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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정확한 성서 본문을 위한 투쟁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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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5
파85 2/1 7-9면

더 정확한 성서 본문을 위한 투쟁

오늘날, 성서를 집어들고서 우리는 읽고 있는 말씀이 거의 2000년 전에 사도 ‘마태’, ‘요한’, ‘바울’ 및 그외의 성서 필자들이 쓴 말 그대로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19세기의 저명한 성서 학자인 ‘F. J. A. 호르트’ 박사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 관해서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어떤 의미로든 본질상의 변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소량에 불과하며 ·⁠·⁠· 전체 본문의 천분의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때 이래, 사본의 추가 발견과 계속적인 연구로 인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확한 성서 본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그러나 독자는 그러한 정확한 본문을 얻기 위해서 기나긴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일에 관여한 한 사람으로 ‘존 제임스 베트스타인’이 있다. (1693-1754). 더 정확한 성서 본문을 얻기 위한 투쟁에 그가 기여한 바를 간단히 고려해 보자. 틀림없이 그것은 성서가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수되었다는 인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베트스타인’은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고 신학을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대학 도서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성서 사본들에 심취했다. 그러나 ‘베트스타인’은 사본들에 서로 다른 이문(異文)들이 들어있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그리하여 교직자로 임명을 받기 위한 논문을, 그러한 제목을 기초로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당시 존재하던 (「전수된 본문」[Received Text]으로 불리었던)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본문에 여하한 변경이라도 가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베트스타인’은 당시 존재하던 상이한 사본들에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지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베트스타인’은 교직자 임명을 받기 전에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성서 사본들을 조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1714년에 출발해서, ‘쮜리히’, ‘제네바’, ‘파리’, ‘런던’, ‘옥스포오드’, ‘케임브리지’, ‘라이든’,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했다. 그는 가장 뛰어난 희랍어와 ‘라틴’어 성서 사본들의 본격적인 대조 조사서들(즉, 상이점들을 기록하는 비평적인 비교)을 만들었는데, 그 중엔 최초로 된 것이 흔했다.

연구가 문제들을 야기하다

‘런던’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사본’(대부분의 성서를 포함하는 기원 5세기경의 희랍어 사본)을 조사하면서 ‘베트스타인’은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그때까지 「제임스 왕역」(1611)에 의하면, 디모데 전서 3:16은 이처럼 번역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그러한 번역은 상용되던 대부분의 다른 성서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트스타인’은 “하나님”으로 번역된 그 희랍어—단축형은 ΘC가 관계 대명사 “who”를 의미하는 희랍어 OC와 원래 비슷하게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피지(皮紙)의 이면에서 희미하게 비취는 한 획의 가로줄과 나중에 상단에 기입해 넣은 횡선으로 인해서 OC(“who”)라는 단어가 단축형인 ΘC(“하나님”)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스어 철자를 보기 원한다면 제본 「파수대」 참조]

‘베트스타인’의 이 문을 확증해 주는 다른 많은 사본들이 있기 때문에, 현대의 정확한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 (He was made manifest in flesh) 또는 “·⁠·⁠· 한 그는” (He who ·⁠·⁠·).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미국 표준역, 모팻역, 웨이마우드역, 스펜서역, 신 영어 성서) 그러나 ‘베트스타인’은 본문을 함부로 변경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말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도 ‘베트스타인’이 이단으로 몰리게 만든 것이 또 있다. 당시의 몇몇 번역판의 요한 1서 5:7, 8은 이러하였다. “하늘에 증언하는 자 셋이 있으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신이라. 이 셋은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 증거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하나로 일치하니라.” (흠정역) 그러나 ‘베트스타인’은 위에 ‘고딕’체로 표시된 삼위일체 사상이 담긴 말은 후기 사본들에 첨가된 것임을 확증했다. 그 말은 그가 조사했던 초기 희랍어 사본들 중 그 어느 것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단으로 모는 일을 선동한 것은 그의 상승하는 명성을 시기한 나머지, 이내 그의 적으로 바뀐 친구들이었다. ‘베트스타인’은 일하는 중에 과오를 범한 자들을 직선적으로 비평하고, 흔히 자기 자신의 연구를 성급하고 열렬하게 변호하였기 때문에 사태는 완화되지 않았다.

새로운 본문의 출간이 방해받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스타인’은 그의 연구에 기초한 여러 가지 이문들이 실린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새로운 판을 건의했다.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상당히 경계하였다. 1729년에 희랍어 본문을 발행하겠다는 그의 건의에 대해 “위험한 혁신”이라고 불평하는 진술이 ‘스위스 개혁 교회 협의회’에 제기되었다.

그 결과 ‘바젤 지방 의회’는 성 ‘레오나르드’ 교구의 부제 직분에서 ‘베트스타인’을 잠시 면직시키고 ‘교회 위원회’가 그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완고하고 편협적인 태도와 교리적인 편견이 지배적이었고, 양측의 슬기와 예의의 부족, 성급함 때문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베트스타인’은 그의 새로운 책이 선보여지기 전에 검열에 걸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증거 서류를 제출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 이유는 공정하게 고려될 것으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트스타인’은 또한 그의 설교와 교리에 관해서도 ‘스위스’ 당국으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그 이유는? 이제, 성서 사본들을 계속 연구함으로써, 그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앙들과는 상당히 다른 결론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후에 영혼은 의식이 없고, 부활 때까지 잠들어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그의 조카가 ‘베트스타인’에게서 “비유”의 형태로 삼위일체론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을 어느 증언자가 당국에 자세히 고발하였다. 그 비유에서 ‘베트스타인’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의 관계를 “집안에서 주인, 아들, 종의 관계”에 비했었다. 몇몇 그의 학생들의 대략적이고 흔히 불명료한 진술서들로 인해서 ‘베트스타인’은 ‘스위스’ 당국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부제 직분을 박탈당했다.

‘베트스타인’은 ‘바젤’을 떠나서 그의 한 친척이 인쇄소를 경영하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다. ‘베트스타인’은 그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새로운 판에 첨가하여 내자고 건의했던 「서문」(Prolegomena)을 1730년에 익명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처럼 진전된 연구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서문」에서 ‘베트스타인’은 다음의 결론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를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전수된 본문」은 결함이 있으니,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새로운 본문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 성서 필자들이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했으니만큼,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그들의 말을 명확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증가된 빛은 참 종교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참 종교의 대의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베트스타인’은 그때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레몬스트란트’ 교회 신학교의 교수직을 지원했다. 그가 수락되려면 이단이라는 죄명에서 깨끗이 벗어나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731년에 ‘바젤’에 돌아가서, 그 결정을 번복시키는 데 18개월이 걸렸다. ‘암스테르담’에 돌아왔을 때, 그가 장차 받을 임명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의 깊고 슬기롭게 이 문제는 지방 의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베트스타인’은 희랍어 성경 본문의 출간을 포기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몇 가지 조건에 합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18년 동안 ‘베트스타인’은 계속해서 그의 인생의 주요 목표—희랍어 성경 본문을 출간하는 일—를 위해서 자료를 모았다. 마침내 그에게 내려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1751/52년에 희랍어 성경 본문과 커다란 두권으로 된 주석을 출간했다. 이년 후에 그는 사망했다.

본문 비평a의 지속적인 발전은 오랜 시간이 지나 ‘베트스타인’의 연구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가 꿈꾸었던 정확한 본문이 이제는 실현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편파적인 개념이나 교리에 의해 틀잡혀진 것이 아니라, 건전한 본문의 원칙들에 근거해서 이룩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희랍어 성경 본문을 사용하는 성서라면 어느 것을 집더라도, 그 성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본문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서를 주의 깊게 연구할 때에만 ‘베트스타인’과 동일한, 성서에 대한 존중심을 갖게 될 것이며,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것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각주]

a 본문 비평가는 원본 해석을 판정하기 위해서 성서의 초기 사본들을 비교하는 사람이다. 그 연구로 인해 더욱 정확한 성서 번역판이 나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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