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79 10월호 3-6면
  • 당신의 신뢰는 하나님에게 ··· 혹은 사람에게?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당신의 신뢰는 하나님에게 ··· 혹은 사람에게?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존스타운’의 비극
  •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
  • 행복한 생활에 꼭 필요한 신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3
  • 위대한 본을 따르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1
  • 여호와를 신뢰하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8
  • 훌륭한 지도력—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2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파79 10월호 3-6면

당신의 신뢰는 하나님에게 ··· 혹은 사람에게?

의심의 여지 없이, 1978년에 신문의 표제를 장식한 가장 충격적인 ‘뉴우스’는 ‘가이아나’, ‘존스타운’의 소름끼치는 비극이었다. 그것은 ‘로마’인에게 항복하여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마사다’의 960명의 ‘유대’인 열광자들, 또 미국 군대가 ‘사이판’ 섬을 점령했을 때, 그 섬에 있는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1,000명의 일본인들과 흡사하였다. ‘가이아나’ 비극은 전세계 신문지상에 매일 같이 대서 특필되었다. 처음에 사망자의 총계가 400명 다음에 500명, 그 다음에 780명까지 그리고 “미국 정부에 의하면, ‘가이아나’ 집단 촌락 희생자 최소한 총 900명, 아동 260명, 포함”이라고 보도되었다. (「뉴우요오크 타임즈」, 1978년 11월 26일자) 마침내 그 수는 913명에 이르렀다.

이 비극은 “당신의 신뢰는 하나님에게 혹은 사람에게?” 하는 질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아마 당신은 ‘물론, 사람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 성서도 “인간 지도자들에게 너의 신뢰를 두지 말라.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너를 구할 수 없느니라.”고 경고한다. (시 146:3, 현용 영어 성경) 하나님은 당신을 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10) 그러나, 하나님에게 당신의 신뢰를 두는 것은 단순한 말 이상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행동이 요구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성서의 원칙대로 살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할 것이다.—야고보 2:26; 히브리 1:9.

인간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신뢰를 두지 말라고 한 시편 필자의 충고와 일치하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칭호도 듣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 1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처음으로 그 말씀을 하신지 19세기에 걸쳐 그분의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일을 행해 왔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아버지” 혹은 “지도자”라고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콘스탄틴’ 대제나, ‘샤를마뉴’, ‘나폴레옹’, ‘히틀러’와 같은 우상화된 인간들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수천 아니, 수백만의 사람들이 인간에게 그들의 신뢰를 두었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추종하였다.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에 대해 그 당시 독일에 살았던 한 사람은 최근에 이렇게 썼다. “종전이 이미 눈에 선하였지만, 많은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그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으며,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최강의 무기에 대한 그의 약속을 믿었다.” 이러한 인간에게 그들의 신뢰를 둔 자들은 비탄에 빠졌고, 종종 죽기 까지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그들의 신뢰를 두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구사하는 지배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오늘날 “카리스마”라고 불리우며, “어떤 정치가나 군 지휘관에 대해 민중의 특별한 충성이나 열의를 일으키는 통솔력에 대한 개인적 매력”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에 대한 하나의 현저한 예는 ‘나폴레옹’의 경우이다. 약 1,000명의 분견대와 함께 ‘앨바’ 섬에서 탈출한 후 곧 그의 군대는 수천명으로 증가했다. 그들이 ‘그레노불’에 도착했을 때, 그의 군대는 6,000명의 적군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때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에게 정지를 명하고 적대하는 군대를 향하여 말을 달렸다. 적에게 접근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 밀집된 적 집단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지휘관이 발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군인들이 발포 자세를 하였으나, 그들 앞에 서 있는 그 지도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 사람도 발포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재등장은 끝났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한때 이렇게 적절하게 말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명령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이 ‘알렉산더’와 ‘샤를마뉴’와 내 자신에게 주어졌다. 시대는 우리를 필요로 했다.” 그는 그리고 나서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대조하였다.

‘존스타운’의 비극

이와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주장한 사람이 1978년 후반에 ‘뉴우스’의 초점이 되어 온 ‘제임스 워렌 존스’였다. ‘샌프란시스코’ 인권 위원회에서 ‘존스’와 함께 일하였던 은퇴한 한 ‘로마 가톨릭’ 사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상한 힘을 가졌으며, 그러한 종류의 힘은 정상으로 가도록 도움이 되었다.” 수천명이 ‘샌프란시스코’의 인민 사원에서 그가 전파했을 때 그에게 몰려 왔으며, 수백명이 ‘가이아나’에 그가 세운 집단 촌락으로 그를 따라 갔으며, 그는 그곳을 “존스타운”이라고 불렀다. 그곳까지 따라 갔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그의 명령에 따라 많은 그들이 자살을 하였다. 그의 무장한 경비병들의 권유로 그 자신도 약 909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하도록 강요한, 같은 자살을 스스로 하였다. 그것은 세계를 놀라게 한 하나의 비극이었다.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의 신뢰를 두고, 그분의 임명하신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한 파렴치한 선동 연설가인 인간 지도자에게 그들의 신뢰를 두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참으로 가공할 뛰어난 하나의 실례였다! 뒤이은 대조들은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예증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소식은 생명 지향적이었다.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요한 10:10; 3:16, 신세) 그러나, “목사” ‘존스’는 사망 지향적이었다. 그는 “그 종파의 각 성원들과 자살 협정을 맺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죽음의 고귀함, 임종의 아름다움”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사실상, 예행 연습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었지만,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독약을 마시므로 그들의 충성을 표시하는 그러한 종교적인 의식을 반복해서 예행 연습을 한 것이다. 막판의 비극은 그것을 알려 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더 읽을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 때문에 방해를 받고 계시다고 느꼈을 때, 그분은 달리 생각하셨으며,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 10:13-16) 반면에, ‘존스’는 어두운 방에다 어린 아이들을 감금하고 그들에게 단단히 고정시킨 전극봉으로 전기 충격까지 함으로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혹은 우물 안으로 어린 아이들을 내려서 큰 소리로 울부짓기까지 그것을 반복하였다. 그 비극은 급기야 약 200명의 어린이들을 강제로 독물을 마시게 하거나 피하 주사기로 목구멍에 독물을 주입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전파하셨으며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경고하셨다. (마태 26:52) 그러나, “목사” ‘존스’는 폭력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그의 집단 촌락에 대해 해로운 보고를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하수인을 시켜 한 명의 미의회 의원과 세 명의 신문 기자들을 죽이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 자살을 하기 위해, 그의 추종자들 모두를 불렀을 때, 그는 독약 마시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하수인들을 시켜 위협하였다.

예수께서는 멍에로부터 구출하시고 자유케 하셨다. 그분은 적절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마태 11:28-30)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8:31, 32) ‘가이아나’에서 ‘존스’는 그의 추종자들의 여권을 몰수하고 그들을 모두 포로처럼 잡아둠으로, ‘존스타운’을 강제 수용소로 만들었다. 그는 뜨거운 열대 태양 아래 일찍부터 늦게까지 노예처럼 추종자들을 부렸다. 음식이란 점점 저질화되어 하루 세끼니 단지 쌀과 국물 정도였다. 도망하기를 원하던 그 종파의 한 성원은 “이것은 지옥이다” 하고 외쳤다.

예수께 대한 기록은 이러하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 후 8:9) 그러나, ‘존스’는 돈에 지나치게 굶주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의 재산, 심지어 그들의 연금수표까지 인계하도록 요구하거나, 감언이설로 속이고,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망시 그는 1,000만 내지 1,500만 ‘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다. 그분은 적절하게도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요한 8:46) 그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셨다. (히브리 7:26)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셨다.]” (베드로 전 2:22) 이 종교인 ‘존스’를 예수와 비교하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보도에 의하면, ‘존스’는 가까이 있는 모든 여자에게 정규적으로 성교를 요구하였으며, 그는 아내 외에 소실을 한 사람 두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도에 의하면 다수의 남성 애인들도 두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마태 19:4-6; 요한 17:17) ‘존스’는 성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의 설교는 성서를 거슬린 것이며 폭언할 뿐이었다. 한번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대신에 이것을 보고 있어”라고 불평하면서 마루에다 성서를 집어 던지기 까지 하였다.

더 많은 차이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지도자와 ‘메시야’라고 자칭하는 인간 ‘존스’ 사이에 있지만, 또 하나의 차이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라고 주장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분의 주장은 다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 뿐이었다. (요한 10:36; 계시 1:8) ‘존스’는 어떠했는가?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이 그 점을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자신을 예수의 화신이라고 부르기를 그만 두고, 스스로 하나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실제 천지를 만든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가이아나’에 있는 집단 촌락에서 그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거듭 외쳤었다.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

‘존스타운’의 비극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한 경우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태 15:14) 그 전체 ‘에피소우드’는 사람을 높이지 말라는 예수의 명령의 현명함을 강조한다. 의심할 바 없이 ‘존스’를 따르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한 때 다양한 그리스도교국의 교파에 속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적인 낙원의 몽상을 가진 자칭 ‘메시야’라는 주장에 현혹되었다. 이 소름끼치는 ‘에피소우드’는 적절하게도 “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자칭 애타주의와 정신적 횡포의 마귀적인 혼합물로 자신의 추종자들의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간담을 서 서늘케 한 하나의 사건이다.”라고 묘사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존스’에 의해 포로가 된 순진한 사람들에 관하여 의아해 한다. 그들 중 80‘퍼센트’가 흑인이었고, 대부분이 불우한 환경에 있던 자들이라고 한다. 애타적으로 자극받은 일부 백인들과 흑인들은 ‘존스’의 인종적 평등에 대한 강조와 그가 처음에 후원하던 여러 가지 인도주의적인 계획 때문에 동조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의로운 원칙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대하여 이상히 여긴다. ‘존스’가 자행하였고, 그들에게 하도록 시켰던 부정한 모든 일을 관용하고, 협조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신뢰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음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어떻게 그들은 “추종자들 위에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고 경제적, 이기적 소비물품을 강요하고 성적 만족을 강요한” 일개 인간에게 그와 같은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었는가?

분명히, 성서의 하나님께 그들의 신뢰를 둔 사람은 아무도, 이기적으로, 방자하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고, 잔인하게 야비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순진한 신뢰심을 악용한 극단적으로 악한 그러한 자에게 유혹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인간에게 신뢰를 둠으로 오는 무시무시한 결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참 종교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피해야 할 종교의 종류와 추앙된 어떤 인간 지도자나 인간이 만든 의식에 흔히 근거를 둔 종파들을 분명히 밝혀 준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사도 ‘바울’이 썼을 때에 “목사” ‘존스’의 낙인을 가진 부패한 자들을 지적하였다. (고린도 전 6:9, 10) 그 기록은 ‘존스타운’의 “지도자”에게 이러한 많은 일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인도되었다.

이 종교적인 선동자와 그와 같은 광신자들의 경우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근년에 나타난 많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경고”로서 썼으며, 또 이렇게 부언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반면에 ‘바울’은 왕국과 그 축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성령의 열매 ···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배양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 5:19-23.

이 열매는 어떤 인간 숭배의 광신자 집단의 감정적 흥분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된다.—시 91:2.

[3면 삽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재난으로 인도한다

[5면 삽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2-2026)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6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