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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9 3월호 11-14면

끈질긴 탐색이 결실을 맺다

내가 아는 바로는 나 자신과 나의 가족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한 벌의 법정 기록에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약 일곱살 아니면 여덟살이었을 때 나의 양부모는 처음으로 그 서류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의 양부모는 그들이 나를 법적으로 입양했을 때 그러한 서류를 받았다. 후에,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이 서류를 나에게 주었다. 내가 받은 유산이란 한 서류에 기재된 두 이름 즉 나의 어머니의 이름과 나의 이름 뿐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의 혈통에 대해 알고 싶어했지만, 30대가 되어서야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단계를 밟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나의 생활은 성서 연구의 결과로 전혀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었다.

1967년에 나는 생활을 조절하여 내가 배워 알게 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온전히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나는 태평양의 ‘트루크’, ‘코스레이’ 및 ‘포나페이’ 군도에서 선교인으로 거의 4년간 봉사하였다. 다음에, 1973년에 나는 ‘뉴우요오크’ 시 ‘브루클린’에 소재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에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 때부터 나는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배경에 관한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는 형제 자매가 있는가? 나는 ‘스페인’ 계통인가, ‘프랑스’ 계통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내가 나의 계보를 찾으려는 데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즉 그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마태 24:14, 신세.

그러나 어디서부터 찾기 시작할 것인가?

탐색을 시작함

내가 받은 서류에서 알게 된 것은 나의 어머니의 성명, 출생시의 나의 이름, 입양 알선 기관의 명칭, 나의 출생일, 그리고 내가 태어난 병원 정도였다. 나는 나의 출신주인 ‘캘리포오니아’ 주에 소재하는 입양 알선 기관에 편지를 띄우는 일로써 탐색을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두터운 비밀의 장벽에 부딪친 최초의 실망적인 경험이었다. 법의 제재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기관은 나의 어머니의 이름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관은 내가 알고자 하는 여인의 출신주가 ‘오레곤’ 주라는 것은 알려 주었다. 그들은 또한 그 여인이 독일과 ‘프랑스’계라는 것, 학업 성적이 보통이었다는 것, 그리고 고등학교 악대에서 악기를 연주했다는 등 소수의 다른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다음에, 나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 인구 동태 통계국에 서신을 보냈다. 나는 수수료를 동봉하고 또한 나의 어머니에 관한 몇가지 정보를 제공하였다. 며칠 후에 나는 회답을 받았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과연 내가 출생하기 24년 전에 그 주에서 태어났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출생 증명서 사본을 나에게 보내는 것은 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며칠 동안 고심하면서 궁리한 끝에, 나는 나의 어머니의 출생 증명서를 입수하는 것을 금하는 법의 사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얼마 후 사본이 보내졌다. 그 법에 의하면, 출생 증명서는 단지 혈연 친척이나 본인 자신 혹은 검사에게만 발행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다행히도, 나에게 보내진 것은 그 특정한 법이 인쇄된 지면 전체의 사본이었다. 그 지면의 다른 곳을 보니, 거절당한 중요한 서류에 대해 지방 법원에 진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법이 있었다.

이 법규정을 이용하여 나는 입양 서류 사본을 만들고 공증인의 인증을 받은 다음, 출생 증명서 신청과 함께 그 서류를 법정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는? 수주일 후에 내가 원하는 출생 증명서를 받았다. 기재된 사람—‘그레이스 폴먼’—은 나의 입양 서류에 나의 어머니로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부모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그레이스 폴먼’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 같은 날 즉 1939년 5월 23일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기를 출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레이스 폴먼’이나 그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그들을 찾아낼 수 있는가? 더구나, 그 출생 증명서가 작성된지 약 60년이 경과하였다. 나는 탐색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레이스’ 여인이 태어난 ‘오레곤’ 주 ‘아스토리아’의 학교장에게 서신을 띄웠다. 또한 나는 그곳 우체국장에게 ‘폴먼’가에 대한 정보를 문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나의 어머니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성과가 없었다. 분명히 그 가족은 ‘그레이스’ 여인의 출생 후 곧 그 지역을 떠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찾기 위한 다른 길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돌파구가 열리다

의미심장하게도, 미국의 개척지들은 서부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구 조사가 실시됐던 1790년부터 가족들은 단독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서부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레이스 폴먼’ 여인은 멀리 서부의 ‘오레곤’ 주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출생 증명서는 그의 부모가 ‘미시간’ 주에서 출생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레이스 폴먼’ 여인의 부친의 출생 증명서를 입수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어머니의 출생 증명서를 입수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 증명서를 보고서 나는 ‘그레이스’ 여인의 외조부모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이름이 그들의 딸의 출생 증명서에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는 다시 수수료를 보내면서 ‘그레이스’ 여인의 조부모의 결혼 증명서를 신청하였다. 나는 ‘그레이스’ 여인의 어머니의 출생 증명서를 보고 그들의 이름을 신청 서신에 기재하였다. 얼마 후 1894년 2월 3일자로 된 결혼 증명서가 나에게 보내졌다. 이제 나는 1880년 연방 인구 조사의 독특한 점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1880년 연방 인구 조사에 대한 색인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1880년에 10세 이하의 자녀를 둔 모든 가장들과 그들에 관한 다른 정보가 색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인구 조사의 사본이 만들어져 있는 ‘워싱턴’의 국립 문서 보관소에 신청서를 보냈다. 나는 ‘그레이스’ 여인의 할아버지 ‘헨리 몬로우’(그는 1871년에 태어났으므로 1880년에 10세 이하였다)의 이름을 알리고 색인을 찾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얼마 안 있어 그와 그의 가족의 이름이 열거된 인구 조사표의 해당 지면의 사본이 보내졌다. 중요한 정보가 또한 있었는데, 그 지면에는 당시 ‘헨리’가 살던 도시의 이름 ‘미시간’ 주 ‘이이스트 조던’이 기재되어 있었다.

후에, 이 한장의 서류와 이 한번의 친절이 나의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 준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이 지식이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가족의 계통이라고 믿은 다른 분파를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그 목적으로 쓴 편지가 수십통이었다.

나는 ‘롱 아일런드 역사 협회’에서 아주 가까운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으므로 토요일 오후마다 약간의 시간을 내어 옛날의 인구 조사에 관한 기록과 기타 역사적 문서를 조사하였다. 결국, 나는 ‘헨리 몬로우’의 친척을 추적하다가 나의 증조모라고 생각되는 여인을 발견하였다. 그는 ‘뉴우요오크’ 주 북부의 작은 도시인 ‘코블스킬’에 살고 있었다. 그 가족 중 아직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나는 작은 주간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일주일 후에 회신을 받았다. 편지는 나의 증조모라고 생각되는 분의 조카딸로부터였다!

나는 이 여인으로부터 ‘코블스킬’을 한번 찾아오라는 따뜻한 초대를 받았다. 거기서 나는 아주 즐거운 주말을 보내면서 그 가족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지역의 지난 200년 역사에 대해 들었다. 내가 올바로 추적하고 있었다는 부가적인 증거가 있었다. 즉 그 가문의 여인들은 모두 내가 그 가문의 코를 닮았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흐뭇한 사실은 그 여인의 손자녀 중 세 사람과 내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북부 ‘뉴우요오크’ 주의 가족은 50여년 동안 그 가족의 ‘그레이스 폴먼’ 쪽 식구들과 접촉이 없었으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진전을 보기는 하였지만, 나의 어머니를 발견하리라는 전망은 아직 별로 밝지 않았다. 그러나 묘안이 떠올랐다.

나의 과거를 알게 해 준 실마리

나는 ‘그레이스 폴먼’ 여인의 조부인 ‘헨리 몬로우’에 관한 정보가 1880년 연방 인구 조사에서 뽑은 서류에 기재되어 나의 설합에 들어 있음을 기억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뉴우요오크’ 주 ‘코블스킬’의 그 가문에 대해 신문사에 편지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면 ‘헨리’와 그 가족이 살았던 ‘미시간’ 주의 작은 도시 ‘이이스트 조던’ 우체국장에게 편지를 띄워 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우체국장에게 친척들을 찾고자 함을 설명하였다. 나는 그가 그 도시에 사는 ‘몬로우’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혹시 아는지, 그리고 만일 알고 있다면 나의 편지를 그 사람에게 전해 줄 것인지 문의하였다. 그러한 편지를 띄우고 나는 즉시 그 모든 일에 대해 잊고 있었다.

2주 후 어느날 점심 시간에 우편물을 조사하다가, 내가 나의 주소를 쓴 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언제나 나는 문의 서신을 낼 때마다 나의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인 봉투를 동봉하였다.) 그것을 뜯어 보니, 놀랍게도,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다름아닌 ‘그레이스’의 어머니의 4촌으로부터였다. 그 우체국장은 친절하게도 나의 편지를 그에게 보내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날 오후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의 친척이라고 거의 확신이 가는 이 여인과 우편으로 우정어린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레이스’의 어머니에 대해 조심스럽게 문의하였다. ‘그레이스’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자는 ‘알래스카’ 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새로운 소식이었다! 나에게 동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신 왕래를 통해 ‘그레이스’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슬기롭게 처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 하면 나는 나의 출생을 둘러싼 환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할머니의 사촌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나의 입양 서류의 사본을 동봉하고 나를 위하여 중개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가 나의 할머니에게 나의 신분을 밝혀 줄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상봉

며칠이 서서히 지나갔다. 마침내, 나의 할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의 할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렇다. “잃었던 손자”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딸에게서 그가 어렸을 때 죽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 그의 딸은 법정 기록에 기재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알래스카’에 있는 동생에게 즉시 연락해 보라고 할머니는 나에게 재촉하셨다. 전화 번호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 ‘캘리포오니아’ 주로 와서 할머니를 만나 볼 수 있는가?’ 하고 할머니는 질문하셨다.

나는 나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나는 첫마디로 “동생!” 하고 불렀다. 그의 첫 마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역시 어머니로부터 내가 어렸을 때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약 15년 전에 아버지는 그에게 내가 입양되었다고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법적 비밀의 장벽에 부딪쳐 좌절되었다는 것이다.

‘캘리포오니아’ 주로의 여행과 나의 가족과의 상봉은 분명히 나의 생애에서 가장 흐뭇한 순간 중 하나였다! 물론,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알고 보니 이름이 ‘존 라포자 비에라’였다)가 모두 몇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나의 외조모, 동생 그리고 나는 나의 양부모와 함께 여러 시간을 보냈다. 나의 양부모는 처음부터 나의 모든 노력을 도와 주었다. 사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실을 알아 보기 위하여 매우 수고하였다. 흥미롭게도, 나는 또한 나의 생부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이 ‘아조레스’ 군도에서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오니아’ 주로 이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부는 ‘포르투갈’ 계통이었다.

나는 그 일을 달성하였다! 나의 끈질긴 탐색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면 이러한 노력에 든 비용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고 독자는 질문할지 모른다.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만도 400여통이었고, 우편료와 수수료 및 많은 토요일 오후 시간을 도서실에서 보냈다.

장래를 위한 희망

나는 특히 이들 가족에게 성서가 미래를 위해 제시하는 위안을 주는 희망을 전할 수 있어서 특히 기뻤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다시 지상에 부활될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이유가 있음을 말하였다. (요한 5:28, 29; 사도 24:15) 그러면 그들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나의 부모가 심한 과오를 범하였고 심지어 부도덕한 생활 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부활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배우고 그 때의 의로운 왕국의 다스림에 순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육적인 조상에 대해 알아 보는 노력이 가치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성서에는 여러 사람들의 족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다. 분명히 인간이 자기들의 육적인 혈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디모데 전 1:3, 4; 디도 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적인 관계보다 더욱 중요한 관계를 강조하여 지적하셨다. 한 때 그분은 자기의 친척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 쪽으로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 12:48-50.

나는 이것이 참으로 사실임을 발견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약속에 대한 동일한 희망을 가질 때 사람들은 혈연보다 더욱 가깝게 사랑의 띠로 연합된다. 나의 아내와 나는 방금 65기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동료 인간들과의 그러한 선한 관계, 그리고 특히 여호와 하나님과의 선한 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믿음을 전해 줄 웅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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