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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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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8
파78 1/15 21-24면

여류 취재 기자가 최상의 소식을 발견하다

‘보라 C. 하난’기

1975년에 나는 미망인이 된 올캐의 배려로 50회 동창회에 참석하려고 미국 ‘웰레슬리’ 대학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보스톤’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는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50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수십명의 동창생들은 많이 변하였다.

‘지난 50년 동안 무엇을 하였니? 어떻게 생활해 왔니?’ 우리는 서로 호기심을 느꼈다. 여러 동창생들이 생활해 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왔다.

나는 어느 동창들처럼 많은 재물을 모으지도 않았다. 오십년 동안 나는 내노라 할만큼 탁월한 지위나 세상적인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동기생들의 말을 들어 본 후 나는 다른 어떤 친구보다도 더 흥미있고 행복하고 더 보상이 풍부한 생활을 해 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단순히 내가 여러 해 동안 신문기자로 생활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학구적인 면과 종교적인 배경

나는 여덟살 때부터 지식을 몹시 얻고 싶어하였다. 나는 책을 침대에 숨겨 두었다가 내가 잠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에 책을 읽곤 하였다. 같은 나이에 나는 ‘바이올린’ 연주도 시작하였다. 부모들이 나를 격려해 주셨다. 아버지는 나의 침실에다 ‘하아버드’ 고전집이 꽂힌 약 2‘미터’ 높이의 책꽂이를 놓아 주셨다. 나는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온 수십권의 책들과 함께 이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나의 양친은 매우 종교적인 분들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조합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에 우리는 자가용으로 ‘드라이브’도 하지 않았으며 일요일에 나오는 만화 잡지도 읽을 수 없었다. 모든 즐거움은 평일에 즐기도록 제한되었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종교에 환멸을 느껴 처녀 시절에 다니던 감독 교회에 다시 나가시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성경 연구」라는 책을 읽게 되셨고, 성서의 예언대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셨다.—마태 24장; 누가 21장; 디모데 후 3:1-5.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따르지 않았다. 나는 다른 책은 모두 읽었지만 어머니가 가진 그 책들은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반응은 “만약 세상의 종말이 곧 온다면 나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가도록 강권하셨다. 그리하여 17세 되었을 때 나는 ‘웰레슬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신입생들에게 성서 역사가 필수 과목으로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야훼’라는 것을 알고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나는 배우는 내용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창세기」의 처음 여러 장은 세 사람의 다른 필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려는 나의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으며 나는 어머니에게 나의 고민을 알렸다.

처음 방학중에 나를 만난 조합 교회 교직자는 거침없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보라’양, 성서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돼요.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으로서 각자는 자기가 사물을 본대로 기록한 것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견해 때문에 나는 기성종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으로 돌아온 후 지식을 얻는 것이 나의 종교가 되었다.

직업

대학을 졸업한 후에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 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선생으로 일하던 첫해에 나는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학교 관현악단을 지도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았다. 그리하여 직장을 잃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등 음악에 몰두하였다.

어머니가 보시는 성서 서적에 관한 한 나는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성서만을 읽었다. 나는 ‘웰레슬리’ 대학 시절에 한번 상처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에 또 다시 환멸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1930년에 나는 신문 기자가 되었는데 그 해 여름 동안이나 그 일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아주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세 신문사와 그리고 연합통신(AP)과도 자유 계약을 맺었다. 그것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또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가르치는 일도 하였다. 그 결과 대공황시에도 나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신문 기자 생활에서 얻은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나는 세상 일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레슬링’ 시합에서 시간 기록 계원 옆에 앉아 있으면 그는 시합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각 경기의 결과를 나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흥분된 관중들 앞에서 전개되는 각 경기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정치나 사회 혹은 종교적 모임에도 위선이 있었다. 장황한 연설들을 들으면서 나는 제도의 약점이나 잘못을 무심코 드러내는 말들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사에서 강조하였다. 나는 누군가 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것이란 생각에서 그러한 잘못에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을 읽기는 좋아하지만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모두가 남의 험담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개조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더 좋은 소식의 보도자

나는 성서를 계속 읽었으며 시간이 흘러가면서 어머니의 신앙이 성서적으로 건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1933년 4월의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 대한 호의로써 어머니를 차로 ‘보스톤’의 침례 연설장까지 모셔다 드렸다. ‘발코니’에 앉아 있을 때 “자, 항상 나는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를 원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엇인가가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침례를 받도록 내 자신을 제공하라고 충동질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의외의 일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물론 몹시 기뻐하셨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제공하는 출판물을 읽는 것이 성서 지식을 얻는 지름길임을 인식하고 나의 어리석은 편견을 버렸다. 독서에 대한 나의 강렬한 욕구에 따라 나는 접할 수 있는 책과 잡지를 탐독하였다.

‘뉴우베리포오트’에서 혼자 증인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유명한 기자로 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어떤 ‘아일랜드’계 경찰관들은 신문 기사거리를 제공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경찰서에 들어가면 그들은 여호와를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여호와의 증인’의 특별 봉사자인 ‘로버어트 하난’이 ‘하버힐’에서 증거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가장 가까운 회중이 있었다. 얼마 후에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고 나는 그와 함께 전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점차 신문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나도 역시 성서 진리의 전 시간 전파자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 계속 근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전국 대회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편집자에게 대회 참석을 위해서 며칠간 쉬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증인 생활과 기자 생활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나도 그 점에 동의했다. 그는 내가 종교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나는 신문사를 그만 두었으며 1941년 9월 15일에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결국 종군기자가 되는 일을 시기에 적절하게 피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을 때 남편과 나는 ‘매사추세츠’ ‘월폴’에서 특별 ‘파오이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이제 나는 만나는 사람들이 생활을 개선할 수 있도록 실제로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신문을 통해서 그랬던 것처럼 불공평한 사례들을 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소식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로운 왕국 정부를 통해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

그 후 1943년에 선교인들을 위한 ‘길르앗’ 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학교에 가기를 참으로 원하였다. 우리는 1945년 2월에 시작되는 제 5기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선교 임명지는 ‘칠레’였으며 우리는 1946년말에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온 종일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더 가서 ‘칠레’에서 세번째로 큰 ‘콘셉시온’이란 도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를 동반한 네명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기자 생활이 도움이 되다

얼마 동안의 생활은 나에게 너무나 힘겨운 것이었다. 두번째 달에는 말을 죽게 할 수 있는 옹이 생기게 하는 파리에 물려 한달 동안 유황 치료를 받아야 하였다. 다음 달에는 약화된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열이 높아 그 후 두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첫째로 나는 청력을 상실하였으며 그 다음에 머리가 빠졌다. 가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되었다.

병상에서 두달을 더 지낸 후 나는 전파 활동을 시작하려고 생각하였다. 청력을 상실했고 새로운 언어로 사상을 전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기자로서 나는 항상 기사 취재를 위해 난관을 극복했던 사실을 상기하였다. 이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첫째로 어머니는 내 머리가 자랄 때까지 머리 빠진 것을 가릴 수 있도록 가발을 보내 주셨다. 가발을 사용하니 외모는 괜찮았다. 청력을 상실한 것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이 주된 문제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칠레’인들은 명목상의 ‘가톨릭’교인이었다. 나는 책 가방에 잘 맞는 얇은 ‘가톨릭’ 신약 성서를 사용하였으며 몇개의 적절한 성귀를 익혔다. 신문 기자는 질문을 사용한다. 신문 기자는 결코 연설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하였다.

성서 귀절에 나오는 낱말들을 사용하여 나는 적절한 질문을 만들었다. 내가 집주인의 답을 듣지 못할지라도 나는 항상 성서에 들어 있는 흥미있는 점을 사용하여 최근의 신문에 보도된 소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성서를 신문기사와 연관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가 살아있는 책임을 느끼게 하였다. 내가 그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질문의 주제와 관련이 없는 성귀를 보여 주어도 내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해를 해 주었다.

생활을 변화시키는 소식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의 청력은 약간 회복되었으며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게 되었다. 맨 먼저 성서 연구를 하게 된 사람 중에는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을 버린 그 아내는 원래의 결혼을 해소시키지 않았다. 자기의 아내가 중혼죄를 범한 것이 들어나기를 원치 않았지만 이제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도덕적으로 깨끗한 입장에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남자는 그의 아내를 서서히 설득시켜 이혼 수속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남자는 자기와 함께 생활해온 여자와 법적으로 성경적으로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그의 새로운 아내 그리고 그들의 세 자녀 모두가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그 후 그 자녀들 중 둘이 한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하였고 그 남자는 주임 감독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교 활동에는 생활을 변화시키는 면도 포함된다.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 위에 여호와의 영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1950년에는 여호와를 섬기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콘셉시온’의 강건너 쪽에 있는 아름다운 ‘산페드로’호에서 연속적으로 침례를 베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편과 나는 ‘콘셉시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외딴 지역에도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고기나 게 그리고 신선한 빵이 든 바구니들이 많이 실려 있는 3등 기차를 타고 광산촌이나 어촌 혹은 직물을 생산하는 촌락을 방문하였다. 우리의 전파는 후에 여러 회중이 생기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콘셉시온’에서는 많은 선교인이 한동안 활동하다가 떠났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그 구역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을 뿐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회중의 부모로 불리우게 되었다. 우리가 계속 그곳에 있는 것이 눈에 띄게 안정성을 주었다.

새로운 회중들이 형성되자 나와 남편의 구역은 더 제한되었다. ‘콘셉시온’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강을 건너 ‘산페드로’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도시 변두리에서 나는 여섯 자녀들과 함께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부인을 만났다. 술고래인 그 여자의 남편은 그 여자를 버리고 여러 해 전에 ‘산티아고’로 가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이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산티아고’로 오겠다면 자녀들의 부양을 위해서 돈을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결국 남편과 결합하였고 그 남편은 자기 아내를 그리스도인 집회에 함께 동반하기 시작하였다. 오랫 동안의 투쟁 끝에 결국 그가 ‘알코홀’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좋은 소식이 또 하나의 훌륭한 변화를 일으킨 예이다. 분열되고 불행하였던 가족이 함께 하게 되었고 연합해서 행복하게 참 숭배를 드리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에 그처럼 훌륭한 영향을 주는 소식을 전하는 것은 신문기자로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최상의 소식을 배우도록 나로부터 직접 도움을 받은 문자 그대로 수백명의 생활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 그 소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의 왕국 정부가 멀지 않아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원인을 제거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대학 졸업 후 50년 이상을 지내는 동안 대학 동창생 중 많은 사람들처럼 내노라 할만큼 많은 재산이나 세상적인 명성을 얻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적인 종이 되도록 돕는 데서 오는 만족감인 것이다.

[21면 보라 C. 하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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