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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80 8월호 6-11면
  • 성실을 지키게 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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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실을 지키게 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 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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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에게 영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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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파80 8월호 6-11면

성실을 지키게 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랄드 압트’의 체험담

나는 1940년 9월 독일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친위대(히틀러의 국수 당원/정예 호위병) 장교가 “따뜻한” 환영을 해 주었다. 즉 거듭 구타당하고 위협을 받은 것이다. 근처 화장터 굴뚝을 가리키면서 한 장교가 이렇게 경고했다. “계속 네 믿음을 고집하면 14일 내에 저기 너의 여호와한테로 올라가게 될거다.”

그리고 나서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인 여호와의 증인이 수용되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몸 앞쪽으로 팔을 뻗고서 쭈그리고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네 시간 동안 그 어색한 자세로 계속 있어야 했었다. 오후 6시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힘든 그날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여기 증인들이, 그 전에는 약 400명이 있었는데, 130여 명의 형제들이 비인간적인 처사로 사망하였다고 말해 주었다. 이 사실이 살아 남아 있던 증인들에게 겁을 주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충성하기로 결심했으며 나도 그러했다.

약 5년간의 작센하우젠과 부헨발트 수용소 생활에 대하여 더 말하기 전에 내가 그 곳에 가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소란스런 때의 그리스도인

나는 한때 오스트리아 땅이었던 폴란드 남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폴란드어와 함께 독일어도 말하면서 성장하였다. 1931년 내 나이 19세 때, 당시 독일어를 사용하던 발틱 해 연안의 ‘자유 도시’ 단찌히(폴란드어로는 그다니스크)의 공업 기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그 곳에서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여자 엘자를 만났다.

1936년 내가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엘자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몇 사람의 증인이 이미 구속되었으므로 이 집회들은 비밀히 열리고 있었다. 나는 엘자에게 그런 사람들과 관련을 갖는 것이 어리석다는 나의 생각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엘자는 결국 나를 설득하여 집회에 데리고 갔다. 나는 결점을 찾아내기는커녕 증인들이 가진 성서 지식에 감동을 받았다.

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폴란드에서는 좋은 일자리가 전혀 없었다. 나는 일자리를 얻으러 독일로 갈 것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엘자는 “간다면 혼자 갈 걸로 아세요” 하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독일에서 극심한 반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엘자는 자신을 불필요하게 위험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로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 성서를 더 정기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8년 6월 우리는 결혼하였다. 그리고 1939년 초에 엘자와 나는 함께 침례를 받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러던 중 나는 단찌히 항구 관리청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우리는 훌륭한 가구를 갖춘 아파트를 얻어 성서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때쯤 로지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폴란드 지부로부터 보내오는 성서 출판물들이 단찌히에서 도중에 압수당하고 있었다. 무슨 조처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로지에 있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단찌히 바로 외곽 주소로 출판물을 보내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 곳에서 엘자와 내가 인수하여 그 도시로 밀반입하였다.

엘자는 그 때 임신중이었으며 때때로 「파수대」 잡지 100부를 옷 속 몸 둘레에 묶어서 운반하곤 하였다. 한 번은 세관원이 이렇게 농담하였다. “야아, 세 쌍동이 낳으시겠어요. 틀림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엘자는 한 번도 수색당한 일이 없었다. 우리는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공격하여 단찌히 밖으로 출입하는 자유를 제한당할 때까지 출판물의 밀반입을 계속하였다. 우리 딸 유타가 9월 24일에 출생하였다.

히틀러에게 영예를?

폴란드 수비군이 독일군에게 항복한 후 나는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여 동료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이제 누구나 “하일 히틀러”라고 말하도록 되어 있었다.

항구의 조감독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그런 인사를 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나도 그리스도인이요” 하고 그가 응답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며 사람에게 그런 영예를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해고당했고 “하일 히틀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경고받았다.

그 달 9월 얼마 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정복한 다음 히틀러가 단찌히에 왔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던 건물 근처 대광장에서 열렬한 승리의 연설을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기를 늘어뜨리도록 되어 있었으나 우리가 살고 있는 층에는 아무 것도 내걸리지 않았다!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형제들이 폴란드 동부로 이사하라고 제안해 주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의 전재산을 버리고 가야한다는 뜻이었다. 여행 가방과 유모차와 베개로 감싼 유타만을 데리고 12월에 긴 여행을 떠나갔다. 기차는 초만원이었고 출발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지부 사무실이 있는 로지의 집에 도착하였다. 문을 열어준 자매가 엘자의 팔에 안겨서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고 안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돌아와서 아기가 움직이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 “아! 살아 있군! 살아 있어!”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그 자매는 우리를 맞아들였다. 많은 아이들이 여행중에 동사했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유타도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속과 투옥

그 자매의 남편은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우리에게 어려운 겨울이었다. 불을 땔 석탄도, 적으나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식품을 요리할 불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일자리를 다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 7월 어느 날 게슈타포(나찌 비밀 경찰)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다가 집에 있던 우리를 발견하였다. 엘자와 나는 게슈타포 사무실로 신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여 내 물건을 챙긴 다음 사장에게 나는 게슈타포에 출두하러 가야 하므로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요. 12시면 돌아와 있을텐데”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몇 분 후에 게슈타포 사무실 앞에서 엘자를 만나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앉으시오. 우리는 당신들이 이 곳에 있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하고 장교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폴란드가 제3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과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어떤 일이 있는가를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의 믿음에 대하여 계속 말하면 수용소에 가게 될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타자기 쪽으로 가더니 타자를 시작했다. 돌아와서 그는 나에게 타자한 종이를 주었다. 그 일부는 이러하다. ‘나 하랄드 압트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말하는 일을 그만둘 것을 서약합니다.’ 나는 그에게 “안됐지만 나는 서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서명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설명한 후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엘자는 더 오래 심문을 받았다. 심문중에 엘자는 집에 10개월 된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엘자는 “내 젖으로 아기를 키우기 때문에 아기에게 젖을 먹일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기를 염려한 그 장교는 “그렇다면 간단하게 해 드리지요”라고 말했다.

그가 서둘러 작성한 진술서는 내가 서명을 거부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만약 자신이 그 종교를 계속 믿을 경우 수용소에 가게 될 것을 엘자는 알고 있다는 내용뿐이었다. 엘자는 자기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서명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명한 다음 엘자는 겁이 났다. 왜 그랬던가? 자기가 석방되면 믿음을 타협한 것으로 내가 생각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래서 그 사무실을 나올 때 그 홀의 저쪽 끝에서 나를 향해 “난 타협하지 않았어요. 타협하지 않았어요!”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몇 주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베를린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작센하우젠으로 송치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 생활

“따뜻한” 환영을 베푼 다음 친위대 장교들이 우리를 데려가 죄수복을 입혔다. 우리는 모발을 깎였다. 그 다음에 번호를 받았다. 나는 32,771번이었다. 내 옷에 달도록 여호와의 증인의 신분 표지인 보라색 삼각형도 받았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다른 색의 삼각형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정치범은 붉은색, 유대인은 노란색, 범죄자들은 초록색, 동성애자들은 분홍색 등을 달았다. 나는 이 무리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증인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용 바라크로 임명되었다. 작센하우젠의 바라크들은 커다란 점호 광장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광장을 향한 바라크들의 박공벽(牔栱壁)에 이런 표어가 쓰여 있었다. ‘자유의 길이 있다. 그것은 충성, 근면, 작업 및 조국애이다.’ 바라크마다 이런 표어 한두 마디가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증인의 바라크 벽에 있는 표어였다. 내가 네 시간 동안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 거대한 바라크들은 60동 이상이 있었으며 각각 두 부분이 취침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앙에는 식사 지역, 화장실, 세면 시설이 있었다. 취침 지역의 어느 쪽이건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았고 침대는 삼 층으로 되어 있었다. 겨울에는 섭씨 영하 18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는데도 얄팍한 담요 두 장밖에 없었다. 호흡하는 사람들의 내쉬는 공기가 천정에서 응결되어 그 물이 떨어져서 맨 위층에서 잠자는 사람들의 담요 위에 얼어붙었다.

대개 우리의 식사는 수우프 형식으로 끓인 순 무우였으며 가끔 말 머리를 넣고 삶을 때도 있었다. 때때로 생선 수우프를 받기도 하는데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수용소 전체에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밤에는 얼마의 빵을 주었다. 아침 식사는 인조 커피 약간을 주는 것이 고작이어서 나는 항상 아침에 먹기 위해 빵을 조금씩 남겨 두었다. 나는 특별히 허기를 많이 느끼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여섯 시에 기상하여 자리를 개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점호 광장으로 나가서 일터로 행진해야 했다. 많은 일이 수용소 밖에서 행해졌다. 내가 처음에 맡은 일은 길을 닦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내가 받은 엔지니어 교육 덕분에 새 작업장 건축의 기술 감독 임무를 받았다.

친위대의 많은 장교들은 잔인해서 자주 우리를 못살게 굴 구실만 찾고 있었다. 가끔 우리가 일하고 있는 사이에 장교가 들어와서 바라크 안에서 먼지를 찾곤 했다. 보통 서까래 위에서 먼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방에 약 80개의 짚 침대가 있었으니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일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오면 “오늘 아침 너희 바라크에서 먼지를 봤다. 따라서 오늘 점심은 없을 것이다”라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제치고는 솥을 가져가 버린다. 조금이라도 불평하면 사형을 당하게 마련이다.

독자들은 작센하우젠의 생활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친위대의 주의를 약간이라도 거슬리게 되면 곧 벌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겨울의 얼어붙는 듯한 추위 가운데 바라크 앞에서 온종일 서 있도록 강요될 수 있다. 그 사람이 열이 나서 일하러 나갈 수 없게 되면 (폐렴에 많이 걸리는데) 친위대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아, 열이 있다고! 잘 됐어. 추운 바깥에 세워서 식혀주도록 하지.” 이런 식의 처사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일부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혹심한 겨울에 찬물을 담은 큰 그릇 속에 앉아 있으라고 지시하여 그 심장 부위에 찬물을 쏜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까닭에 다가오는 봄까지 살아 남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두렵지 않아요?”라고 질문했다. 그렇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 처하면 믿음으로 힘이 자라게 된다. 여호와께서 구출해 주신다.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멀리 가면 우리들은 함께 기도하고 낮은 소리로 노래까지 불렀다. 예를 들어, 우리 형제 한 사람이 잔인한 행위나 만행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투쟁 정신으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 태도는 이러했다.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는 우리들 역시 곧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충성을 유지하려는 굳은 결심을 표명하고 싶었다.

영적으로 먹이는 일과 전파하는 일

1942년 우리를 위해 상태가 약간 개선되었다. 새로운 수용소장이 부임하여 우리들은 좀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더 이상 일요일에 일하도록 강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쯤 다니엘 기사를 다룬 「파수대」 7부가 비밀히 반입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성서도 몇 권 입수했다. 그래서 일요일 오후면 성서 연구를 하러 바라크 한쪽에 모여들곤 하였다. 약 200명이 참석하곤 하였다. 몇 사람은 바깥에 배치되어 친위대가 가까이 오면 신호하도록 하였다. 내게는 매우 기억할 만하고 믿음을 세워 주는 집회들이었다.

‘밀반입된 「파수대」라니?’ 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믿음과 용기의 이야기거리이다. 몇 명의 그리스도인 재소자들이 수용소 밖에서 일을 했는데 아직 구속되지 않은 형제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형제들은 「파수대」 몇 부를 얻어서 수용소로 몰래 들여보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우리의 감독자와 같았던 젤리거 형제가 감옥 병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그 곳 목욕탕 타일 밑에 몰래 들여온 성서 출판물을 숨겨 놓곤 하였다.

그러나 때가 되어 우리가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가가 발각되었다. 성서 몇 권이 우리 바라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약 80명의 형제들을 공사 부대에 편입시켜 작센하우젠으로부터 이감시켜 버렸다. 나머지 증인들은 수용소의 다른 여러 바라크로 분산시켰다. 이 일로 인해 우리의 큰 집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동료 죄수들에게 전파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

상당히 많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젊은이들이 반응을 보이고 증인이 되었다. 일부는 바로 수용소 내에서 그러니까 수용소 병실의 욕조에서 몰래 침례를 받았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두 젊은이가 기억이 난다. 어느 날 그 사람들이 한 형제가 왕국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건 종교 노래의 곡조지요” 하고 그 형제가 대답했다. 그들은 증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확신 때문에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을 받았다. 석방이 된 다음 두 사람 중 한 젊은이는 폴란드 동부 어느 지역에서 증거 사업을 지휘하였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 집회를 사회하러 가는 도중에 여호와의 증인의 적에게 살해당했다.

1944년 어느 날 우리 작업대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행진해 들어오는데 형제들이 안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증인인 것을 알아보고 나도 함께 서라고 했다. 아마 친위대에서 우리의 수용소 안팎과 수용소 사이에 통하고 있던 비밀 우편물에 대해서, 그리고 두세 사람씩 점호 광장에서 만나 일용할 성귀를 토론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 모양이었다. 우리에게 이 불법적인 활동을 그만두라고 명령했지만 우리는 합심하여 서로서로 영적으로 강화시키고자 하는 결의를 계속 가졌다. 비밀 우편물 중계 책임자였던 젤리거 형제는 수용소 내에서 계속 전도할 계획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물론입니다. 그 일은 바로 내가 계속 행하려는 일이며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 모두가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호와의 증인이 가진 믿음과 용기의 영은 분명히 파괴되지 않았으며 나찌 당원들은 다시 우리의 성실을 아무리 해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헨발트와 해방

1944년 10월 말쯤에 나는 건축 기술자 부대와 함께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우리는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은 작업장 몇 곳을 재건하게 되어 있었다. 부헨발트의 형제들이 곧 나와 연락이 되어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여기서는 내 번호가 76,667번이었다.

1945년 초가 되면서 나찌 체제의 붕괴가 다가온 것이 분명해졌다. 영국 전투기들이 수용소 위를 비행할 때 날개를 좌우로 기울이면서 우리에게 인사를 보내며 우리를 격려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석방되기 마지막 2주일 정도는 재소자들이 일하러 나가는 일조차 없었다.

1945년 4월 11일 수요일, 우리는 한 형제가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모든 연표어 성귀를 총망라하는 연설을 들으러 모였었다. 집회 진행중 전투의 함성이 가까와지는 것이 들렸다. 그런데 그 연설의 바로 중간쯤에 한 재소자가 문을 활짝 열고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입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수용소 내에서는 혼란이 빚어졌지만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우리의 집회를 계속하였다.

부헨발트에는 아직 20,000명 이상의 재소자들이 있었다. 친위대 대원들은 제복을 벗어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고 많은 재소자들은 그들에게 복수를 가하였다. 나중에 한 재소자는 자기가 친위대 대원의 배에 어떻게 칼을 꽂았는가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다.

내가 마침내 엘자를 찾은 것은 한 달 가량 지나서였다. 엘자는 아우슈비츠와 다른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 남았다. 1945년 8월 우리가 집에 돌아와 보았더니 딸아이를 몇 명의 형제들이 돌보아주고 있었다. 그 때에 딸아이는 여섯 살이 가까와 있었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결코 타협하지 않다

독일 공화국의 점령에서 해방된 후 폴란드는 인민 공화국이 되었다. 엘자와 나는 즉시 로지의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신청하였다. 5년 동안 그 곳에서 일하면서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1945년에 약 2,000명이던 것이 1950년에는 18,000명 가량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1950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여호와의 조직이 임명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해 왔으며 항상 믿음 가운데 굳게 설 것을 결심하였다.

요컨대 나는 하나님께 믿음을 두었다는 이유로 수용소와 감옥에서 내 일생의 14년간을 보냈다. 나는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데 아내가 도움이 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흔히 받았다. 아내는 진실로 그러했다! 나는 아내가 절대로 믿음을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이것은 내가 성실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내가 타협해서 풀려나기보다는 차라리 들것에 실려오는 내 시체를 보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강인한 배우자는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엘자는 독일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견디어 냈으며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8면 삽화]

작센하우젠 수용소

친위대 바라크

점호 광장

가스실

독방 건물

격리 수용소

검역장

사형장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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