언”이라는 결의문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예”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왕국은 민주 정부가 아니라 신권 정부임을 보여준 「정부」라는 새로운 책이 발표되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봄

학창 시절에 관해서도 돌이켜 보았다. 내가 전 시간 봉사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부모의 강권에 못이겨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9월에 앤아버에 소재한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하여 언어학, 경제학 및 공학을 공부했다.

내가 하숙한 집의 여주인이었던 저드슨 부인은 성경 연구생의 앤아버 회중과 연합하고 있었다. 1930년 가을에 학업을 위해 돌아오자, 그 부인은, 앨러배머 주에서 훌륭한 청년이 내 방의 건너편 방으로 막 이사왔는데 그가 “우리의 성서 소식”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러하였다! 윌리엄 애디슨 엘로드가 성서 진리를 받아들였으므로 그와 나는 이내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친구이다.

엘로드와 나는 1931년 하계 개설 강의를 수강하느라고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1931년 대회에 직접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7월 26일, 일요일에 우리는 라디오로 공개 강연을 들으면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아름다운 새 명칭을 받아들인, 눈에 보이지 않는 열렬한 청중 가운데 끼어 있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사회주의, 파시스트 및 공산주의의 정부 형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1931년 10월에 윈스턴 처칠은 3,000명의 우리 학생들에게 연설하면서, 민주주의가 여전히 최상의 정부 형태라고 옹호하였다. 그후 1931년 12월에,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 경은 평화주의에 관해서 연설했다. 하지만 그후 독일, 베를린의 제국 은행장, 얄마르 샤흐트 박사는 국가주의적 경제 관리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국가 사회주의, 곧 나치주의를 옹호한 것이다. 2년 후에 그는 히틀러 정부의 재무상이 되었다.

그러한 세계 정치가들의 주장을 듣고서, 나는 메시야 왕국만이 만족스러운 세계 정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엘로드와 나는 1932년 6월 15일에 학업을 중단하고 현재 파이오니아 봉사로 알려진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함께 짝이 되어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그 당시에는 땅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침례받을 필요가 있는지의 여부가 분명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침례도 받기 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932년 7월 24일에 미시간 주, 밴더쿡 호(湖)에서 침례받은 이후, 나의 희망이 기름부음받은 자가 가진 희망으로 바뀌었음이 분명한데, 그 점은 ‘영의 증거’로 확증되었다.—로마 8:16.

브루클린 벧엘 봉사

9월 9일에, 우리가 미시간 주, 호웰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중, 엘로드는 황색 전보 쪽지를 흔들면서 우체국에서 뛰어나왔다. 그 쪽지를 펴들고, 우리는 편리한 대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벧엘 봉사에 임하라는 러더퍼드 형제의 초대문을 읽었다. 우리는 단 72시간 만에 파이오니아의 일을 정리한 후, T형 포드 자동차를 타고 브루클린까지 1,100킬로미터를 달렸다. 1932년 9월 13일에 마침내 브루클린 교를 건너서 벧엘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200명 가량의 벧엘 가족 성원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왕의 기름부음받은 형제들이었다.

공장에 임명되어 몇주 동안 봉사한 후, 나는 봉사부로 부서 변경 임명을 받았다. 상냥한 아일랜드 형제인 토머스 J. 설리반이 감독자였다. 그는 늘 우리 청년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반드시 모든 사실을 수집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잠언 18:13) 눈을 깜박이면서, 그는 이렇게 부언하곤 했다. “서두를 이유가 있는가? 여호와께 기회를 드리도록 하라. 그분의 영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라.”

옥중에서 그러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그러하였듯이 의를 위하여 고통당하는 특권에 대해 기뻐했다. (요한 15:20; 베드로 전 4:16) 되돌아보면, 그러한 경험들이 나를 미래의 특권에 대비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가슴 설레게 하는 새로운 빛

감옥에서 풀려나 벧엘로 돌아온 지 6개월 정도 지난 1935년 초에, 벧엘 식탁에서 있었던 “큰 무리”의 신분에 관한 수많은 토론들이 기억난다. (계시 7:9, 13) 어떤 사람들은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인 러셀 형제가 가르쳤던 대로, 그 무리가 이차적인 하늘 반열이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큰 무리”가 땅의 희망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토론중에, 러더퍼드 형제 자신은 자기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벧엘에 있는 우리 모두는 1935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까지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워싱턴 D.C.행 특급 열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흥겨워했다. 그 대회의 둘째날에 러더퍼드 형제는 “큰 무리”가 사실상 땅의 반열이라는 가슴 설레게 하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절정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고 있는 모든 분은 일어나 보시겠읍니까?” 참석한 20,000명 중 절반 가량이 일어섰다. 그때 러더퍼드 형제가 이렇게 외쳤다. “보십시오! 큰 무리를!” 일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 다음에 우리 모두는 환호성을 질렀으며, 즐거움에 찬 소리는 크고도 길었다. 그 다음날 840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땅의 소망을 가진 반열이었다.

1935년에 “큰 무리”에 관한 이 새로운 빛으로 말미암아 1936년에는 그 반열에 속한 성원들의 예상되는 쇄도에 대비하여 조직을 정비하는 조치들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는 뉴욕 시 전역에 단 하나의 큰 영어 회중밖에 없었지만, 곧 새로운 회중들이 형성되어 기름부음받은 젊은 우리들이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현재는 뉴욕 시에 336개의 회중이있다!

새로운 임명

1937년 11월 11일, 목요일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남긴 날이었다. 그날 오후 3시에 러더퍼드 형제의 사무실로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정시에 도착하면서, 나는 혹시 꾸지람이라도 듣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다정하게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후, 러더퍼드 형제는 내가 다른 임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지를 물었다.

“필요한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기꺼이 봉사하겠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러더퍼드 형제는 “런던 벧엘에서 지부의 종으로 봉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아니, 그야말로 막중한 임무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더군다나 그것은 아마겟돈 후까지 붙박이로 거기에 머물기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정할 여유를 갖도록 3일간의 말미를 주겠오”라고 그는 받아 말했다.

“그렇다면, 러더퍼드 형님, 3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읍니다. 제가 가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면, 서슴없이 수락하겠읍니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오”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주 수요일에 영국으로 출항할 퀸 메어리 호의 승선권이 이미 노어 형제에게 있오.”

어안이 벙벙해졌다. 러더퍼드 형제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며칠간 훈련을 받게 될 것이오.”

공장에 위치한 봉사부로 돌아오자, 노어 형제가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이선 노어는 공장 감독자였으며 일찌기 러더퍼드 형제와 함께 영국으로 여행한 일이 있었다. 곧 그는 지부 운영을 감독하는 방법에 관해 나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나는 가외의 준비를 위해 러더퍼드 형제에게 갔다.

미가 6:8에 근거한 러더퍼드 형제의 충고는, ‘공정하게 행하고, 조직의 방침을 견지하고, 성서의 표준을 지지하고,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며,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 형제들을 친절히 대해 주고, 야외 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이었다. 전임 영국 지부 감독자들이 야외 봉사를 온전히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밭이 정체 상태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상황이 그러했기에 그는 끝으로 이렇게 역설했다. “야외 봉사를 증가시키도록 격려해야 하오. 지금은 영국에 파이오니아가 고작 200명밖에 안 되지만, 당장 1,000명의 파이오니아가 필요해요.”

영국에서의 환대

퀸 메어리 호를 타고 사우샘프턴에 당도한 후 열차를 타고 런던으로 간 다음 택시로 협회 지부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그 사무실은 26년간 랭커스터 게이트, 크레이번 테러스 34번지에 소재해 왔다. 만국 성경 연구회의 부회장이 나를 성심껏 맞이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지부의 종을 해임시키고 벧엘 가족에게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임을 알릴 권한을 부여하는 러더퍼드 형제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점심 식사 시간에 그러한 발표가 있자, 30명의 벧엘 성원들은 나를 따뜻이 환영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에 있는 많은 지부의 종 및 대표들과 친숙해졌다. 이들은 히틀러 시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전파 활동을 인도한 기름부음받은 자들로서, 그 가운데는 스위스의 마틴 하벡, 프랑스의 샤를 네흐트, 네덜란드의 프리츠 하르트슈탕, 스웨덴의 요한 에네로스, 덴마크의 윌리엄 데이, 그리고 협회의 독일 지하 조직에서 용감하게 일한 로베르트 빈클러 형제 등이 있다. 성경적인 도구를 총동원하여, 믿음을 가진 이 두려움 없는 형제들은 나치의 혹독한 박해를 견뎌 냈다.

러더퍼드 형제의 방문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인 1938년에, 영국은 대양 횡단 무선 전화 송신술을 개발했다. 그 송신 기사들은 9월 9일부터 11일까지 런던을 중심으로 한 특별 대회를 위해 4개 대륙을 연결해 주기로 동의했다. 런던에서 가장 크고 적합한 장소인 로이얼 앨버트 홀이 그 대회 장소로 계약되었다. 네이선 노어를 포함한 러더퍼드 형제 일행이 사전 준비를 돕기 위해 3주 전에 도착했다.

공개 강연을 광고하기 위해서 샌드위치 간판 행렬대가 조직되었다. 첫 광고 행진을 시작하기에 앞서, 러더퍼드 형제는 나를 보자고 했다. 우리가 대회 일을 논의하고 있을 때, 그는 펜으로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면 때때로 하는 일이었다. 그는 필기첩에서 자기가 쓴 것을 떼어 내게 건네 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종교는 올무며 속임수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격렬한 불 같군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강한 것이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적은 플래카드를 수요일 저녁에 있을 우리의 첫 대회 광고 행진을 위해 늦지 않게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 다음날 밤에 네이선 노어와 나는 천명 가량의 형제들을 이끌고 런던의 중심가를 10킬로미터 행진했다.

러더퍼드 형제는 그 다음날 아침에 그의 사무실로 나를 불러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공산주의자니 무신론자니 하면서 적의에 찬 말들을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하나님과 왕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구호를 적은 종이를 떼어 주었다. 그는 광고판들에 그러한 말을 군데군데 끼워 두면 야유적인 반응이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1938년의 이 대회는 훌륭히 진행되었다. 토요일에 있은 주요 연설 및 일요일에 행해진, 사실을 보라는 그 대회의 주요 강연이 영어를 말하는 세계 도처에서 동시 개최된 49개의 대회에 성공적으로 송신되었다.

대회가 끝난 후, 유럽 국가의 지부의 종들이 참여한 훈련 모임이 열렸다. 그 모임중에, 러더퍼드 형제는 대회 안내원들의 훈련 부족에 대해 나를 엄히 꾸짖었다. 그 징계는 눈물이 날 정도로 엄하였다. 나중에 덴마크의 윌리엄 데이는 개인적으로 나를 위로하면서, 러더퍼드 형제가 나를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그들 모두를 훈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러했다! 그 다음날,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러더퍼드 형제는 그가 준비한 특별 식사에 우리 모두를 초대했다. 모두가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기간

1939년 9월 1일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3일, 일요일에 영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영국에 있는 우리 수천명은 그날 아침에 야외에 나가 봉사하면서 적절하게도 「구원」이라는 새로운 서적을 전했다. 집집마다 사람들은 떨고 있었고 어떤 아낙네들은 울고 있었다. 사람들을 성경으로 위로하면서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는 성서 출판물을 다 전했다.

그 다음 달에 우리는 “중립”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1939년 11월 1일호 「파수대」의 신간 견본을 받아 보았다. 시기 적절하게도 그 기사는 세상의 분쟁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성경적 입장을 약술했다. (요한 17:16) 곧 영국의 우리 형제 자매들 중 수백명이 체포되고 투옥되기 시작했다.

영국 영공에서의 공중전, 이른바 영국전이 1940년 말에 치열해졌으며 1941년에도 계속되었다. 런던에 있던 우리는 매일 밤 14시간씩 폭격이 있던 57일간을 견뎌 냈다. 공중에는 요란한 소음이 그칠 줄 몰랐다. 곳곳에서 격렬한 화재가 일어났다. 벧엘로부터 반경 460미터의 범위 내에 29개의 폭탄이 떨어졌다. 벧엘에 인접한 우리의 큰 왕국회관에 소이탄이 떨어져 불이 붙었지만 훈련받은 벧엘 형제들이 재빠르게 진화했다.

식량 배급 및 여행 제한을 포함하여 각가지 전시 제한 규정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활동했으며 우리의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증가시키기까지 했다. 1937년에는 영국에 4,375명의 전도인이 있었지만 1942년 무렵에는 12,436명으로 증가하였다. 파이오니아 수는 내가 영국에 도착했던 1937년에는 201명이었지만 1942년에는 1,488명으로 증가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초기 야외 전파자들의 씨 뿌리는 일을 풍부히 축복해 오셨음이 분명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영국에는 6,000명 이상의 정규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109,000명 이상의 왕국 전도인이 있다.

1941년 9월 3-7일에 우리는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정부 관리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부른 일을 성취했다. 우리는 당시까지 영국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로서는 최대 규모로 대회를 열었다. 전시의 와중에 휩싸여 있는 지역인 레스터의 드몽포르 홀과 그 주변 부지에 12,000명 이상의 사람이 모였다. 이 홀은 레스터에서 협회의 1983년 연례 법인 총회가 열렸을 때 사용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때 우리 중 3,000명 이상이 1941년 전시 대회의 경험들을 회고하면서 이야기했다.

런던 사무실은 전시에 난민 구호소가 되었다. 전화 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련된 구호 기금을 융통하여 폭격의 피해를 입은 형제들이 즉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한 폴란드, 독일,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및 여타 지역의 형제들이 런던으로 피신해 왔는데, 그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미쳤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기피 인물

미국이 1941년 12월 8일에 전쟁에 개입하자마자, 나는 미국 시민으로서의 영국 군복무 면제권을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으로 인해 영국 정부가 내린 여러 가지 군복무 명령에 응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42년 5월 6일에 영국 정부는, 내가 기피 인물이므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고 통지하였다. 8월 1일에 런던의 「데일리 헤럴드」지는 1면에 “‘강제 귀국’ 처분을 받다”라는 기사와 함께 나의 사진을 실었다.

1942년 8월 24일, 월요일 아침에 런던 경시청의 두 형사가 나를 추방하기 위해 체포했다. 나는 열차에 실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가서 그곳에 있는 중세의 바를리니 교도소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영국 순양함인 S. S. 힐러리 호로 호송되었는데, 거기서도 계속 감호를 받았다. 52척의 배로 구성된 우리의 호송선단이 독일 잠수함을 피하기 위해 지그자그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13일이 걸렸다. 독일군의 수뢰를 피해 가면서 우리는 캐나다 핼리팩스에 무사히 기항했다! 마침내 자유롭게 되어 이튿날 나는 열차를 타고 9월 10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평화의 시기가 놀랍게 예고됨

나는 브루클린 벧엘에 있는 많은 형제들의 따뜻한 품에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1942년 9월 18-20일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역사적인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때맞추어 온 것이다. 그 대회에서 새로운 협회장, N.H. 노어 형제는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 연설은 계시록 17:8을 새로이 조명해 주었다. 연합국이 우세할 것이며 국제적인 새로운 “평화의 짐승”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 점은 1945년의 종전 이후 국제 연합이 조직되었을 때 그대로 이루어 졌다!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1942년 10월 1일에 있었던 워치 타워 협회 연례 법인 총회 후에 협회장 노어 형제는 맥스웰 G. 프랜드, 에두아도 F. 켈러 그리고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뉴욕 주, 사우스랜싱에 있는 왕국 농장에 선교인 성서 학교를 설립하기로 그날 오전에 결정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가 교무 주임이 될 것이며 그 학교를 조직하는 위원회의 사회자로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F. W. 프랜즈 형제와 함께 그 훌륭한 성서 교육 과정을 구상하였다. 이 때부터 그와 협력하여 성서 교육을 진척시키는 일에 종사하는 행복한 긴 나날이 시작되었다.

1943년 2월 1일, 월요일 아침에 노어 형제는 뉴욕 주 사우스랜싱 근처의 왕국 농장에 소재한, 현재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로 알려져 있는 그 학교를 정식으로 봉헌하였다. 봉헌식 프로그램이 끝난 후, 각각 25명의 학생으로 이루어진 4개의 학급에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진보된 그리스도인 교육은 20주 과정이었는데, 성서가 주된 교재였다.

결국 성서를 더 깊이 연구한 그 행복한 세월은 나에게 축복이 된 기간이었다. 다른 헌신적인 강사들과 더불어 나는 여호와와 그분의 일을 사랑하는 그 헌신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 특권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1960년에 이르기까지, 70개국으로부터 온 3,700명의 학생들이 우리의 학급을 빛내 주었다.

결혼 생활을 하게 됨

1955년의 “승리의 왕국” 유럽 대회에 참석하던 중, 1943년에 내가 담당했던 길르앗 제 1기생이었던 샬럿 보윈과의 안면이 새로와졌다. 그 자매는 멕시코, 엘살바도르 등의 스페인어 구역에서 12년 동안 충실한 선교인으로 봉사했다. 그런데 이제 짝 자매인 줄리아 클록스톤과 함께 그 유럽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부언하자면, 샬럿의 부모는 과거 러셀 형제 시대에 양쪽 다 독신으로 있을 때 브루클린 벧엘 성원이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한 후, 마틴 보윈은 1920년에 샬럿이 출생할 때까지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했다.

1956년 1월에 샬럿은 벧엘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왕국 농장으로 옮겨졌다. 1956년 8월에 우리는 결혼했다. 샬럿이 임신했을 때 우리는 이제 전 시간 봉사를 더 이상 못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서운해 했다. 그러나 프랜즈 형제는 이러한 말로 우리를 격려했다. “태의 열매를 갖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용기를 내세요! 형제가 어떻게든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도록 여호와께서 마련하실지도 모르지요.”

그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나는 길르앗 학교 강사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살다가 1962년에는 학교에서 1.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축 가옥으로 이사했다. 1958년 2월에 태어난 우리 아들, 유다 벤은 뉴욕, 사우스랜싱에 있는 그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유다 벤을 양육하는 일에서 많은 즐거움을 경험했는데, 항상 성서 원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에베소 6:1-4) 내가 생활에서 적용하려고 노력했던 성귀인 미가 6:8을 그 역시 따르도록 격려했다. 그 후, 유다는 3대째로 벧엘 성원이 되어 12년간 벧엘에서 봉사했다. 그는 1986년 6월에 사랑스런 파이오니아 자매인 앰버 베이커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현재 미시간 주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장로들을 위한 학교

1958년도 양키 스타디움 대회에서 노어 형제는 천국 전도 학교로 알려지게 된, 장로들을 위한 새로운 학교의 개설을 발표했다. 1959년 3월 9일에 25명의 학생으로 된 제 1기가 길르앗 학교가 운영되고 있던 왕국 농장에서 4주 과정으로 열렸다. 길르앗 학교가 1960년 9월에 브루클린으로 이전했지만, 천국 전도 학교는 계속 왕국 농장에서 열렸는데, 우리는 거기서 매월 백명의 장로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된 것이 그 새로운 학교에 참석하는 가장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자산임을 깨달았다.

1967년에 이 학교는 브루클린에 있는 벧엘로 이전되었다. 그후 1968년에 그 학교는 피츠버그로 다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1974년까지 수천명의 훌륭한 장로들이 훈련을 받았다. 1974년 이후로는 그 학교가 전국에 있는 여러 왕국회관에서 진행되었다. 그러한 여러 지역으로 여행할 때마다 아내와 아들을 동반했다. 내가 천국 전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들은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했다.

한층 더 고귀한 봉사

1974년 11월에 내 고향인 미시간 주, 새기노에서 천국 전도 학교를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통치체로부터 잊을 수 없는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나를 통치체의 한 성원으로 초대함과 동시에 아내와 아들이 브루클린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74년 12월 18일에 우리는 벧엘로 옮겼고, 나는 새로운 봉사의 특권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통치체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인 활동을 지휘하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계몽시켜 주는 영적 양식을 공급하며, 사법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함께 원활히 일하고 있다. 통치체는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고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구한다. 다루어지는 모든 문제와 행해지는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일치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통치체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지구(地區) 감독자의 자격으로 여러 지부를 방문하도록 파견되곤 했다. 매우 많은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마음 흐뭇한 일이다. 외국 임지에서 한결같이 충실하게 일하는 많은 길르앗 선교인들과 재회를 나누는 것 또한 개인적인 즐거움이다. 참으로 모든 나라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가장 모범적이며 가장 행복하다!

여호와께서는 「파수대」와 그 밖의 성서 출판물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백성을 영적으로 동시에 먹이신다. 이 모든 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1914년 이래 우리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곧 있을 “큰 환난”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끝으로, 연소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현명하게 지금 전 시간 거룩한 봉사의 경력을 구축하도록 권하는 바이다! 여러분 또한 앞에 있는 가슴 설레게 하는 특권들을 갖게 될 것이다. (미가 7:7) 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여호와의 섭리에 따른 보살핌을 즐거워한다. 그분의 축복이 나를 참으로 부요하게 했다. (잠언 10:22)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받는 조직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 여호와께 날마다 감사를 드린다.—계시 7:14.

[12면 삽화]

나의 짝, 엘로드와 함께

[15면 삽화]

바를리니 교도소행 열차를 타면서

[17면 삽화]

아내인 샬럿과 함께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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