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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78 11월호 26-30면
  • 암석의 수수께끼—‘아프리카’ 토인들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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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석의 수수께끼—‘아프리카’ 토인들의 미술
  • 깨어라!—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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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슷한 자료
  • 해답을 찾아 봄
  • 자신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욕망
  • 그 예술가들은 누구인가?
  • 그 그림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 정확한 연대 측정이 어렵다
  • 고대 연결이 있었는가?
  • 기술과 사용된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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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8
깨78 11월호 26-30면

암석의 수수께끼—‘아프리카’ 토인들의 미술

「깨어라!」 남‘아프리카’ 통신원 기

예술의 애호가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술품 전시장을 방문하는 것이 흥미와 즐거움을 주는 기회이다. 그러나 대도시에서도 예술품 전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는 문자적으로 수백개의 예술품 전시장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들은 흥미를 끌어 왔고 수많은 예술가, 고고학자,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이 되어 왔다.

지금 우리는 ‘부시맨’ 곧 ‘아프리카’ 토인들의 암석 그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혹된 방문객들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그림으로 덮힌 암석 표면을 보면서 이렇게 묻게 된다. 예술가들은 무조건 그린 것이었는가 아니면 어떤 내용을 전달하려고 한 것인가? 그리고 바다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졸졸 흐르는 냇물가에 예술가는 왜 어떻게 거의 완전한 돌고래의 그림을 그려 놓았는가?

해답을 찾아 봄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그림들이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영향을 받”아 독일 예술가를 포함한 ‘프로베니어스’ 원정단과 ‘오스트리아’의 ‘하랄드 페이저’와 같은 일단의 고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서둘러서 가능한 많은 그림을 복사하고 기록해 왔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베헨리 브루일’은 ‘유럽’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의 원시 예술을 조사한 후 ‘아프리카’ ‘부시맨’ 예술가들의 작품에 주의를 돌린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사가 중 한 사람이다. 조사가들에 의하면 ‘아프리카’ 지역도 이전에 조사해 본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해답되지 않은 많은 의문들을 제시한다.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사가들이 전혀 귀국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암석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그들에게 참으로 흥미를 끄는 평생의 과제가 되었다.

반면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많은 이론 고고학자들이 가까운 도서관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산을 기어 오르거나 동굴로 들어가거나 고대의 예술 작품을 찾기 위해 수풀과 모래를 통과하는 여행을 하지 않고도 전문가들의 이론과 발견물에 대하여 검토할 수 있다.

자신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욕망

암석 예술은 소위 “석기 시대”의 혼성어 즉 기록된 말이 없다고 생각되는 때에 사상, 생각 심지어 종교적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묘사되었다. 거의 어느 나라에나 오랜 옛날부터 자기의 생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거나 자기의 생활과 일상 활동에 관한 기록을 남기려는 인간의 선천적 욕망을 증거해 주는 고고학적 장소들이 있다. 이러한 고대 기록들은 ‘이집트’의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비문으로부터 ‘유럽’이나 미국, 아프리카, 전역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더 원시적인 암석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계에서 고대 암석 그림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아프리카’의 ‘잠베지’ 강 남쪽이다. ‘유럽’의 암석 예술이 인공적인 조명법을 요구하는 동굴 깊숙히 숨겨져 있는 반면에 남‘아프리카’의 암석 그림은 햇빛을 잘 받는 벼랑 동굴이나 불쑥 내밀어 보호하는 부분이 별로 없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암석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로디지아’, ‘보츠와나’, ‘스와질랜드’, 남서 ‘아프리카’ 지역 외에도 남‘아프리카’에는 알려진 장소만도 2천개 이상이 있다. 남‘아프리카’ ‘드라켄스버어그’ 산맥의 ‘느데데마조오지’에는 16개소에 3천개의 그림이 있다. 골짜기에 숨겨진 암석으로 된 이 피난처는 상당히 오랫 동안 ‘부시맨’의 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기호를 살려 내부 장식을 하도록 많은 시간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벽화는 아주 넓은 지역을 망라하고, 많은 동물과 인간 형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 예술가들은 누구인가?

그 예술가들의 정확한 신원은 아직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만 그 예술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부시맨’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한 때는 토인 토착민들이 남‘아프리카’의 유일한 인간 거주자들이었으며 그들은 후에 남부 ‘아프리카’로 이주해 온 흑인 계통의 사람들보다 여러 세기 전에 살고 있었다. ‘부시맨’은 키가 작고 노란 색을 띤 피부를 가졌다. 두개골이 유사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집트’에서 희망봉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피그미’족과 관련있다고 생각된다. ‘부시맨’의 독특한 신체적 특징은 남녀의 둔부가 극도로 통통하다는 점이다.

통용 기원 1150년경의 것인 초기 ‘아랍’인의 기록은 남부 ‘아프리카’의 이들 원시 거주자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의 “언어가 휘파람 소리를 닮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딸깍거리는 언어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흑인 부족들은 초기의 이주자들인 흑인 계통의 이주자들과 작은 ‘부시맨’들과의 혼합으로 인하여 그러한 언어를 물려 받고 있다.

언어는 그처럼 특이하였지만 ‘부시맨’은 자신들의 암석 그림을 통해 그들이 날카로운 관찰력, ‘유모어’감, 그리고 조사가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작은 사람들은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활과 화살로 사냥한 동물 외에 그들은 씨, 장과, 뿌리, 곤충, 파충류 등도 식품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유목민으로서 동굴과 바위 선반 아래의 보호처에서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시적인 가정 바로 그곳에서 자신들의 생활 방식의 기록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초기 영국인 조사가 ‘G. W. 스토우’는 이러한 예술 작품이 남‘아프리카’ 역사서의 일부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그림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로 사냥하는 것을 그린 ‘유럽’의 암석 예술과는 달리 ‘아프리카’의 예술가들은 사람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일상 생활 활동—어떤 것은 비극적이고 어떤 것은 우스운 것을 기록하였다. ‘부시맨’은 사냥, 고기잡이 춤에 참여하였고 원시적 악기를 연주하였다. 그들은 종교 의식을 행하였으며 술에 취하기도 하였다. 그 예술가들의 동물과 곤충에 대한 관찰이 탁월하였지만 그들은 인간 활동을 묘사하는 데 훨씬 더 뛰어났다. 사냥하는 장면은 여러 가지이다. 식품을 찾는 일은 가장의 하루 활동 대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보통 식품을 찾는 데 사용하는 파내는 막대기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때때로 함께 춤을 추었다.

때때로 예술가는 자기의 주제를 어느 정도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루었다. 그러한 한 가지 장면은 의기양양한 사냥꾼이 자기 팔을 활짝 뻗고 자기의 뚱뚱한 아내에게 하루 일한 결과—죽은 숫사슴 세 마리—를 제시하면서 승리의 표시를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그림은 성공을 거둔 사냥꾼이 죽은 영양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가르려고 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자, 사냥꾼의 발톱은 기대에 부풀어 움추러들고 배가 고파서 그의 입에서는 커다란 침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때때로 비극이 암석의 “표제”가 되었다. ‘로디지아’ ‘마토포스’의 한 장면은 패배를 당한 사냥꾼의 한 팔이 무섭게 생긴 암사자 앞에 놓여 있어서 사자 사냥의 불행한 결말을 보여 주고 있다. 다른 그림은 살인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희생자는 돌을 휘두르는 공격자에 의해 머리가 부서지고 두번째 적이 화살을 그에게 쏜다. 다음과 같은 점이 궁금하다. 즉 그 예술가는 공격자의 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히 그 날의 사건을 기록한 ‘암석 기자’였는가? 또한 이런 장면은 얼마나 오래 전에 그려졌는가? 하는 점은 계속 의문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연대 측정이 어렵다

정확한 연대 측정을 막는 문제들 중에는 벽화의 어떤 것도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퇴적물로 덮여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일부 그림은 다른 그림 위에 겹쳐서 그려 놓은 것이고 원시적인 도구를 알 수 있는 경우에도 그 존속 기간이 수천년에 이른다는 점이 있다. ‘느데데마’의 한 그림에 대하여 ‘E. 데닝거’ 박사가 확인한 가장 이른 연대는 ‘포르투갈’ 항해가 ‘바스코다마’가 희망봉을 돌기 약 350년 전인 1150년을 전후로 한 200년간이다. 그 후 배, 말, 마차를 그린 것들은 역사적으로 백인 정착자들의 도착 시기인 17, 18세기로 연대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의견에 의하면 그 때까지는 양식과 기술이 퇴보하였다고 한다. 「암석 예술가」라는 책에서 남‘아프리카’ 화가 ‘월터 바티스’는 원근법과 투시법의 기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우첼로’는 그들[‘부시맨’]이 오랫 동안 간직해 온 것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였을 뿐이다.” ‘바티스’에 의하면 가장 초기의 ‘부시맨’ 미술가들의 기술적 발전은 ‘이집트’ 왕조의 사실적 양식보다 여러 해 앞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암석을 새기는 사람들과 미술가들은 ‘피라밋’이 건설되기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고대 연결이 있었는가?

‘이집트’의 원시 예술과 ‘유럽’의 암석 예술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의 암석 그림 사이에 고대에 어떤 연관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부 ‘부시맨’의 그림은 북‘아프리카’ 혹은 중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해 주는 것 같다.

북서 ‘트랜스바알’의 ‘마크가버어그’ 산맥에서 발견된 한 장면은 시간과 장소에 관하여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길고 하얀 옷을 모자와 두건을 착용한 다섯명의 ‘유럽’인 형태의 인물을 그린 궁정 장면처럼 보인다. 그들은 형태가 불분명한 사람에게 공물로서 선물을 제공하며 공경하는 자세로 몸을 굽히고 있다. 귀인들은 여러 모로 볼 때 ‘페르시아’인으로 보이며, ‘이슬람’ 신앙은 인간 형체를 묘사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그 그림은 아마 ‘이슬람’교 전 시대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일 것이다. 그 장소는 인도양의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부시맨’ 토착민들은 먼 나라의 색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과 관련된 세련된 궁정 장면을 언제 보았는가?

근처의 비슷한 그림을 논하면서 ‘레이몬드 다아트’ 교수는 ‘하랄드 페이저’의 「느데데마」 서문에서 두건 비슷한 모자를 쓴 다른 인물이 신화적 천둥의 신 ‘제우스’를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하얀 소의 형체로 ‘제우스’는 ‘유로파’라는 처녀를 자기 등에 타게 하여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다. 놀랍게도 어떤 ‘아프리카’의 전설은 비를 내리게 하는 소의 등에 오른 젊은 여자가 이동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한 ‘부시맨’이 용과 비오게 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는 점은 기묘하다. 용의 여신 ‘티아매트’에 관한 고대 ‘바벨론’의 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 비슷한 개념을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 예술가들이 천둥과 관련시킨 뿔이 있고, 연기를 호흡하며, 날으는 용의 그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기술과 사용된 재료

그 그림들이 얼마나 오래 되었든지 간에 그 보존 문제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 예술가들은 그들의 그림을 자기 동료 인간이나 자연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색깔은 선명하며 윤곽이 뚜렷하고 분명하다.

색깔은 땅의 색소, (태운 뼈에서 나온) 숯, 산화철, 석회, 백악 그리고 빨갛고 노란 황토에서 얻어졌다. 이것들을 기름, 동물의 피 혹은 새의 알과 혼합하였고 또한 식물이 산출하는 유액이나 송진과 섞었다. 그림 그리는 자들은 깃털, 뼈, 막대기나 털로 솔을 만들었다. 속이 빈 뼈나 작은 뿔에 물감을 담았고, 일부 고고학적 장소에서는 석판 ‘팔레트’가 나왔다.

마지막 ‘부시맨’ 화가들

19세기 후반기에 영국인 조사가 ‘G. W. 스토우’는 작은 뿔 물감 단지를 혁대에 매달고 있던 두 사람의 ‘부시맨’ 화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아주 연로한 한 ‘줄루’인은 자기가 어렸을 때인 1888년경에 ‘부시맨’이 산의 동굴에 거주하였으며, 그 때도 그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린 새들처럼 자유로이 ‘아프리카’를 여러 세기 동안 방랑해 오던 작은 ‘부시맨’은 변화되는 ‘아프리카’의 장면을 그들의 그림처럼 성공적으로 살아 남지 못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에 ‘줄루’인과 ‘네델란드’ 식민자들과 영국인 정착자들이 남부 ‘아프리카’에 점차 정착해감에 따라 ‘부시맨’은 산지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이주자들의 소와 양떼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것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으며 그들이 그 가축들을 몰고 산 채로 향할 때 흑인과 백인들이 추적하여 그들을 살해하였다. 오늘날에는 약 수천명의 ‘부시맨’이 아직도 남서 ‘아프리카’와 ‘보츠와나’ 사막에서 소박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회화 시대는 끝난 것이다.

사라지는 암석 기록

비바람에 씻기고, 목자들과 ‘캠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불의 연기 그리고 공공연한 파괴 행위 때문에 그림의 수가 급속도로 감소되고 있다. 일부 초기 정착자들은 동물 그림을 소총과 연발 권총 발사 연습을 위한 표적물로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수백개의 그림들은 지난 세기 중에 끌로 파내져 ‘유럽’의 박물관들로 보내졌다. 때때로 선의를 가진 열정자들이 “더 나은” 사진을 만들기 위해 그림 위에 분필로 표시를 하고, 연필로 윤곽을 그리거나 그림을 물로 씻어냈다.

이 모든 점들 때문에 예술 애호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아주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회에서 제정된 법과 정부 고시의 지지를 받고 마지막 남은 ‘부시맨’의 그림들을 보존하도록 더욱 자극을 받았다. 원시적이지만 재능있는 과거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이러한 걸작품들은 아직도 ‘아프리카’ 역사의 매혹적이고 가치있는 기록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또한 ‘아프리카’의 흥미있는 암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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