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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7 5/1 11-14면
  • 마침내 찾은 정의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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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찾은 정의의 군대
  • 깨어라!—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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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7
깨87 5/1 11-14면

마침내 찾은 정의의 군대

때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이었다. 독일군으로서 연합군의 포로가 된 나는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점점 커져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굳혀 있었다. 그외엔 아무 것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바로 그런 탓에 13명의 동료와 나는 스페인령의 모로코 근처를 질주해 가던 호송 열차에서 뛰어 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심한 타박상을 입었을 뿐 놀랍게도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린 자유도 잠시 뿐이었다. 4일 후, 우리는 아라비아 사막의 기병 경찰에 생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자유에의 열망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올랐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온 몸의 타박상과 또다시 포로가 되는 굴욕 및 탈출욕을 꺾으려는 가혹한 처벌 이상의 것이라도 감수할 터였다.

수개월이 흘렀고, 우리는 카사블랑카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다시 탈출 계획을 꾸몄다. 이번에는 무진히 애를 써서 20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팠다. 석달 간이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역을 한 끝에 드디어 탈출하는 밤을 맞이했다. 다시금 우리 모두는 탈출에 성공하였다!

또다시 감질날 정도로 짧은 기간의 자유를 누렸을 뿐이었다. 불과 며칠 후, 또 붙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한달 동안 특수범 교도소에 격리된 채 혹심하게 가중된 노역을 치르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거기서 풀려 나와 일반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때 나이 겨우 19세였고, 당시의 체험들은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나는 정의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다고 자부했기에, 그 어떤 노고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가치있게 여겼다.

어린 시절의 훈련

나는 1925년 9월 북부 독일 브레멘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축구, 수영 및 빙상 스케이트 등의 선수였기에, 자라면서 스포츠에 열렬한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나는 독서도 즐겼다. 부모는 크리스마스 때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또는 기타 특별 행사 때만 교회에 나가곤 했다. 내가 교회에 다닐 적에는, 목사가 설교하는 동안 무척이나 많은 사람이 거의 내내 꾸벅꾸벅 졸기만 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좀더 자라면서, 나는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고 다른 나라에 관해 배우는 데 퍽 흥미를 느꼈다. 파푸아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넓은 해역인 토러스 해협에 관한 책을 읽은 기억이 문득 난다. 이처럼 호기심을 자아내는 지구상의 멀고 먼 지방에 매혹되어, 언젠가는 나도 그 머나먼 지역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어렴풋이 품어 보기도 하였다.

집에 있는 백과 사전에서 세계의 숱한 종교들과 그 모든 신들에 대해 읽어보기도 하였다. 때때로 이 모든 신들 중에 과연 참 신이 있을까 하는 의아심도 생겼다. 아버지는 「데어 스투르머」라는 신문을 우편으로 정기 구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신문 기사의 성서 인용문들에 여호와라는 생소한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는 그 이름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말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오딘, 토르 및 프리가 같은 고대의 많은 신들과 힌두교의 신인 시바, 비시누, 브라마 등에 관해 읽어 본 적이 있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전에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맛본 군대 생활

나치 치하에서 자란 나는 히틀러 청년 운동의 일원이 되었다. 1939년경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는 겨우 14세밖에 안 되었음에도 군사 훈련을 받았다. 때가 되자 공습은 일상사가 되었다. 한번은 한발의 소이탄이 우리집 지붕을 뚫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내 침대 곁에 떨어져 불이 났을 때 졸지에 잠을 깨고 말았다. 모래 주머니로 불을 껐기에 집은 건질 수가 있었다.

나는 1943년에 낙하산 부대에 입대하여 프랑스로 배치되어 훈련을 받았다. 기본 훈련을 마치고 이탈리아의 네투노와 안지오의 최일선으로 파견되었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는 볼로냐에서 6주간 입원 가료를 받았다. 나는 현역으로 복귀하였고, 그후 오래지 않아 급기야는 이탈리아의 시에나 근처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다.

13명의 동료와 내가 최초로 탈출 시도를 했던 때는 바로 프랑스령 모로코를 향해 열차로 호송되던 중이었다. 재차 포로가 된 후에 우리는 사하라 사막 인근의 하이아틀라스 산간에 있는 전쟁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진흙과 짚을 물로 이겨서 벽돌 만드는 법을 익혔다. 후에 우리는 카사블랑카 교도소로 이감되었는데, 우리가 땅굴을 파서 2차 탈출을 시도했던 곳이 바로 그 교도소였다.

프랑스 외인 부대

1945년, 종전이 되었지만 우리는 모로코에 포로로 계속 억류되어 있었다. 1947년에 프랑스로 호송되어 1948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석방된 후, 내가 최초로 한 일은 피레네 산간 지대에서 벌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1950년에는 반공 투쟁을 위해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하였다. 처음엔 알제리아의 시디벨아베스로, 나중엔 필립피로 파견되어 프랑스군 낙하 부대원으로 복무했다.

그 다음에는 인도차이나 전쟁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매복 부대를 만나 부상을 입었는데, 그 작전에서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나 외에 겨우 한명뿐이었다. 이번엔 하노이에서 6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회복된 후에 다시 배속되어 정글과 들에서 싸웠다. 낙하 부대원으로서 통틀어 20회의 낙하 기록을 세운 바있다.

마침내 황달에 걸려 몹시 위독해져서 군의는 내 생명이 가망이 없을 것으로 보기까지 했다.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현역에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명예 제대를 할 수 없는 터였다. 다행히도 장기 휴가를 하기로 되어 있어, 북 아프리카로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거기 가 있으면서, 나는 또 다른 탈출 계획을 세웠는데 이번은 나 혼자서였다. 탈출을 시도하면 100명 중 거의 99명은 다시 붙잡힌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용케도 포트리아우티로 빠져 나가 어느 독일 여객선을 탈 수 있었다. 일단 공해로 나가 독일을 향하게 되자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독일로 귀국하여 가족과 행복한 재회를 맛보았다. 실로 10년 만의 귀향이었다. 옛 동창이 내게 영국군 독일 부대에 입대하도록 주선해 주었고, 그것은 내가 몸담게 된 세번째 군대 생활이었다. 돈은 상당히 벌었지만 점차 군대 생활에 대해 염증이 늘어갔다.

새 나라에서 새 생활을

마침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선택하여, 1955년 6월 뉴사우스웨일스의 주도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서남쪽으로 약 480킬로미터 떨어진 스노우이 산맥에서 착공중인 대규모 수력 발전 관개 공사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이 힘들고 거친 직종일망정 보수는 좋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독일인과 기타 유럽 이주민들이 그 공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종전 후로 나는 종교에 관해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전쟁 중에 목격한 것들로 인해 종교에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선 들은 바가 전혀 없었으나, 증인이라고 밝힌 한 직장 동료가 제반 세계 상태의 구제책에 관해 종종 들려 주었고, 그가 말한 내용은 꽤 사리에 맞았다. 그렇지만, 그후 곧 그가 시드니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와의 접촉이 끊어졌다.

이즈음 나는 크리스타를 만나 결혼하였다. 아내에게 그 증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내 역시 듣고서는 좋아했다. 그래서 마침 시드니를 방문하는 길에 다시금 그와 연락을 취했다. 그 역시 독일인이었음에도 영어를 유창하게 읽고 말할 줄 알았으며 우리에게 영문판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을 주었다. 크리스타와 나는 영어를 아직 배우는 중이어서, 그 책 내용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으나 삽화들을 통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책의 독일어판도 구할 수 있다는 그 증인의 말을 듣고, 어느 비 오는 주말 우리는 워치 타워 협회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있는 스트래스필드로 서둘러 달려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 책의 독일어판을 입수해서 하룻밤 새에 완독해 버렸다. 우리는 다시 스트래스필드로 가서 그곳 왕국회관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모든 사람이 참으로 우정적이었고, 우리에게는 그것이 억지로 꾸민게 아닌 진실한 우정으로 보였다. 우리는 독일어로 된 기타 다른 서적들과 함께 「파수대」와 「깰 때이다」를 한 짐 가득 싣고서 그 집회를 떠났다.

신중을 기해 발을 내디디다

비록 우리가 배우는 내용이 듣기에 훌륭했지만, 아뭏든 서약하는 것 만큼은 신중을 기했다. 이런 태도는 다소 기성 종교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1936년에 어머니는 루터 교회를 떠났는데, 실제 행해지는 것을 보고 듣고는 실망을 느껴서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따금씩 내게 들려 주곤 했다.

그후 1943년 군에 입대하여, 의무적으로 교회에 나가 사제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그는 설령 우리가 전사한다 할지라도 곧바로 천당으로 가 과거의 모든 영웅들과 함께 지낼 것이라고 확언했다. 후에 참호에서 많은 병사가 호신용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한 동료 병사는 십자가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바로 내 옆에서 총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공포감이 가셔진 후,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대체 십자가는 이 친구에게 무슨 쓸모가 있었단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영국군 전쟁 포로들 역시 십자가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라면, 내게는 그리스도교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 서서 서로 죽이고 있지 않는가!

다음번 그 사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점에 관해 물어 보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전쟁이 진행중일 때에는 모두 자기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각자 자기 교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도 대단히 잘못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교회를 떠난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당연히 나는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성서에서 알려 주는 진리의 소식은 별개의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기성 종교의 위선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지구상에 왜 이토록 혼란과 소요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여호와가 누군지 알게 되어 매우 기뻤다. 그분은 내 아버지의 말대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참 하나님인 것이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올바른 신분에 관해서도 배웠다. 예수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아들이고,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보여 주시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대속물을 마련하시기 위해 예수를 이 땅으로 보내셨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 것이며, 더우기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정의의 군대에 입대!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우리의 주말 캠핑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단축해야 함을 깨달았다. 또 다른 문제는, 나는 지독한 골초였다. 16년간 하루 40 내지 60개비의 담배를 피웠고, 때론 엽권련이나 파이프 담배도 피워 왔었다. 이처럼 몸을 불결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임을 배웠을 때, 서슴없이 단 하룻만에 그 불결한 습관을 끊어 버렸다.

1963년 2월, 크리스타와 나는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물 침례로써 상징하였다. 그후 곧 우리는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봉사의 직무를 시작했고, 1965년 1월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이제 나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군대”의 한 군사가 된 것이다.

1967년에 우리는 파푸아뉴기니로 파견되어, 처음엔 포트모레스비에서 후에는 포펜데타에서 봉사를 하였다. 우리는 잠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 1970년에 다시 파푸아뉴기니로 돌아가 거기서 1981년 9월까지 봉사를 했다. 임명지 중 한 곳에서 우리는 두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울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다. 우리는 선외 발동기를 사용하여 커누를 타고 대부분의 장소를 여행했다. 3년 반 만에 침례받도록 우리가 도와준 사람은 29명이나 되었다.

우리 부부는 뇌성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했다. 나는 꼬박 48시간 동안이나 혼수 상태에 빠져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마침내 1981년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고, 이곳의 브리즈베인에서, 나중에는 북부 퀸즐랜드의 케언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계속하였다. 우리의 현 임명지는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의 최북단의 토러스 해협에 있는 서스데이 섬이란 곳이다. 그곳은 내가 아주 꼬마였던 시절에 읽어본 적이 있는 아득히 먼 곳—설마 거기에 가 있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던 바로 그곳인 것이다.

지난 23년간의 파이오니아 생활을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이 “군대”에 입대한 것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 그간 약 60명의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도울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은 즐겁기 그지없다. 우리는 전 시간 전도 봉사에서 크나큰 행복을 누리기에 다른 사람들도 이 축복된 사업에 참여하도록 늘 권장한다.

세 나라의 군대에 복무하면서 숱한 좌절을 겪고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하였지만,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의 한 군사로서 그분의 승리의 군대에 입대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항상 여호와께 감사한다. (디모데 후 2:3) 그렇다. 나는 마침내 정의의 군대를 찾았으며, 영원히 충성스러운 전사로서 계속 복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지그마 조스트마이어 체험담.

[12면 삽입]

한발의 소이탄이 우리집 지붕을 뚫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불이 났을 때 졸지에 잠을 깨고 말았다

[13면 삽입]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 서서 서로 죽이고 있지 않는가!

[11면 삽화]

프랑스 외인 부대에서 복무하던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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