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묻는다 ···
나는 왜 이처럼 외로움을 느낄까?
토요일 밤, 이 소년은 제 방에 틀어 박혀, 공놀이를 하러 간 학교 친구들을 생각하고 있다. 진작 용기를 내어 자기도 좀 끼어 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바로 지금도 아이들이 몰려가며 조롱하는 듯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다.
“난 주말이 싫어!”라고 이 소년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방 안엔 대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소년은 아무 잡지나 하나 집어 들고 해변에 있는 일단의 청소년 사진을 바라보다가, 잡지를 그만 벽에 내동댕이쳐 버린다. 글썽글썽 맺히는 눈물.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 길이 없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흐느껴 운다. “나는 왜 노상 따돌림만 받는단 말인가?”
독자도 이같이—이 세상에서 단절되고, 아무 쓸모도 없는 듯, 그저 공허한 기분일 때가 있는가? 독자는 ‘나는 왜 이처럼 외로움을 느낄까? 외로움이 그토록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 한 일이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절망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에 십대란 험한 시절이다. 길을 잃은 불확실한 처지라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기에, 바로 십대에 흔히 외로움의 상처가 가장 심한 법이다.
외로움이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명적인 질병도 아니다. 한 전문가는 외로움을, 흔한 감기 즉 “걸리기 쉽고, ··· 치명적인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늘 유쾌하지 않은” 감기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극복해 낼 몇 가지 방안이 있다.
외로움의 정체
간단히 말하면, 외로움이란 일종의 경고 신호이다. 시장기는 식사의 필요성을 경고해 준다. 그렇듯, 외로움은 벗관계, 가까운 관계, 친밀한 관계의 필요성을 경고해 준다. 신체가 건강하려면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기분이 좋으려면 벗이 필요하다.
당신은 새빨갛게 타고 있는 조개탄 무더기를 본 적이 있는가? 그 타는 무더기 속에서 조개탄 하나를 꺼내 보면 어떻게 되는가? 그 조개탄의 열기는 차츰 식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조개탄을 무더기 속으로 도로 넣으면 그것은 다시 빨갛게 타오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은 오랫동안 고립되어 지내면 “타오를” 수가 없다. 즉 건강할 수가 없다. 벗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경우는 첫 사람 아담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되는 주위 환경 속에서 지냈다. 먹을 음식이 풍부했으며, 신선한 공기, 뛰어 들어 목욕할 맑은 강물, 흥미 넘치는 일들 및 무엇보다도 창조주와 친밀한 관계를 즐기는 기쁨 등을 만끽하였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속, 신세]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 아담은 의사 소통을 하며 감정을 교류할, 그 자신과 같은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와를 마련해 주심으로써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다. (창세 2:18-23, 현대인의 성경) 그렇다. 벗의 필요성은 우리의 체질 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있을 때면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기 마련이라는 뜻인가?
혼자서도 외롭지 않음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고독만큼 벗 삼기에 좋은 벗을 본 일이 결코 없다”라고 쓴 바 있다. 당신도 이 말에 동의하는가? “예,”라며 20세된 빌은 이렇게 말한다. “난 자연을 좋아합니다. 이따금 작은 보트를 타고 호수 위를 저어 가지요. 그리고서 여러 시간 홀로 앉아 있곤 해요. 그러면, 인생에서 내가 하고 있는 바를 곰곰이 되새겨 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답니다. 그건 참으로 멋진 일이죠.” 16세된 래피얼은 이렇게 부언한다. “우리 집엔 나 말고 아이가 셋이나 됩니다. 그러니 집안에 소동이 그칠 날이 없지요. 네살짜리 남동생이 있는데, 너무 야단 법석을 떨어댑니다. 정말이지 혼자 있고 싶은 때가 많아요.”
더우기, 한 영국 시인은 이렇게 촌평을 달았다. “고독은 하나님의 알현실(謁見室)이다.” 21세의 스티븐은 이렇게 동감을 표한다. “나는 큰 아파트 집에 사는데, 이따금 그저 혼자 있고파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곤 합니다. 거기서 뭔가를 생각하거나 기도를 하지요. 그러면 마음이 자못 상쾌해 집니다.” 그렇다. 잘만 활용하면 고독의 순간들은 우리에게 깊은 만족감을 준다. 예수께서도 그런 기회를 즐기셨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고 계셨읍니다.” (마가 1:35, 새번역) 그러면, 소로나 예수 같은 분이 홀로 있을 때에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원해서 홀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그들은 오직 짧은 시간만 홀로 지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잠시라도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계속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장기간의 고립은 외로움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성서는 이런 경고를 한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언 18:1.
일시적인 외로움
그렇지만, 때때로 원치 않는데도 홀로 있어야만 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실로 괴로울 수 있다. 친한 친구들을 멀리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온 경우처럼, 종종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그런 외로움에 처해질 수 있다.
스티븐은 이렇게 회상한다. “이전 고향에서 제임스와 나는 형제간 이상으로 친한 친구였읍니다. 이사올 때 그 친구를 못 잊으리라는 걸 알았지요.” 스티븐은 작별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한 양 잠시 멈추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해야만 했을 때, 나는 목이 메었어요. 우린 부둥켜 안았고, 나는 떠나오고 말았지요. 몹시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읍니다.”
스티븐은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참 힘겨운 일이었읍니다. 새 일을 익히는 데 무척 힘들었지요. 이전 고향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좋아했는데, 여기서 새로 일하게 된 동료들 중 더러는 마치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양 자격지심을 갖게 했어요. 나는 자꾸 시계를 보면서 4시간을 거꾸로 세어가(이전 고향과 4시간 시차가 났기 때문) 이 때쯤엔 제임스와 내가 뭘 하고 있었을 것인가 이리저리 생각해 보곤 했읍니다. 난 외로움을 느꼈지요.”
현재 상황이 잘 풀려 나가지 않을 성 싶으면, 우리는 종종 과거에 누렸던 더 나은 시절을 그리곤 한다. 하지만,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전도 7:10) 왜 이런 충고를 하였는가?
한 가지 이유는, 주위 상황이란 더 나은 쪽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종종 “일시적 외로움”이란 말을 쓴다. 이런 식으로 스티븐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했다. 어떻게? “마음을 써 주는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털어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누구나 과거에만 집착하여 살 순 없잖아요. 난 일부러 다른 사람을 만나 관심을 먼저 보였지요. 그것이 주효했읍니다.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제임스는 어떠한가? “내가 잘못 생각했읍니다. 이사 갔다고 해서 우리의 돈독한 우정이 끝장나는 건 아니었는데. 요전에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요. 그 먼 거리에서 자그마치 1시간 15분간이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곤 했읍니다!”
열 세살된 피터는 외로움이 야기될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편모 슬하에서 살고 있다. 피터는 이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내내 혼자 있어야 해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라곤 전혀 없어요. 엄마가 직장에서 돌아와도 좋을게 없어요. 엄마는 피곤해서 곧바로 골아 떨어지곤 하니까요.’
18세의 낸시도 역시 홀어버이 슬하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낸시는 낯선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낸시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조절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외로움이 사라졌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비극 때문에 외로와지기도 한다. 빌은 이렇게 말한다. “데릭은 나하고 열한 살 때부터 플로리다에서 함께 자란 죽마 고우였읍니다. 우린 함께 쇼핑 센터에도 가고 피자를 먹고 축구도 하곤 했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빌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어느 일요일 밤에 전화가 왔는데, 글쎄 데릭이 익사했다는 거예요.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후로 외로와질 때면 나는 무심코 데릭네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지요. 전화 신호가 계속 가는 걸 듣다가 ‘아차, 데릭은 이제 살아 있질 않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곤 했어요. 납득이 정말 안 가요. 17세라는 나이는, 죽기엔 너무 아까운 청춘이기에 말입니다.”
성서는 그와 흡사한 비극을 체험했던 나오미라는 여인에 대해 말한다. 그는 졸지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잇달아 잃고 말았다. 과부 신세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빈 손으로, 현대인의 성경]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이 완전히 사라질 수야 없겠지만, 외로움은 시간이 경과하고 새로운 연고 관계들이 형성됨에 따라 서서히 사라져 간다. 나오미의 경우에도, 변화된 주위 환경과 새로운 연고 관계가 맺어짐에 따라 ‘영혼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룻 4:13-15, 신세 참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데 전념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행복, 신세]이 있다.”—사도 20:35.
그러나, 그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만성 외로움을 겪게 될 수 있다. 만성 외로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본지의 앞으로 나올 기사에서 대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