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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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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파80 12월호 8-11면

“마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라”

로이스 다이어의 체험담

이 말이 49년 전 내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할 때 내린 결심이었다. 퍼어드로부터 토오쿄오로 임명이 옮겨졌으며, 여러 가지 보람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1910년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노르담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장 어릴 때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 집 책장의 맨 아래 칸에 꽂힌 몇 권의 큰 서적들이 생각난다. 그것은 1904년 이후의 제본된 「파수대」 잡지들이었다.

당시 그 마을에는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이 없었으나 콜포처들이 우리를 종종 방문하였다. 아버지는 워치 타워 출판물을 읽고 그 내용을 믿었으며, 병석에 누운 다음에도 성서 진리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1929년 로버트 라젠비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 연설을 하러 퍼어드에서 왔다. 그의 연설을 듣고, 나는 즉시 진리임을 깨달았으며, 워치 타워 협회에서 나온 구할 수 있는 출판물을 그 때부터 전부 읽었다.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31년 7월에 호별 방문 증거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이 담긴 편지를 워치 타워 협회에 보냈다. 그에 대한 회답으로, 협회는 몇 상자의 서적과 보조 파이오니아 신청서를 보내 주었다. 그렇다. 이 특별 봉사에 대한 명칭은 현재와 같았으며,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매달 60시간씩 바치도록 요구되는 것도 동일하였다. 나는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으나, 이러한 특권을 받아들였다.

그 후 협회에서 보내온 첫 편지에는 1931년 오하이오 주 콜롬부스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결의문이 들어 있었다. (이사야 43:10-12) 어머니와 나는 여기에 기꺼이 사인하였다. 우리는 여전히 격리되어 있었으나, 나는 내 고향에서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방 국민 학교에서 2년간 선생으로 일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호별 방문 봉사를 혼자 시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특히 회중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종교적 반대자들과 논쟁이 여러 번 행해졌다. 어느 성공회 목사는 경멸하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당신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틀림없이 믿지 않는단 말이지!” 어떤 사람들은 말을 듣고 출판물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관심자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어떠한 조직적인 연구도 하고 있지 않았으나 내 언니와 그 남편은 「파수대」를 읽고 있었으며, 나는 회중과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932년 1월 1일, 어머니와 나는 퍼어드로 이사하였다. 그리스도인 회중과 처음으로 연합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가! 며칠 후인 1932년 1월 4일, 우리 둘은 수비아코 왕국회관에서 침례를 받았다. 바로 그 다음날, 나는 열성적인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일하기 시작했고, 정말 기쁘게도 경험있는 왕국 전도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마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라”고 나에게 격려해 주었다.

몇 주 후 우리 넷은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남부 지역에 있는 어느 농촌 지역을 돌기 위해 자동차로 출발하였다. 이 지역은 영국인 정착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숲을 개간하고 집단을 이루어 낙농업을 시작하였다. 각 집단은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정착자들은 “집단 생활자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에게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서적을 우유, 계란 그리고 채소와 교환하였다. 한 번은, 몇 권의 서적을 일주일간 쓸 수 있는 토마토 한 상자와 바꾸기도 했다. 우리는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찾아 다녔고,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는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1932년 그해에, 우리는 도니브룩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아아더 윌리암즈 연장자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였는데, 윌리암즈는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최초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누이인 바이 윌리암즈는 여러 해 동안 충실한 파이오니아로 일하였고 나에게 훌륭한 충고를 해 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윌리암즈 가족은 그 곳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지령하에서 증거함

오래 전에, 나는 시편 55:22의 말을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1941년 1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금지령을 내렸을 때 특히 이 점이 증명되었다.

그 동안, 우리는 지하에서 전파를 계속하였으며, 갖고 있는 출판물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서적을 철제 트렁크에 넣어 언니네 집 정원에 묻어 두었다. 우리는 성서를 가지고 증거하였으며, 참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밤에 정원을 몰래 파는 작업을 하곤 하였다! 증거 사업은 발전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왕국 전도인의 수는 그 동안에 두 배로 증가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증거 사업에 고착하는 자기의 종들을 확실히 도와주셨다.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

1942년,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나의 고향인 노르담에 되돌아갔다. 남동생 댄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그 때까지 진리에 고착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또 다른 파이오니아 매어리 햄(지금은 윌리스)과 나는 자전거 대신에 말과 2륜 마차를 종종 이용하였다. 말이 너무 늙어서 아침에 출발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조카들은 그 말을 움직일 셈으로 한 다발의 풀이나 사과 한 조각을 가지고 앞서 걸어가 도와주었다.

나의 다음 임명은 매우 색다른 곳이었다. 퍼어드 시에 있는 사업 구역이었다. 처음에는 은행과 사무실에서 증거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겁이 났으나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란 집에 있건 사무실에 있건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그러한 주위 환경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여호와께 의지하면서 나는 밀고 나아갔다. 개인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는 어려웠으나, 훌륭한 잡지 통로가 생기게 되었고, 이 구역을 떠나기 전, 50건의 잡지 예약을 맡게 되었다.

1947년, 나는 당시 약 3,000명의 인구를 가진 카타닝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혼자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이 마을은 목양업과 밀 경작의 중심지였다. 근처 농장에 가기 위해 자전거로 매일 30 내지 5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곤 하였다. 사람들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식사를 같이 하도록 가끔 나를 초대하였다. 봄에는 들꽃들이 시골길 양편에 피어 화려한 카아핏을 깔아 놓은 것 같았으며, 그럴 때면 나는 가끔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멈추어 그 아름다운 장면을 감상하였다.

선교 봉사로의 초대

카타닝에서 단지 6개월을 보낸 후, 놀랍게도 내 앞에 새로운 봉사의 특권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제11기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나를 포함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에서 19명이 선발되었다. 이 중에 몰리 헤론이 끼어 있었는데, 그 이후 계속 나의 짝이 되었다. 몰리도 1932년에 브리스배인에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다같이 같은 햇수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통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몰리는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훌륭한 짝이 되었고 약 31년간 매우 행복한 우정을 즐겨 왔다.

뉴우요오크의 사우드랜싱에 있는 길르앗 학교에서 매우 바쁘고 행복한 5개월을 보낸 뒤, 우리는 우리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5명의 자매로 된 우리 그룹은 뉴우칼레도니아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후에 N. H. 노워 형제는 아직도 그 섬에 식인종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임명은 피지로 변경되었다. 피지로 들어가는 비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캘리포오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에서 16개월을 보냈는데, 그 곳에서 우리는 댈리시티 회중과 연합하였으며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1949년 10월, 11기생의 동료들이 일본에서 임명을 수행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배로 떠날 때 우리는 배웅하였다. 그들은 로이드 및 멜바 배리, 퍼어시 및 일마 이즈라우브, 그리고 아드리안 톰프슨이었다. 배가 선창을 빠져 나갈 때 우리는 “아마겟돈 후에 봅시다” 하고 소리쳤다. (계시 16:14, 16) 그러나 관계 당국은 피지로 갈 비자를 허락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0년 1월, 우리는 일본으로 간 친구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으며, 코오베의 타루미에 있는 선교인 집에서 그들과 합세하였다.

일본에서의 선교 활동

이렇게 해서 49년간의 전 시간 봉사중 가장 즐거운 시절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어와 그 곳 풍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예를 들어, 한때 사람들에게 내가 집집으로 기침하고(coughing)[방문하고(Calling) 대신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노워 형제의 충고를 기억하였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시오. 그리고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무언가 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서 계속하였고, 여호와의 도움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우리가 부딪치게 된 새로운 경험은 매서운 태풍 제인 호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야외 봉사에 나가 있었으며, 전도인들은 우리더러 집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하였다. 위험을 깨닫지 못한 몰리와 나는 가능한 한 증거를 오래 계속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질풍에 강타되어 전선이 절단되었으며 우리는 가까스로 선교인 집으로 피신하여 공중을 나는 기왓장과 나뭇가지의 상처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선교인 한 명이 행방 불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차 속에 온종일 피해 있다가 한밤중에야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폭풍우가 한풀 꺾였을 때 보니, 선교인 집은 단지 몇 개의 창이 깨지고 수해를 조금 입었을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생명의 피해가 있었고, 항구에서는 500척의 배가 침몰하였다.

또한 그 무렵, 일본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편인 지진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한 번은, 지진으로 선교인 집 정원에 있는 큰 석등이 넘어졌다. 그 때 다행히도, 그 옆에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즐거운 경험 또한 많았다. 코오베에서 4년을 보내는 동안, 타루미 회중과 아카시 회중이 세워지도록 돕는 특권을 가졌다. 그 때 우리와 함께 성서를 공부하던 사람들 중 몇몇은 현재 회중에서 파이오니아와 임명된 장로로서 봉사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수천 개의 사당과 사원이 있는 쿄오토오로 옮기게 되었다. 비록 그 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네의 화려한 종교 축제에 주된 관심이 있기는 했으나, 우리와 함께 성서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들 중 독실한 불교 신자인 미마 쇼조가 끼어 있었다. 그는 창조주가 틀림없이 계실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었으며 “나는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많은 질문을 던지고 항상 성서의 대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으므로, 그의 연구를 사회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그는 곧 열성적인 파이오니아 증인이 되었고 선교인들이 쿄오토오를 떠났을 때 그 곳 회중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당시 그 곳에는 왕국 전도인들이 36명밖에 없었으나, 현재는 11개의 회중과 6개의 왕국회관이 있다.

몰리와 나는 큐우슈우 섬에 있는 쿠마모토로 옮겨졌다. 우리는 이 곳이 매우 봉건적인 도시임을 알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이 곳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발전시키기가 힘들었다. 한나 마하라와 마가렛 워터러(지금은 패스터)가 우리에게 합세했으며, 우리 4명의 자매들은 새로운 회중의 ‘기복’ 때문에 고전하였다. 정말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6년간 힘들여 일함으로 31명의 열심있는 전도인들을 남겨 두고 회중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 중 얼마는 현재 수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오고 있다. 지금은, 쿠마모토에 3개의 회중이 있다.

다음으로 옮긴 곳은 토오쿄오였는데, 우리는 타마가와 회중, 세타가야 회중과 지난 15년간 계속 함께 봉사해 왔다. 우리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 중, 얼마는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와 접촉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은 불교 신자들이었다. 우리가 처음에 세타가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계시록과 마태 복음 24장의 예언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지난 20년간 계속 추구해 오던 나카무라 토시코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13개의 교회에 가 보았고 여러 목사들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러한 예언을 해설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야 이것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고 기뻐하며 자기 아들에게 “드디어 진리를 찾게 되었구나” 하고 말하였다. 아들은 어머니를 따라 13개의 교회들에 가 보았기 때문에 매우 회의적이 되었으나, 공부하는 데 동의하였으며 빨리 발전하였다. 이 아들은 8년간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하였고 지금은 세타가야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풍성한 축복들

이 곳 일본에서 제자 삼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시작할 때는 힘들었으나, 견디어 온 것을 기쁘게 여긴다. 우리는 12명의 전도인에서 52,000명 이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을 보았고, 마음 뿌듯한 여러 가지 경험을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건강 문제가 있었으며 실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일을 마치기 전에 그만둔다는 생각을 결코 해본 적이 없다. 이제 우리의 일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으면 꼭 내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상, 해외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면, 그 곳에 방문객으로 간 것 같다.

그리도 빨리 지나간 여러 해를 회고해 볼 때, 나는 진실로 여호와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을 풍성히 내려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말라기 3:10) 전 시간 봉사는 하나의 보물이다. 사실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모든 활동은 하늘의 아버지께 찬양을 가져오는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마칠 때까지 그 일에 고착하고자 한다면, 여호와께서는 틀림없이 풍성한 축복을 더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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