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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나찌’ 독일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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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3 9/1 12-16면

나는 ‘나찌’ 독일에서 자랐다

내가 다섯살이었던 1935년의 어느 끔찍한 날, 나의 어린 소년 시절의 안전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윽고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심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러한 시편 필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나의 양친은 1920년대 이래 ‘비벨포르쉐르’(성서 연구생, 혹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히틀러’가 1933년에 권력을 잡았을 때, 나는 세살이었고 나의 누이 ‘헤르타’는 다섯살이었다. ‘히틀러’는 곧 ‘증인’들을 맹렬히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의 양친은 그의 정권이 실시하는 면밀한 주의를 피하지 못했다.

1935년에 다섯살된 내가 보기에 거대하고 험악하게 생긴 일단의 ‘게시타포’ 장교들이 우리 집으로 난입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아버지가 성서 연구생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집을 거칠게 수색하는 동안 조용히 거기에 서 있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다. 마침내, 그들은 아버지를 연행하였다. 나는 10년 동안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은 그것으로 우리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다. 2년 후에 한 남자와 한 여자 ‘게시타포’가 다시 찾아 왔다. ‘헤르타’와 나를 가리키면서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나의 어머니에게 “우리가 이 애들을 데려가겠오”라고 말하였다. 이유는? “당신은 그 애들을 기를 자격이 없기 때문이요.” 그들은 우리에게 부랑아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우리를 청소년 수용소로 데려갔다. 당신은 ‘게시타포’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우리를 지켜보는 우리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1943년까지—‘헤르타’와 떨어져서—그 수용소의 군사 훈련을 견뎌냈다. 그런 다음 나는 ‘알트마르크’ 지방의 한 조그만 도시 근처의 한 농장으로 보내졌다.

이 동안 줄곧 나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나의 양친은 나에게 하는 말을 조심하였으며, 아마 그것은 다섯살된 소년들이 그들이 무심결에 하는 말을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왜 내가 그들과 떨어져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왜 나를 책임맡은 농부가 나를 꾸짖으며 범죄자라고 나에게 호통을 치곤 하였는지, 혹은 왜 다른 어린이들이 나와 사귀려하지 않곤 하였는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교육 제도는 내가 특수 학교에서 매주 몇 시간 동안 종교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나는 이것을 싫어하였다. 두번 출석한 후에, 나는 학교 당국에 “나는 더 이상 거기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내가 졸업증서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며 또한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다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속으로 나는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강제로 그런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심하였다. “좋다. 그들이 내가 종교를 배우기 원한다면, 나는 내 힘으로 성서를 읽겠다.” 그리고 이내 성서가 내가 그토록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 이유를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 궁금해하였다. 나는 복음서를 즐겨 읽었으며, 서서히 예수께서 심한 대우를 받으신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어린 마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분의 입장을 나의 입장과 비교하려고 하였다. ‘다소 비슷한 데가 있어. 마치 예수처럼, 나는 아무 뚜렷한 이유없이 나쁜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있으니까.’

마침내, 전쟁은 끝났다. 나는 즉시 집에 가기를 원하였고 여행 가방을 꾸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아침 일찍 떠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독일은 패배의 잿더미였다. 지방은 쑥밭이 되었다.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도 철도도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으며, 주위에는 최근의 전투에서 남은 많은 무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마그데부르그’까지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마음 흐뭇한 암시를 받았다. 결국 나는 ‘그분의 날개 그늘에’ 거하고 있었다. 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날 한 낯선 여자가 나를 보호하라는 특별 허가장을 가지고 농부에게 왔다. 그 허가장은 임시로 관할하던 군 당국이 발행한 것이었다. 농부는 그것을 싫어하였다. 그는 나를 설득하여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이 미지의 사람과 함께 떠났다.

그 여자는 말과 마차를 가지고 왔으며,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 마차를 타고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그 여자가 사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얼마 동안 말없이 여행하였다. 그 여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나는 질문을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스’야, 나는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안단다. 나는 네가 어린 소년이었을 적을 기억하고 있지”라고 그 여자는 말하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그 여자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단다”라고 그는 계속 말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성서를 읽는다는 이유로 집단 수용소에 보내졌지.”

그 여자는 계속해서 아버지가 ‘여호와의 증인’이며 어머니 역시 ‘증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사실, 그 여자는 전쟁 중에 그 지역에서 비밀리에 ‘파이오니아’(전 시간 전파자)로 일해 오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나에 관해 이야기하였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 충실한 ‘증인’은 그 동안 줄곧 나를 뒤쫓아 왔다.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았지만, 나를 훌륭한 어린 ‘나찌’ 당원으로 기르기를 당국이 원했기 때문에 그 여자나 나의 어머니가 나를 만나러 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회가 있는 대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그의 보호 아래 두려고 하였다.

나는 그가 ‘샤이베’ 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몇 주 동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양친이 무엇을 위해 고통을 겪어 왔는지를 가르쳤다. 나는 그가 나에게 준 「어린이」라는 서적을 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책은 몰래 읽기 위해 작은 소책자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는 나에게 그 부분들을 읽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나와 함께 토론하였다. 내가 배우는 내용에 뛸듯이 기뻐하면서, 나는 여호와께서 어려운 기간 중 내내 나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일들을 조종해 오셨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한달 보름 후에 ‘샤이베’ 자매는 내가 집으로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여전히 여행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얼마의 ‘트럭’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그데부르그’의 변두리까지 내가 타고 가도록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한때 ‘마그데부르그’ 시였던 폐허를 지나 약 세시간 동안 낯선 길을 더듬거리며 찾아갔다. 마침내 나는 우리 집을 발견하였고, 다행히 그 집은 여전히 서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내가 그 집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았고 달려나와 10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끌어 안았다.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이 느낀 심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즉시, 우리는 아직도 청소년 수용소에 있는 나의 누이 ‘헤르타’의 석방을 주선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걸으며 또한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고 가며 수용소까지 80‘킬로미터’를 여행한 후에, 어머니와 나는 수용소 당국의 반대를 극복하고 간신히 그를 석방시켰으며, 우리 셋은 기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빠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이윽고 약간의 소지품을 실은 낡은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가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여러 집단 수용소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당국이 분명히 그들 모두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곳인 ‘뤼벡’까지 수천명의 죄수들이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a을 하는 가운데 끼어 있었다고 말하였다. 230명의 ‘증인’들은 굶주리고 약했지만, 함께 보살피고 서로 도와 주었다.

그 행진의 마지막 밤에 죄수들은 어느 숲속에 숨어 있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호위병들의 권고로, 많은 죄수들이 미군 참호까지 탈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중 약 1,000명이 호위병들에 의해 사살당하였다. 그러나, ‘증인’들은 그 권고를 의심스럽게 생각했으며, 여호와께 기도를 드린 다음 숲속에 머물러 있었다. 곧, 친위대원들 간의 조직이 와해되었고, 수일 내에 ‘증인’들은 해방군을 만났다. 한 명의 ‘증인’도 그 시련 중에 죽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서로 붙들어 주었단다”라고 아버지는 말하였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어떤 이야기를 다른 ‘증인’들에게서 들었다. 예를 들어, 어느 오후에 아버지는 호위병들에게 아주 심하게 구타당하여 탈구된 채 죽은 것같이 땅에 쓰러져 있었다. 호위병들은 그의 몸을 들어다가 그들이 쓰레기와 작은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는 손수레에 던졌다. 그 다음 그들은 그를 시궁창에 갔다 버렸고 쓰레기처럼 진창 속에 내던져 버렸다. 다행히, 다른 ‘증인’들이 어두워진 후에 기어나가서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간호하여 건강을 회복시켰다.

그 다음에 ‘부헨발트’에서 그는 굶주림으로 너무 약해져서 모든 사람이 그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아무런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당국은 기능공으로서 그가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게 될 다른 수용소로 이송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는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형제들의 사랑에 힘입어 생명을 구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가족이 되었으며 즉시 부지런히 여호와의 봉사를 하였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우리 주위에서는 모두 훌륭한 증가가 있었으며, ‘히틀러’ 시대 이전부터 독일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를 즐겼다. 그러나 ‘마그데부르그’는 독일의 동부 지역에 있었으며, 전 후 그곳은 공산주의자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들 당국자들은 우리를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었던 대회는 1949년에 서‘베를린’에서 열렸던 대회였다. 내가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 대회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그러나 이미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증인’들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납치되는 것처럼 단지 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공식적인 금지령이 없었지만, 압력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그데부르그’의 지부 사무실에 있는 형제들이 연행되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금지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시 지하로 들어갔다. 집회에 나오는 일부 사람들이 ‘스파이’였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집회는 비밀리에 서로 다른 날 서로 다른 시간에 열렸다. 만일 집회에 한번 빠진다면, 다음 집회가 언제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호별 방문 전파에서도 조심하였으며, 우리를 ‘여호와의 증인’으로 밝혀주는 어떤 것도 가지고 다니는 일을 피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판단하는 데 능숙하게 되었다. 꺼림칙해 보이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얼른 대화를 짧게 끝내고 그 지역을 떠났다. 정상적으로 우리는 한 거리에서 단 하나의 집을 방문한 다음, 다른 구역에 있는 다른 집으로 가곤 하였다. 우리는 동독에서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물론, 당국에서는 우리 가족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오래지 않아 우리는 방문을 받았다. 이번에는 경찰이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았으며, 나는 감옥으로 끌려 갔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나는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단지 3일만 있었다.

경찰서에 있는 동안, 나는 믿음에 대해 증거할 훌륭한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10명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친절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로 전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믿으며 왜 믿는지를 물었으며, 나는 지금도 거기에 앉아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듣던 그들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그때 18세였으며, 그들에게 성서의 진리를 말하면서 기쁨에 넘쳤다.

그 다음 나를 보내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네게 기회를 주는거다. 그러나 너는 집집으로 전파할 수 없으며, 일주일에 두번 반드시 우리에게 보고해야 한다. 우리는 너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발견되면, 우리는 너를 소련의 ‘시베리아’로 보낼 것이다!” 그들은 말해 놓고 웃었지만, 만일 그것이 농담이었다면 그것은 소름끼치는 농담이었다.

1951년에 우리는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회가 마련되었으며 ‘왙취 타워 협회’ 회장이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참석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약 12명의 우리 소 집단은 조심스럽게 국경을 넘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서독으로 건너간 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끝나지는 않았다. 화폐 사정으로 인해, 우리의 동독 ‘마르크’화는 서독에서 별로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까지 무료로 타고 갈 차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부 ‘트럭’ 운전사들이 우리를 태워주려고 하였지만, 우리 일행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는 곳 근처에 ‘버스’가 몇대 있었다. 한 남자가 그 중 한 ‘버스’에서 내려 우리를 유심히 보고는 ‘버스’로 되돌아 갔다. 잠시 후에, 그는 ‘버스’에서 다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읍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여호와의 증인’이며, 동독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대회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우리도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프랑크푸르트’로 갈 예정이며,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타실 수 있도록 여비를 모았읍니다.”

우리는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형제들 모두가 ‘버스’에서 내렸으며,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았다. 그들은 우리가 국경을 넘으면서 겪은 위험을 잘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까지 좀더 점잖은 방법으로 여행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대회장에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았다. 대회가 끝나자 우리는 국경까지 돌아가는 기차표를 받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에게 경찰이 다시 나를 찾을 것이라고 즉시 경고하였다. 나는 전도 봉사에서 신분이 밝혀져 있었다! 나는 ‘시베리아’에 관한 위협을 기억하였고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로일 것 같았다. 그래서 1952년 어느 여름날 새벽 3시에 나는 동‘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서‘베를린’으로 국경을 넘는 짧은 여행을 하였다. 몇일 간의 정식 절차를 밟은 후에, 나는 서독에서 살 허락을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또 다른 위기를 벗어나도록 나를 도와 주셨던 것이다.

그 후 곧, 미국으로 이주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1957년에 그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1958년의 ‘양키 스타디움’ 대회에 참석하기 전 일년을 꼬박 영어를 배우는 데 보냈다. 그동안 내내 비밀리에 봉사해 온 후에, 25만의 동료 신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은 훌륭한 경험이었다!

나의 누이와 양친도 마침내 동독을 떠나 서독에 정착하였다. 양친은 모두 끝까지 충실하게 그들의 생애를 마쳤다. 나의 누이 ‘헤르타’는 아직도 독일에서 활동적인 ‘증인’이며,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그 모든 경험을 통해 우리는 시편 63:1, 7에 나오는 이러한 ‘다윗’의 감동적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나이다.] ·⁠·⁠·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한스 나우만’의 체험담.

[각주]

a 「파수대」 1980년 12월호 “나는 죽음의 행진을 살아 남았다” 기사 참조.

[13면 삽입]

나의 누이와 내가 ‘게시타포’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갔을 때의 나의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12면 한스 나우만의 사진]

[13면 삽화]

1937년에 어머니와 함께 있는 누이 ‘헤르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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