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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위클리프, 성서의 옹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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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위클리프, 성서의 옹호자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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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80 11월호 8-11면

존 위클리프, 성서의 옹호자

영국 레스터셔어 주의 스위프트 강은 소도시 러터워어드를 지나 들판과 초원을 가로질러 조용히 흐르고 있다. 마침내 이 물줄기는 워리크셔어 주 럭비 부근의 에이번 강과 합류한다. 오늘날 그 평화로운 한 광경을 600년 전의 몇 가지 사건과 연관시키기란 어렵다. 특히 한 가지 사건은 너무나 이상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아연케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나, 존 위클리프 시대에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스위프트 강이 관련된 충격적인 행동으로까지 이끌고 간 몇 가지 사건들을 고려해 봄으로 우리는 성서를 연구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중세기에 영국에서는 봉건 제도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영주(領主)가 백성을 지배하고 있었고 마을과 심지어 도회지 생활까지도 대단히 고립되어 있었다. 영주는 백성들에게 상당한 노동을 강요하였으며 그 대가란 백성들이 자기들의 조그마한 농지를 경영할 수 있는 매우 제한되어 있는 자유였다. 농부들의 보잘것없는 오두막집들은 부유한 지주들의 커다란 석조 저택 및 성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교육이 부족하고, 따라서 극도의 무지에 속박되어 있던 농부들의 생활은 공포와 미신적인 관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러한 것들은 1349년의 흑사병으로 절정에 달했던 자주 유행하던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하여 크게 성행하였다. 교회와 수도원의 영향력 또한 대단히 압제적이었다.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교구 사제들도 종종 농부들만큼이나 무식하였다. 한편 수도승들은 국민들의 영적 생활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가서 ‘일곱 가지 대죄’를 설교하고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수도원을 부유케 하기 위한 연보와 기부금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것은 교황의 재산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면세 혜택을 받았다. 면죄 제도 및 면죄부와 성물의 판매는 범죄와 방종한 생활을 변명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 결과 그러한 일이 늘어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농노 제도에 지쳐 버렸다. 결국, 일부 영주들은 노동 의무 대신에 소작료를 받는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농민 계급에게 보다 큰 자유를 가져다 준 마련이었다. 독립심이 자라감에 따라 농민 계급이 사회 생활의 다른 부면에 대해 생각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감정을 표현해 줄 권위있는 대변자만 있으면 되었다. 바로 그러한 대변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존 위클리프라는 사람이었다.

위클리프가 자기 입장을 취하다

1328-1330년경에 태어난 존 위클리프는 옥스포오드 대학교에 다녔다. 거기서 그는 출세하여 1361년에 베일리얼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신학 박사가 되었다. 그가 영국법과 교회법에 정통한 것은 단순히 그 과목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자유가 수호되고 유지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망의 결과 때문이었다.

존 왕 시대부터 영국은 자기 나라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여 교황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 1365년에는 교황 어어반 5세로부터 30여 년 동안 체불된 것과 함께 그 돈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 이듬해 의회는 존 왕이 월권 행사를 한 것이며, 봉건적 공물은 없앨 것이고, 필요하면, 국토를 교황으로부터 방어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한 주장에 나타난 결의를 보고서 교황은 그의 요구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추종자들 즉 영국의 수도사 계급의 성원들에게 얼마의 논쟁을 일으켰다.

그에 응수하여 위클리프는 의회가 취한 입장을 합법적으로 지지하는 논문을 썼다. 그의 논증은 공의회의 여러 영주들의 말들로 엮었다.a 한 영주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추종자가 되는 것은 교황의 의무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주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러므로 교황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황이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준수할 것을 주장해야 하므로, 교황의 현재 청구를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존 위클리프와 그의 영국의 선구자들」, 131면.

공물은 교황이 영국으로부터 애써 거둬들인 돈만이 아니었다. 때때로 교황의 대사와 그의 종들이 전국을 여행하면서 헌물을 거둬들여서 로마로 가져갔다. 1372년 이러한 방문이 있었을 때 위클리프는 이러한 관습을 논박하는 법적인 논문을 썼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황이 행하기로 결정한 것이 무엇이든 다 반드시 옳다는 원칙에 대해서도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위클리프는 의회가 취한 방침의 가장 유능한 옹호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1374년에 위클리프가 로마 교회에 대한 불평들이 제시되었던 브루즈 교황 회의 때 국왕의 협상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같은 해에 위클리프는, 아마도 국왕에 대한 그의 봉사 때문에, 러터워어드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의 지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에게는 적들이 많았다. 1377년에 그는 성 바오로 성당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 소환되었다. 랜카스터 공작이었던 고온트의 존과 그의 다른 영향력있는 동맹자들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사태는 분명 그에게 불리해졌었을 것이다. 그 때는 좌절되었지만 위클리프의 적들은 교황청에 상고하였다. 교황은 위클리프에 대한 5가지 칙서를 내어 그의 가르침들이 이단적이라고 정죄하고 그에 대해 적대 행위를 취해야 한다고 권장하였다. 그 결과, 위클리프는 런던, 람베드 궁에서 열린 다른 회의에 소환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왕의 어머니가 중재해 주었다. 일단의 평민들은 그들의 지지를 보이기 위하여 강제로 밀고 들어왔다. 이러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그 회의는 교황이 원하던 대로 조처하기를 주저했고 단지 위클리프가 위법적인 가르침 등을 강의하거나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기만 했다.

최초의 위클리프 성서

위클리프의 벗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보호할 수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우연히도,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사망하자 교회가 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바람에 위클리프는 유럽 대륙에서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새로운 교황 어어반 6세가 취한 조처들은 곧 몇몇 강력한 추기경들을 따돌렸다. 그의 선출이 불법임을 항의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이렇게 해도 어어반을 움직이지 못하자 이들 추기경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따로 선출함으로써 역사에서 대교황권 분열이라고 명명해 온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과 나라들이 이 교황 편 아니면 저 교황 편을 지지하자, 위클리프는 더욱더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자격이 있는 교황을 지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교황이 서로 비난하면서 권력과 직위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그리스도인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세를 보고서 위클리프는 두 교황 모두 가짜라고 선언했다. 그가 영적 권위라고 생각해 온 그 직책에 위선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온전히 보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참된 영적 권위를 찾아 그는 무엇에 혹은 누구에게로 갈 수 있었겠는가?

그의 연구, 묵상, 토론 및 추리 등 모든 것은 즉시 올바른 곳에 이르게 되었다. 성서만이 진리의 유일한 표준이며, 영적인 것들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었다. 오늘날 그러한 생각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성서의 배포가 교회에 의해 엄격하게 규제되던 그 당시(영어 성서는 거의 없었었다.) 그러한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롭고 놀라운 생각이었다. 위클리프는 「성서 진리에 대하여」란 제목의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그 논문의 주요점 하나는 성서와 전통 사이를 구분짓는 명백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곧 위클리프는 성서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며,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구별이 없어야 하며, 평범한 농민도 자기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그는 라틴어로 된 벌게이트역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원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을 것이다. 희랍어는 수세기 동안 경시되어 왔었으므로 위클리프는 희랍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1379년과 1382년 사이에 번역하는 일은 매우 긴급하게 진척되었다. 동시에,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국을 여행하던 순회 설교사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도 추진하였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번역은 1382년 즈음에 완성된 것 같다. 그 때 히브리어 성서 번역이 위클리프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헤레포오드의 니콜라스의 감독하에 진행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일의 다른 조력자 존 퍼어비는 수년 동안 위클리프의 서기관이었다. 그들의 번역 결과는 매우 직역이어서, 영어의 관용어들을 무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일은 평민들이 성서 전체를 처음으로 입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성체화(聖體化) 논쟁

여러 해 동안 존 위클리프는 주의 만찬이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1381년에 교회의 가르침 및 전통을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과 분리시키고자 하는 그의 욕망으로 인하여 그는 성체화 개념을 공격하게 되었다. 제9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교리는 사제가 성별할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물질로 변한다는 주장이었다. 위클리프의 논증은 그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복음서들 및 바울의 서한들의 인용 귀절들과 다른 여러 관련된 성귀들에 근거해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말씀은 자기가 문자적인 포도나무가 되었다거나, 문자적인 포도나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 15:1) 오히려 이것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전통을 폭로하는 가운데 위클리프는 이 성체화의 가르침이 초기 교회의 교리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제로움도 성서적인 개념에 고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위클리프의 솔직한 저서들과 전파 활동 전체 중에서 아마 교회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미사 교리는 사람들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붙들어 두는 주된 수단이었던 것이다. 위클리프의 강력한 동맹자인 고온트의 존까지 옥스포오드로 가서 위클리프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381년에 일어난 소작인 소요 역시 위클리프에 대한 반대를 한층 더 불러일으켰다. 와트 타일러와 다른 주모자들의 지휘하에 수천 명의 폭도들이 런던으로 행군하면서 방화, 살인을 자행하고 마침내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처형하고 난 후에야 진압되었다.

위클리프가 이 폭동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백성들이 그들 상전들의 권위를 의심하도록 자극한 것은 그의 가르침이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 사건은 새로운 대주교 윌리엄 코오트네이가 세력을 얻게 했다. 이 사람은 런던의 주교로 있을 동안에 이미 위클리프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했었다. 1382년에 대주교로서 코오트네이는 한 공의회를 소집하여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이단적이고 그릇된 것이라고 정죄하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오드 대학교에서 해임되었으며, 누구든 정죄된 교리를 전파하거나, 심지어 전파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하더라도 파문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그의 말년

위클리프가 계속 자유인 신분을 유지한 것은 그의 몇몇 유력한 벗들의 계속적인 지지와 아직 신임 대주교의 공복이 되지 않은 의회의 태도 덕분이었음이 틀림없다. 위클리프는 이제 러터워어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계속 글을 써서 그의 추종자들을 고무하였다. 그는 특히 노리즈의 주교 헨리 러 스펜서란 사람의 행동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이 사람은 소작인 소요 때 노르포오크에서 폭도들을 처음으로 진압하는 데서 보여준 용기와 지도력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그 거만한 주교는 이 새로 얻은 명성으로 교황권 분열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1383년에 그는 클레멘트 7세를 대적하는 성전(聖戰)을 준비하는 권위를 자기에게 부여하는 교서를 어어반 6세로부터 얻어냈다. 그는 사면을 약속함으로써, 그리고 자기의 지휘 아래 복무할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재빨리 군대를 모았다. 위클리프는 이미 분명한 말로 그 분립에 대해 논평한 바 있었고, 그는 그 다음에 “성직자들의 전쟁에 반대하여”란 논문을 썼다. 그는 그 분열을 두 마리의 개가 뼈 하나를 놓고 싸우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들의 전체 싸움은 이 세상의 권력과 지위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누구든지 그러한 전투에 참여하면 죄를 사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거짓말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들이 전적으로 비그리스도교적인 전쟁에서 죽는다면 믿음이 없는 가운데 죽는 것이었다. 그 성전은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한때 거만하던 그 주교는 치욕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일찌기 1382년에 위클리프는 뇌일혈이 일어나 몸의 일부가 불구가 되었다. 2년 후에 두 번째 뇌일혈이 일어나 그는 불수가 되었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 그는 며칠 후 1384년 12월 31일에 사망했으며, 러터워어드 교회 묘지에 장사되었다. 이 곳에서 그의 유해가 40여 년 동안 가만히 묻혀 있었다.

그런데, 1428년에 이상하고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4년 전에 내려졌던 콘스탄스 회의의 명령에 따라 존 위클리프의 무덤은 파헤쳐졌다. 그의 유해를 파내어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그 태운 재를 조금 떨어진 작은 강 스위프트로 가져갔다. 거기 강물 위에 그것은 뿌려져서 물줄기를 따라 에이번 강으로, 다음에 세버언 강으로, 그리고 넓은 대해로 떠내려갔다. 이러한 행동을 한 흉행자들이 어떤 상징적인 일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원한을 품은 행동에서 어떤 위안을 얻기 원한 사람들은 그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 일이 왜 위클리프가 죽은 후 즉, 그가 영국의 종교적인 권세자들에게 가시와 같은 일을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 된 후에야 일어났는가? 그의 추종자들인 롤러드파(위클리프파)에 대한 앞으로 나올 기사가 그 대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각주]

a 위클리프가 이들 영주들의 말을 실제로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표현에 권의를 더하기 위하여 어떤 문학적 기교를 사용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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