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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자 물리학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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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자 물리학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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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종교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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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9
파79 9월호 21-26면

원자 물리학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프레드 윌슨’ 체험기

1940년대 초에 내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 질문”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하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쉬운 것으로 보인다. 그 때 세계는 바야흐로 원자 시대로 접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에게는 보수가 좋은 직장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일은 대단히 흥미있고 심지어 열중케 하는 직업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는가?

근본적으로, 종교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의 생애에 더 흥미있고 더 열중케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제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배경을 고려해 보기로 하자.

나의 가족은 생계를 밀수확에 의존하는 ‘캐나다’ 초원지의 전형적인 조그마한 마을에 살았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노고의 가치를 배웠고, 학교를 마친 후에는 상점에서 일하거나 나무를 켜거나, 곡식을 운반하거나 혹은 말을 몰므로써 돈을 벌곤 했었다. 우리 집에는 누이 하나 없었기에, 우리 4형제들은 몹시 안타까와 했다. 때문에 우리가 식사를 준비하고, 설겆이를 하고 세탁을 했어야 했다. 몇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어린 시절에 배운 것에 대한 가치를 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초기 종교적 배경

“말려들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어머니는 “복음교회”에서 모이는 독실한 “지옥불”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우리는 종교로서 그 이름 밖에 몰랐다.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종교에 대하여는 어머니께 맡겨 버렸다. 우리가 주일 학교에 나가야 했을 때, 아버지께서 집에서 신문을 보시며 앉아 계시는 것을 나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나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일일 성서 낭독을 하셨다. 그 때 우리가 집 근처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다면 성서 낭독에 함께 참여해야 하였다.

그런데, 어느 겨울철 저녁, 그 때 나는 비록 어린 소년이었지만 내가 종교에 등을 돌리게 된 일이 발생했다. 여행하는 복음 전도사와 함께 특별 집회를 갖게 되어 있었는데, 그 때 그 집회를 위해 회관에 불을 피우는 일이 내 차례였다. 다름아닌 전도사 자신이 걸어 들어왔을 때 불은 이제 막 잘 타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내가 내려 앉아 무릎을 꿇고 “구원받기”를 원했다. 그는 “네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 어머니를 거짓말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렇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나를 가라고 했다. 그 때 이후로 종교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식어졌다.

출세를 위한 준비

1930년대 초에, 경제 불황이 초원지를 휩쓸게 되어 우리는 생계에 대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37년,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모든 젊은이들은 직업을 구하기 위하여 재난이 덜 심한 지방으로 떠나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는 ‘마니토바’로 향했다. 몇 개월 일한 후, 우리는 송금을 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 돈으로 나는, 내가 ‘사스카츠완’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등록금을 납부하고 하숙할 수 있었다. 교육 과정은 다양했으며 그 중에는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생물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옥불 종교에 대한 나의 경험 때문에 이 이론은 그럴싸 하게 생각되었다. 이 이론에 의심을 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즉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질문도 없는 이론상 맹목적 믿음이었다.

1938년 졸업 후, 나는 원자 물리학을 계속 전공할 것을 결정했다. 이제 우리 졸업생들은 재학생들을 위한 실험 강사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조금은 더 나아졌다. 나는 또, 암 진료소가 표면 암 치료의 목적으로 운영하는 대학교 내의 ‘라돈’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기술자로서의 나의 일은, 방사성 ‘가스’인 ‘라돈’을 뽑아내어 잘 제조된 금관에 저장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그것은 작은 “알갱이들”로 잘라지며, 의사는 그것을 암세포 주위로 투사한다. ‘라돈’으로부터의 방사선은 신체 조직에 심한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암조직을 공격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이든 사용에 필요한 강도를 결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라돈’이 일정률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방사성 물질 내의 이같은 설계와 질서의 증거는 나를 당황케 한 많은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진화론이 가르치는 것처럼, 단지 우연히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당시 나는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G. ‘헬즈베르그’(1971년 화학 부문 ‘노벨’ 수상자) 박사 밑에서 ‘실리콘’ 황화물(SiS) 분자의 원자간의 거리를 결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이 실험은 ‘실리콘’ 황화물의 흡수 ‘스펙트럼’ 파장을 측정하고 복잡한 수학 공식을 사용함으로써 행해졌다. 여기에서도 또한 질서와 설계의 증거를 볼 수 있었다. 정말 이것은 이 모든 것 배후에 어떤 과학자와 수학자가 계셔야만 하는 증거가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해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누가? 어떻게? 언제?

우리 졸업생 모두는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내가 미국에 있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과 ‘코르넬’ 대학교로부터 그 제공을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분 좋았겠는가! 그러나 세계 정세는 급속도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나는, 신문에 ‘원자가 분열되었다!’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 물리학 부문에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지를 기억한다. ‘헬즈베르그’ 박사가 흥분해서 “다음에 그것들이 무슨 일을 하지 않겠는가?” 하고 심한 우려를 표명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열기를 더해 갔을 때, 우리는 원자 분열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염려했다. 그 때 ‘캐나다’는 국경을 봉쇄했으며, 따라서 어떤 과학 졸업생도 본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터론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장학금을 신청하여 (1941년) 국립 연구원으로부터 그것을 지급받았다.

거기서 나는 물리학 박사 학위를 위한 교육 과정을 이수했으며, 동시에 군인들을 위해 기초 ‘레이다’에 대한 군속 강사로 그 학교에서 일했다. 1943년 이 과정이 끝났을 때, 이 강사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했었다. 즉 산업 분야에서 근무할 것인가, 아니면 ‘캐나다’의 취약 지구인 동해안에서 ‘레이다’ 기사로 해군에 입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나는 물리요법을 전공한 학생과 결혼을 했다. ‘그레이스’의 졸업반 대부분은 간호단에 입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함을 의미했으므로, 우리는 군 입대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항공 계기 회사의 실험 물리학자로 취직했다.

질문이 생기게 된 계기

우리 부부 중 어느 쪽도 종교심이 강한 것도 아니었는데(사실 나는 그 때 ‘그레이스’에게 진화론의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한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교회에 참석해 보았다. 매번 참석한 후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을 분석하곤 했는데, 성서가 말하는 교훈과 군징집을 옹호하는 설교는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교회도 택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단지 성경만 구입해서 우리 스스로 읽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서 어떤 부인이 내 아내를 방문해서 성서 몇 귀절을 읽어 주고 다시 찾아 오겠다고 하였다. 후에, ‘그레이스’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은 졸업 시험 준비하느라고 바쁘니 두 달 후에나 방문해 달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 참 잘했군. 십중 팔구 다시 오지 않을 거야”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그 부인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 때 우리 집에 손님이 있었기 때문에 이튿날 저녁에 방문해 달라고 약속했다.

남편과 함께 그 부인이 다시 왔을 때 우리는 꽤 불안스러웠다. 내가 한 처음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지옥에 대해 어떻게 믿으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서에서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 때 그들은 우리의 새 성서로 “지옥”이라고 번역된 성귀 몇 귀절을 보여 주었는데, 난외주에는 “혹 무덤”이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이것은 우리로 숙고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해서 ‘테이제’와 ‘엘시 후른벨드’와의 일련의 성서 토론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 그들은 이 전파 사업에 전 시간을 바치고 있었다. 몇번의 방문이 있은 뒤, 그들 여호와의 증인들은 ‘캐나다’에서 금지되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안되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 후, 나와 아내는 호별 방문으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그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 3개월 후인 1943년 8월 22일에 우리는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아마겟돈’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계시 16:14, 16) 그래서 우리는 ‘테이제’와 ‘엘시’가 하는 것처럼 전파 사업에 더 많은 시간을 바쳐야 되겠다고 느꼈다. 또한 내 직업 때문에 양심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직업은 그리스도인 중립과 일치한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나라[왕국, 신세]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 그 왕국을 전하고 있었다. (요한 18:36) 따라서 나는 전투기 장비를 생산하는 일에 협조함으로써 이 세상에 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사야 2:2-4) 한편, 물리학자가 되려고 여러 해를 연구에 바쳐 온 자신을 생각할 때, 과연 나는 그 일을 그만 둘 것인가? 심사숙고한 후, 1943년 11월에 나는 사퇴서를 제출했으며, 이제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함

그 때까지 나는 군복무에서 면제되어 왔었다. 그것은 내 직업이 전쟁 지원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면제는 취소되었으며 영장이 나왔다. 당국에 보낸 서한에서, 나는 계속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겠다는 나의 욕망을 밝혔으며, 그 이유로 징집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12월 25일에 그에 대한 해답이 왔는데, 그것은 여섯 명의 경찰관들이 들이 닥치는 형태로 온 것이다. 그 중 둘은 현관에 둘은 후문 그리고 나머지 둘은 우리가 살고 있던 집안으로 들어 왔다. 그 때 나는 어디 있었는가? 목욕탕에 있었다! 그것이 한 동안 나의 안락한 마지막 목욕이었다. 나는 체포되었으며 징집 불이행죄로 ‘터론토’ 교도소에서 한달 복역을 선고받았다. 후에 나는 군부대로 넘겨졌다.

이제 나는 시간을 내어 참으로 나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였다. “원자 물리학자—‘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장래 언젠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 나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시 83:18) 또한 평화와 의가 거하는 새 질서를 설립하실 그분의 목적도 알고 있었다. 더우기 우리는 그것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교도소 내에서의 그 한달 동안, 나는 성서 전체를 통독함으로써 시간을 현명하게 보냈다. 이것이 나의 결정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그러나 나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을 때 슬픔에 잠겼었다. 그 편지에는 “내 아들들 중 하나가 죄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고 씌여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갖고 계시지 않은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 아들아, 네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심지어 [수상] ‘마켄지킹’도 너의 정신을 바꾸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양 부모님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바와는 정반대였다!

교도소 내에서의 처음 며칠 동안에, 우리 감방에 있는 다른 수감자들이 나를 조롱했다. 그들은 도둑들, 마약 중독자 그리고 추잡한 주정꾼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 대중의 제일 원수 ‘맥키 맥도날드’도 있었는데, 그는 ‘위스키’를 실은 화물차를 강탈한 혐의로 공판을 대기하고 있었다. 타 수감자들이 나에게 공격을 퍼붓던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식들, 조용해! 우리 모두는 법을 어겼기 때문에 이곳에 와 있지만 이 동료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 후, 어느 누구도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형기를 마치자, 설득시킬 목적으로 나는 군부대로 넘겨졌다. 지휘관은 모든 서류에 서명했으며 이제 나는 서류상 군인이 되었다. 명령 불복종으로 나는 군법 회의에 송환됐다. 심리시, 나는 세명의 법관들 앞에서 내 입장을 변호할 충분한 기회를 부여 받았다. 그것은 나에게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가르치리라’ 하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새롭고 ‘드릴’있는 경험이었다. 성령이 나에게 요한 복음 17:16과 다니엘 2:44과 같은 적절한 성귀를 생각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12:11, 12) 심리가 끝난 뒤 한 판사는 나를 옆으로 데려 갔다. 그는 내가 왜 복무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나는 대학교 시절에 학군단을 거쳐 장교 임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가 군목으로 복무하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나의 거절에 대한 요지는 이것이었다. “총을 축복하는 자와 방아쇠를 당기는 자—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나이애가라’ 호수가에 위치한 군 수용소에서 6개월을 복역하도록 선고받았다.

이 수용소는 12개의 감방이 있는 한 채의 작은 막사로 되어 있고 큰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키가 작고 땅딸막하고 황소와 같은 우렁찬 목소리를 내는 담당 관리는 명백하게 우리에게 요구된 사항을 알려 주었다. 대화는 일체 있을 수 없고, 만사가 “빠른 속도”로 행해졌다. 우리는 손이 트고 물집이 생길 때까지 마루를 문질렀다. 그리고 나서 뙤약볕에서 등에 땀이 흠뻑 젖어 흘러 내리기까지 영내를 구보하였다. 만약 누가 처지면 경비원을 시켜 총대머리로 내리치게 하였다. 다음에 우리는 수통을 머리에 이고 구보를 하는데, 출렁거리는 냉수와 더불어 영내를 빙빙 도는 것이다. 이것이 일과였다.

이 수용소에 증인들 세명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얼마 후 한 사람이 군에 입대키로 결정했다. 그가 석방을 기다리는 동안, 나를 설득, 같은 길을 따르게 할 목적으로 그에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얻게 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증인들과 연합하기로 결심했다.

수용소 내에서의 살벌한 분위기하에서는 한 시간이 하루처럼 지루했다. 그러나 드디어 출소일이 되어 나는 군부대로 되돌아 갔다. 똑같은 절차가 반복되었으며 곧 나는 제2 군법 회의에 회부되는 통지를 받았다.

이번 형기도 역시 6개월이었지만 이번엔 ‘온타리오’ 북쪽의 ‘벌와쉬’에 있는 민간 수용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으로 이송되던 그 여행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나는 포승줄로 묶인 일행 중에 끼어 양손에 수갑을 차고 게다가 전원을 굵은 포승으로 함께 묶었었다. 우리가 ‘터론토’ 도심가를 지나 철로를 따라 역까지 걸어가서 기차에 몸을 실을 때까지 아직도 우리는 함께 꽁꽁 묶여 있었다. 이 꼴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주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일행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벌와쉬’에서의 생활은 군 수용소 생활보다 더 나았다. 우리는 밖에서 작업을 했으며, 나무를 베어서 1944년 겨울 동안 그것들을 눈위로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저녁에 우리는 독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상당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약 5개월이 지난 후 나는 불명예 제대로 출감하게 되었다. 나는 ‘펄헴스’(PULHEMS) 건강 진단 결과 결격자로 분류되었다. 진단 방법은 글자마다 인체의 각 부분을 대표하는데 (U—상지(上肢) 등등), 따라서 어떤 글자 밑에든 “8“이란 수자를 받으면 그는 제거당한다. 나는 “S”(지각력을 대표) 문자 아래 “8“을 받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정신 이상자로 간주된 것이다.

질문이 순조롭게 풀리다

그처럼 정신 이상자로 간주되었지만 나는 ‘왙취타워’ 협회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레이스’는 이미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인쇄기의 작동은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즐거웠고, 동료 신자들로 구성된 훌륭한 집단과 함께 일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4년 후인 1944년 6월에 금지령이 해제되었고 ‘터론토’에 소재한 협회 사무실은 다시 문을 열어 이내 왕국 전파 사업을 공개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45년 12월에 우리는 ‘밴쿠우버’에 있는 협회 간행물 취급소에서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2년 후, 우리는 아름다운 ‘플라서 밸리’에서 회중들을 방문하는 순회 사업에 참여했다. 고무적인 이 사업에 참여한지 1년 후, 우리는 선교인으로서 훈련받는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초대되는 ‘드릴’을 맛보았다. 이것은 미소한 원자에 나타나 있는 “다이나믹 에너지”의 근원이신 그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강화시켜 주었던가! (이사야 40:26) 이내 졸업날이 왔고 시간은 흘러 가서 우리는 외국 임명지로 향할 짐을 꾸리고 있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처분하면서 나는 ‘헬즈베르그’ 박사가 지은 원자와 분자 구조에 관한 두권의 책에 대해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것들은 나의 연구에 기초가 되어 온 책들이었지만 결국 남기고 떠났다. 이제 나에게 제기되었던 그 질문이 결정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1949년 12월 29일에 우리는 우리의 임명지인 ‘칠레’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처음에 ‘스페인’어가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들과의 생산적인 연구로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고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에 성경을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다정한 일부 ‘칠레’인들이 우리의 영적 형제 자매들이 되었다. 그들의 진리에 대한 열심과 열정을 보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는가! 왕국 전파 사업은 더 많은 선교인들이 우리와 연합하게 됨으로써 순조롭게 발전되었으며, 이 나라 곳곳에 회중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의 새로운 천직은 실로 보람있는 일이었다!

수년이 지나 새로운 봉사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산티아고’에 있는 확장되는 협회 지부 사무실을 도우면서, 천국 전도 학교 강사로서 일했으며 전파 사업의 연합을 돕기 위하여 이웃 아홉 나라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방문하였다. 이같은 나라들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증가됨으로 여호와의 축복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1969년 4월에 우리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우리는 ‘브라질’, ‘상 파울루’에 있는 지부로 임명되었다. 그렇다. 새로운 언어인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19년 이상 ‘칠레’에서 여호와의 백성들이 200명에서 6,000명으로 증가되는 것을 본 후 이곳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이들 중에는 우리의 영적 자녀들 및 손자녀들도 있었고 수년 동안 함께 일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좌우명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6:8) 이제 우리는 섭섭한 마음을 가누면서, 그러나 앞으로 길이 기억에 남을 행복한 추억거리들을 가지고 그들 모두에게 “하스타 루에고”라고 말했다.

‘브라질’에서는 이미 55,000명이 열심히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 사업은 많은 사람들이 영매술에 의지하고 있는 이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년 수천명이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볼 때, 이 곳에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자진적인 동일한 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 현재 ‘브라질’에는 2,012개의 회중에 106,000명 이상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다. ‘상 파울루’에서 이 회중들의 필요를 돌보는 ‘벧엘’ 가족들은 40명에서 155명으로 증가했다. 5년 전에 우리는 ‘포르투갈’어로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인쇄하기 위한 새로운 공장을 봉헌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지금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여 새로운 ‘벧엘’ 집과 공장을 포함한 건축 계획을 다시 추진중에 있다. 이번엔 ‘상파울루’에서 1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여호와의 경이로운 창조물 가운데 자리잡은 한 안락한 곳에 세울 계획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아직도 얼마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이 증가될 것인지는 여호와 만이 알고 계시다.

이제 나는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 즉 “원자 물리학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원자 물리학이 대단한 흥미있고 몰두케 하는 학문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원자들을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위대하신 과학자이자 수학자를 알게 된 것을 어찌 후회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애 대부분을 바쳐 그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한 것을 어떻게 후회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 헌신한 세계적인 영적 가족의 한 성원이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결코, 후회는 없다. 나는 고대 ‘아삽’과 같이 동일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8.

[21면 프레드 윌슨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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