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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94 5/1 12-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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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
  • 깨어라!—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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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4
깨94 5/1 12-15면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

때는 1944년 9월, 세상이 온통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은 치열하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었다. 나는 독일군으로서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한번은 총살대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총살을 집행하려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들은 단지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상황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살아 남았다. 몇 주 후에 동일한 과정을 거쳤다. 나는 살아 남았지만, 수십 명의 동료 포로는 처형당하거나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내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생포됨

이런 일이 있기 몇 달 전인 1944년 6월, 연합군은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 해안에 성공적으로 교두보를 확보했다. 잇달아 공격하여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에 진입하자 독일군은 후퇴하였다. 나는 독일 공군 주임 상사였다. 8월에 우리 중대원의 일부인 16명과 함께 마키단(團)으로 알려진 프랑스 지하 운동 단체에 생포되었다. 한 포로 수용소에 몇 달간 수용된 후에 우리는 프랑스 남부 몽뤼송 근처의 다른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포로들은 육체 노동을 하도록 강요당하였지만 나는 하사관이었으므로 면제받았다. 그러나 일할 것을 자원하여 주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루는 일단의 포로가 새로 도착하였는데, 그 가운데 같은 고향 출신인 빌리 후페르츠라는 청년이 있었다. 담당 장교에게 빌리가 주방에서 나를 도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허락해 주었다.

후에 빌리와 나는 모든 사람을 평화롭게 결속할 수 있는 그런 벗 관계를 누리게 되었다. 평화에 관한 이런 길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삶의 모순으로 괴로워했던 일에 대해 말하겠다.

분열과 증오가 왜 이토록 극심한가?

나는 독일의 아헨에서 성장한 젊은이로서 종교적 분열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종교적 분열은 우리 집안에도 있었다. 아버지는 루터교인이었지만,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교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누이와 나를 가톨릭교 믿음 안에서 교육받게 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가톨릭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지만, 아버지가 다른 믿음을 따르는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면 종교가 이토록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종종 궁금하게 여겼다.

1939년에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독일 공군에 징집되었다. 독일에서 예비 훈련을 마친 후, 오스트리아의 빈에 배치되어, 그 곳 신병 교육대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41년 12월에 홀란드(지금의 네덜란드) 북부에 배치되었다. 그 곳에서 덴헬더 출신의 젊은 여자 얀티나를 만났다. 우리들의 두 나라는 적대국이었지만,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1942년 4월에 프랑스 남부의 라로셸로 갑자기 전속되었다. 그 무렵 나는 주임 상사 계급을 달았으며, 우리 대대는 신병을 훈련시키고 그 지역 활주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 결과 전쟁 기간 내내 한번도 전투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결코 어느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 점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전쟁 중에 사실상 모든 종파—가톨릭교, 루터교, 감독 교회 등—의 교직자가 전투기와 그 대원들이 살상용 적재물을 떨어뜨릴 임무를 띠고 출격하기 전에 그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보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하느님은 누구 편일까?’ 하고 종종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코 군목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전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착용했던 벨트의 버클에는 고트 미트 운스(하느님이 함께 하시다)라는 문구가 새겨(참조 12면 좌측 상단) 있었다. 하지만,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상대편 군인들에게는 함께 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했다.

여러 해가 지나고,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나는 얀티나를 보러 가끔 홀란드에 갈 수 있었으며, 생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1943년 12월에 우리는 약혼하였다. 1944년에 전세가 바뀌기 시작하여,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독일이 전쟁에 패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무렵 8월에 우리 17명이 생포된 것이다.

수용 생활

몽뤼송 근처 수용소에 있는 우리 포로들에게 마침내 가족에게 편지 쓰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얀티나와 다시 접촉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몇몇 다른 포로와 함께 집단 농장에서 일할 것을 자원하였는데, 우리는 그 곳에서도 여전히 포로 취급을 당하였다. 농장 생활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생활 방식의 커다란 변화였다.

1945년 5월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지만, 프랑스 정부는 1947년 12월까지 우리를 포로로 잡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할 것인지 아니면 1948년 말까지 자원 노동자로 프랑스에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나는 후자를 택하였으며, 몇몇 다른 포로들과 함께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이 마련으로, 우리는 포로로 농장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감금되어 있었고 제약을 받았다. 그러므로 가족에게 편지를 받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얀티나와 재회하다

1947년 어느 날, 얀티나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무심결에 몇 개의 주소와 책이나 잡지 이름을 적은, 인쇄된 쪽지를 끼워 보냈다. 나는 ‘이런, 얀티나가 책을 팔러 다니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가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과 이미 접촉해 왔고 그 무렵에는 호별 방문 전파에 적극 참여하여 성서 서적을 배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1947년 12월에 우리 포로들에게 놀랍게도 매우 기쁜 일이 있었다. 고향을 방문하도록 4주간의 귀휴(歸休)를 받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노동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허락되었다. 얀티나는 그 기간을 내 부모와 나와 함께 보내기 위해 홀란드에서 독일까지 여행하였다. 상상할 수 있듯이, 헤어진 지 4년이 넘었으므로 우리의 재회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얀티나의 편지에 들어 있던 그 인쇄된 쪽지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얀티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고는, 배워 알게 된 놀라운 것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였다.

그가 하는 말이 진리처럼 들리긴 했지만, 나로서는 가톨릭교인으로 지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종교를 연구한 사제들보다 어떻게 얀티나가 더 많이 알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더욱 곤란하게도 나의 가족은 얀티나의 새로운 신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매우 반대하였고 가족의 편견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생의 전환점

4주간의 휴가가 끝나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옷가지를 꺼내다가 그 가운데서 「구출」(Deliverance)이라는 책을 발견하였다. 얀티나가 내 옷 가방을 꾸리면서 그 책을 넣어 준 것이다. 얀티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 날 저녁 앉아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얼마 안 읽어, 수용 생활을 하면서 생각해 오던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을 다 읽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얀티나가 인용했던,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구가 떠올랐다. (요한 8:32) 실로, 많은 문제에 대한 진리를 알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한 가족이다. (사도 17:26-28) 참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그토록 많은 사람과는 달리, 어느 누구와도 싸우거나 죽이지 않는다. (요한 13:34, 35; 요한 1서 3:10-12) 그러므로 분명히 국가주의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참다운 형제 관계를 해치는 마귀의 도구다.

참다운 평화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용할 때만 올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라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정부를 통해서만 평화를 기대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마태 6:9, 10)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되자 벌써 진정한 자유와 만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랑스런 얀티나가 옷 가방에 그 책을 넣어 준 것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영적으로 진보함

그런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며칠 후에 뤼시앙이라는 남자가 내가 일하는 농장에 와서 자신을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자라고 소개하였다. 나의 약혼녀의 부탁으로 파리에 있는 증인의 지부에서 그에게 나를 만나 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뤼시앙은 친절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으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곧 편안해졌다. 다행히도 그 무렵 나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했으며,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와 성서 연구하는 것에 동의하자, 뤼시앙과 그의 아내 시몬은 일요일마다 농장에 들러 나를 태우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연구를 하였다. 연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산책하면서 여호와의 놀라운 창조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부부는 모두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으며, 내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진정한 우정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그것도 프랑스인 부부가 말이다. 나는 프랑스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려 그들을 죽이려고 사람들을 훈련시켰는데!

나는 연구에서 잘 발전하였으며, 뤼시앙의 초대를 받고 1948년 3월 25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례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간단하지만 진지한 이 모임에 매우 감명받았으며, 그 때 이래로 그 기념식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얀티나는 나의 영적 발전을 대단히 기뻐했으므로, 프랑스에서 나와 합류하였다. 1948년 11월에 우리는 프랑스에서 결혼하였다. 뤼시앙과 시몬이 우리를 위해 멋진 결혼 식사를 제공해 주었고, 두 명의 파이오니아(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가 이 행복한 순간을 우리와 함께 했다. 그 잊을 수 없는 저녁에, 증인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제자를 식별하게 해주는 그런 사랑을 실천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요한 13:35.

독일로, 그 다음 새로운 나라로

1948년 12월 우리는 독일로 돌아왔으며,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가 우리의 생활의 길이 되었다. 가족에게 계속 반대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인류가 참다운 평화와 안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배우도록 계속 도왔다.

1955년에 우리 부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였다. 우리는 처음에 거대한 본토 남단에서 배스 해협 건너에 있는 아름다운 섬 태즈메이니아 주(州)에 정착하였다. 그 곳에 있는 영적 형제 자매들의 사랑스런 도움과 인내로, 마침내 우리는 알고 있는 언어 외에 영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태즈메이니아에서 13년을 보낸 후, 1969년에 우리는 북부의 퀸즐랜드 주로 이사하여 지금까지 그 곳에 살고 있다. 나는 지금 이 곳 지방 회중에서 그리스도인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아내의 내조를 소중히 여기면서 함께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휴가차 독일에 갈 때면, 우리는 빌리 후페르츠를 방문하여 그와 성서 연구를 하였다. 마침내 그도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헌신하였으며,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평화롭게 결속할 수 있는 그런 벗 관계를 즐기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포로로 지내던 그 여러 해 이후의 내 생활을 뒤돌아볼 때, 인자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어 참으로 감사한다. 얀티나가 솔선해서, 그 「구출」 책을 옷 가방에 넣어 준 다음 프랑스의 증인들에게 편지하여 나를 만나도록 주선해 주었기에, 지금 나는 매우 큰 행복을 맛보고 있다! 그로 인해, 내 개인 생활과 우리 부부 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여러 모로 상을 받았다.—한스 랑의 체험담.

[15면 삽화]

최근에 얀티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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