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기대해야 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디모데 후서 3:12.
1. 우리가 성서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박해받은 기사를 읽을때, 어떠한 질문들이 마음속에 떠오릅니까?
누구든지 성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께 충실히 봉사한다는 이유로 많은 박해를 받았는다는 기록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한 박해는 욕설, 투옥(投獄), 매질,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방법이었읍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충실을 지킨 뚜렷한 본으로는 「욥」, 사자 굴에 갇혔던 「다니엘」,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은 「바울」, 그중에서도 자신의 생명까지 박해자들에게 내맡기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리스도인 전(前)시대의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 겪은 고난을 기술합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은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생생한 기록을 읽을 때면,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의 충실한 종은 그러한 학대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실 수 없었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박해를 기대하여야만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 박해를 충실히 견디어 승리할 수 있는가?—고린도 후 11:24; 히브리 11:37, 38.
박해받는 이유
2, 3. (ㄱ) 이러한 박해의 근원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 보지 않으면 안됩니까? (ㄴ) 어떻게 해서 「사단」과 여호와의 종들 사이에 적의가 존재하게 되었읍니까?
2 이러한 박해의 근원과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의 시초로 돌아가서 창세기 처음 석 장에서 그것을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지구 창조와 사람이 거하도록 땅을 조성하셨음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간 「아담」과, 다음으로 그의 아내 「하와」를 창조한 기사를 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활하고 창조주와 일치조화되도록 친절하게 교훈하셨읍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거주하며 그곳에 있는 실과(實果)와 채소를 먹을 크나 큰 자유를 받았읍니다. 낙원에서 동물에 대한 사랑스런 지배권과 이러한 행복한 상태에서 가족을 거느릴 놀라운 특권은 그들의 즐거움을 더욱 크게 하였읍니다. (창세 1:28-30) 하나님께서는 의롭게도 그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읍니다. 그것은 동산 가운데 있는 특정한 한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읍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곳에는 그들이 만족할 만큼 먹을 수 있는 다른 나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 2:17) 하나님께서는 이 간단한 요구에 불순종하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숨기지 않으셨읍니다.
3 이때에 제 삼자가 뱀의 모양으로 이 동산에 침입했읍니다. 교활한 말로 그 여자에게 거짓 약속을 하고 여자로 금단의 과실을 먹도록 유혹하였읍니다. 그 후 「아담」도 하나님께 대한 이 반역 행위에 가담하였읍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사형 선고를 받았읍니다. 그 뱀에 대하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창세 3:15) 그 뱀은 사실상 다른 곳에서 「사단」 마귀라고 부른 자입니다. (계시 12:9) 여자는 거룩한 피조물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대 천적 조직으로서, 그의 아내로 상징되었읍니다. (계시 12:1-6; 이사야 54:1-6) 「사단」에 대한 선고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하나님의 여자의 씨 즉 후손 사이에 적의(敵意) 혹은 증오가 존재할 것을 확정하셨읍니다. 「사단」의 최후 멸망만이 그 적의를 종말짓게 할 것입니다.
4. 「사단」의 적의는 어떻게 표시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에 우리가 박해를 견딜 준비를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그 이래로 참 하나님의 종들 위에 중첩된 비난과 박해는 「사단」의 적의의 표현이었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언하신대로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난폭하게 적대함으로써 그들도 첫 인간 부부와 같이 여호와를 배반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사단」의 증오의 불길은 「에덴」에서 불타오른 이래 거의 6,000년간 꺼지지 않았읍니다. 예수 당시에 그에 대한 불길은 맹렬히 타올라 「사단」은 이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뿌리채 뽑아 버리려고 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와 같은 박해가 역시 그들 위에도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셨읍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요한 15:20) 그리고 현재,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종들에 대한 「사단」의 적의는 폭력과 분노에 찬 새로운 정점(頂點)에 이르렀읍니다. 이것은 계시 12:13-17에서 「요한」이 말한 바와 꼭 같읍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그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읍니다. (계시 12:12)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극심한 적의를 나타내는 일을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적의는 「아마겟돈」 직후에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여자의 후손의 발 아래 짓밟힐 때에 비로소 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를 견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계시 12:9; 19:11–20:3.
박해의 여러 가지 종류
5. 온건한 형태의 박해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를 낙심케 합니까?
5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반대자(사단)가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에 대해 사용한 여러 가지 종류의 박해를 읽을 수 있는데, 그 모두는 오늘날도 역시 사용되고 있읍니다. 그중 온건한 형태의 박해는 욕설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종들의 기를 꺾기 위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기쁜 소식 전파를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에 편견을 넣어 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나쁜 욕을 하고 자기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다고 해서 염려할 이유는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정반대로『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읍니다. 그러한 불쾌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행복될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 5:11, 12.
6. 예수께서는 친지로부터의 반대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욥」의 경험은 그것을 견디는 일에 어떻게 우리를 도와 줍니까?
6 교묘한 형태의 박해이며 흔히 매우 견디기 힘든 것 한가지는 친지(親知)로부터의 반대입니다. 때때로 새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매우 사랑하고 그리고 항상 그들에게 친밀하였던 친지들이 이제 와서는 그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 때문에 반대하고 박해함을 알게 됩니다. 충실한 사람 「욥」은 그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런 일을 당했읍니다. 그가 가진 것을 거의 전부 상실한 후에, 그의 아내는 그를 반대하여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읍니다. (욥 2:9; 19:17) 그러나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고 그를 위로하여야 마땅할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불친절한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째지는 것같았을 것이지만, 여호와께 대한 그의 성실을 굳게 지켰읍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견디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도 동일한 시련을 겪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마태 10:35, 36.
7. 박해의 한 가지 형태인 투옥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7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박해 방법은 투옥(投獄)입니다. 그는 거짓 죄명을 붙인 다음에 흔히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 예로 상전의 부인을 강간하려고 했다는 거짓 죄명을 받고 「애굽」감옥에 갇힌 「야곱」의 아들 「요셉」의 경우가 있읍니다. 「요셉」은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견디기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읍니다. 그는 어떻게 하였읍니까? 탈옥(脫獄)해서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려고 하였읍니까? 아닙니다. 「요셉」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 자신의 때와 방법으로 그를 석방(釋放)시켜 주실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실제 그렇게 하셨으며, 그결과 「요셉」은 「바로」밑에 고관(高官)이 되었으며, 여호와 자신의 영예와 찬송을 위하여 계속 사용되었읍니다. 「요셉」은 박해 아래 충실히 견딤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8. 투옥된 여호와의 종들의 어떠한 다른 예들로부터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8 「예레미야」나 「바울」같은 다른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전파한 이유로 감옥에 갇혔읍니다. 반대자가 중지시키기 원하는 것은 항상 여호와의 목적에 관한 진리의 공개적 선포입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데 여호와의 증인으로 충실하였기 때문에, 수 천명의 우리 형제들은 「히틀러」치하 독일에서 투옥되거나 집단 수용소에 끌려 갔읍니다. 수만명의 다른 형제들은 공산주의 감옥에서 비슷한 박해를 받아 왔읍니다. 최근 석방된 한 형제는 「나치스」와 공산 감옥에서 24년을 보냈읍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거부하였읍니다. 「나치스」감옥에서 많은 형제들은 그들의 신앙을 부인(否認)하기만 하면 석방될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일순(一瞬)도 가져 보지 않았읍니다. 참으로 그들은 감옥에서 계속 전파하였으며, 그곳에서 여호와의 『양』들을 많이 발견하였읍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계시록 2:10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격려받았읍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받』았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실 수 있음을 체험(體驗)하였읍니다.
9. 반대자는 박해의 방법으로서 신체적 폭행을 어떻게 사용하여 왔읍니까?
9 단순한 투옥을 지나쳐서, 성서 시대의 박해는 흔히 난폭한 신체적(身體的) 학대(虐待)의 형태를 취하였읍니다. 사도들은 「유대」인 최고 법정에서 태형(笞刑)을 선고받았읍니다. 그 목적은 그들로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읍니다. (사도 5:40)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그리스도인 선교 활동 때문에 「빌립보」에서 옷을 찢기고 몽둥이로 매를 맞았읍니다. (사도 16:22, 23) 최근 「아프리카」에서 수백명의 우리 형제들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국가 상징물을 우상과 같이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그들에게 총 개머리판으로 잔인하게 구타당하였읍니다.
10.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집단 폭행이 어떻게 사용되었읍니까?
10 집단 폭행(集團暴行)은 성서 시대와 오늘날 「사단」이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박해 무기입니다. 이 무기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의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담대히 전도하신 것이 그들의 종교적 감정으로 폭발시킨 후였읍니다. (누가 4:28, 29) 사도 「바울」은 적어도 두번 「데살로니가」와 「루스드라」에서 폭행(暴行)의 대상이 되었는데,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폭도들로부터 돌로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에, 폭도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다가 내버렸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소생(蘇生)하였으며, 놀랄만한 용기로써, 그곳에 다시 돌아가 그 성에 있는 형제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였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사도 14:19-22; 17:5) 근래에 와서 미국과 다른 나라에 있는 수만명의 우리 형제들은 집단 폭행을 용감하게 견디어냈으며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은 강화되었읍니다.
11. (ㄱ) 박해자들의 최종 무기는 무엇이며, 죽기까지 충실한 어떤 고무적 본들이 있읍니까? (ㄴ) 난폭한 죽음에 직면해서도 충실함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힘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1 박해자들의 최종 무기는 죽이는 일입니다. 「사단」은 여호와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 무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왔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유년기(幼年期)에 형제들은 「스데반」의 훌륭한 본으로 말미암아 강화되었읍니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광신적인 폭도들에 의해 돌로 맞아 죽었읍니다. 그후, 사도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손으로 칼로 죽임을 당하였읍니다. (사도 7:57-60; 12:1, 2) 박해 아래서도 죽기까지 충실하였던 최선의 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형주]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 12:2)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도 확고부동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나단 스타크」가 아주 침착하게 교수형을 직면하도록 해준 것도 바로 이 용기였읍니다. 때는 1944년 가을, 장소는 독일 「작센 하우젠」 집단 수용소였읍니다. 무정한 범죄자인 집행인도 머뭇거렸읍니다. 수용소 소장도 명령을 발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읍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왜 머뭇거립니까? 여호와와 「기드온」편에 서십시오.』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들로 그러한 난폭한 죽음을 아무런 동요 없이 직면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그들도 부활시켜 주시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소망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시 12:10)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28.
박해 아래서의 그리스도인 행실
12, 13. (ㄱ) 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놀랍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욕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하여야 합니까?
12 박해란 여호와께서 성실의 시험으로 그의 종들에게 임하도록 허용하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이런 혹은 저런 형태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놀라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그러한 박해를 견디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길에 서 있는가를 의아하게 여기게 됩니다. 물론 반대자의 증오를 맛보기 위해서 모두가 죽음을 직면해야 된다는 법은 없읍니다. 때때로 그것은 집집으로 다니면서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 사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 위에, 즉 결과적으로 모든 전도인들에게 퍼붓는 욕설일 수 있읍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인 전도인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13 위의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변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 것인가? 라고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을 추측해 볼 필요가 없읍니다. 왜냐 하면 베드로 전 2:23이 그 대답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는 자에게 부탁하시[니라].』 만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욕하는 자들을 마주 욕하셨다면, 그도 그들과 동일하게 비하(卑下)되는 것이며 『참소자』라는 뜻을 가진 마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신 목적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함이지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참소하기 위함이 아니었읍니다. (요한 18:37) 예수께서는 자기에 대한 어떠한 비방의 말도 그의 아버지의 허락에 의해서만 퍼부어질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묵묵히 그 박해를 당하심으로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읍니다. 우리가 비슷한 조롱이나 거짓 비난을 당하게 될 때,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경우에 따라 유순한 대답을 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였도다].』 (고린도 전 4:12, 13) 흥분하고 성난 말을 퍼부을 때, 조용한 말은 흔히 요동하는 수면에 기름과 같이 될 수 있읍니다.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잠언 25:15) 그렇습니다, 너무나 반대하기 때문에 그의 정신 상태가 뼈와 같이 단단한 사람도 때때로 조용한 말로 말미암아 퇴각하는 수가 있읍니다.—잠언 15:1.
14. (ㄱ) 박해를 견디기 위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ㄴ) 사도들은 박해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14 장기간(長期間) 혹독한 박해를 견디기 위해서 우리는 박해가 허용된 이유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서를 연구해서 악의 기원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을 섬기는 각자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에게 완전히 허용되어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새질서에서 영원히 살 생명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그곳에 살기에 적합한가가 증명되지 않으면 안됨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성실과 확고부동함이 시험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서 「사단」이 우리 위에 박해를 가져 오도록 허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충실히 인내할 때 그의 크신 이름이 입증될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과 같이 박해 아래서 즐거워하기까지 할 수 있읍니다. 사도 행전은 그 소수의 그리스도인 집단의 믿음의 시련을 기록한 감동을 주는 기록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혔읍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을 기적적으로 석방시켜 주자 그들은 즉시 담대한 태도로 전도를 재개(再開)하였읍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유대」인 최고 법정에 끌려 갔읍니다. 부활되신 예수에 관해 전도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대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사도 5:29) 이 때 그들은 채찍으로 맞고 다시는 전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이것이 결국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읍니까? 가일층 심해지는 박해에 그들은 겁을 집어먹고 숨어 버렸읍니까? 사도 5:41, 42의 대답을 읽어 봅시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에 대한 그들의 불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주셨다고 기뻐하였읍니다. 이것이야말로 박해에 대한 올바른 견해입니다.
15.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예를 드십시오.
15 그러나 우리에게 박해를 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깨서는 간단히 답변하셨읍니다. 즉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인간적인 견지로 볼 때 이것이 가능합니까? 독일에 있는 우리 형제들은 그들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강철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때리는 「나치스」 박해자들에게, 노인들에게 힘든 일을 강요하고 그들이 쓰러지도록 무거운 짐을 지운 그들에게, 밥을 너무 적게 줌으로써 어떤 이들은 급기야 무기력(無氣刀)하게 되어 그들의 살을 뜯어먹는 쥐들을 대항하지 못하고 죽게 한 그들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었겠읍니까? 그렇게 비인도적으로 학대한 자들에게 그래도 사랑을 나타낼 수 있었읍니까? 문제는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박해자들에 대해 「희랍」어 「필리아」가 의미하는 형제애를 느낄 수 없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희랍」어 「아까페」가 의미하는 비이기적이고 원칙에 입각한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그들은 보일 수 있었으며, 보였읍니다. 박해자 들에게 계속 전도함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인 원칙을 보임으로, 그들은 그러한 사랑을 보였고, 이것은 박해자들 중 얼마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도록까지 만들었읍니다.
16. 어떠한 견해를 갖는다면, 인간 박해자들에게 사랑을 보이는 데 도움이 됩니까?
16 그러나 어떤 박해자들은 무지(無知)의 소치(所致)로 그리스도인들을 학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눈이 감겼읍니다. (고린도 후 4:4; 11:4) 우리는 「사단」을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는 원흉(元兇) 그리고 두목으로 보고, 인간을 단순한 그의 도구(道具)로 볼 수 있다면, 인간 박해자들에 대해 더 많은 사랑의 태도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스데반」은 그러한 식으로 사 물을 보았읍니다. 그래서 그는 죽으면서 『주 [여호와]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사도 7:60.
17. 박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두 가지 좋은 결과를 말하십시오.
17 그러므로 박해를 항상 나쁜 것으로 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박해는 흔히 우리가 충실하게 견딜 때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첫째로 박해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굳게 해줍니다. 단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신 이유를 이해할 때입니다. 그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겪고, 여호와의 성령의 지원(支援)으로 이기고 나왔을 때, 그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는 그로 충실함을 증명하도록 허락해 주시고 인 내하도록 힘을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그는 여호와께 더욱 가까이 접근하게 됩니다. 둘째로, 반대 아래서의 우리의 충실함은 흔히 우리의 동료 신자들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충실하게 인내하고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기쁜 소식의 전파를 담대하게 계속한 것은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격려가 되었읍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립보 1:13, 14.
18. 박해를 충실히 견딤으로 어떠한 다른 좋은 결과가 생깁니까?
18 박해 아래서 충실히 인내할 때 생기는 세번째의 훌륭한 결과는 여호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 전 2:19,20)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지혜롭고 올바른 행로를 취할 때 항상 기뻐하십니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잠언 27:11) 「아담」의 타락 이래 「사단」은 여호와를 비방하여 왔읍니다. 만일 우리가 박해 아래서 견디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을 비방할 이유를 더 주는 것밖에 되지 않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고 모든 종류의 반대 아래서 확고하게 견딘다면, 우리는 여호와께서 비방자에게 대답하실 수 있는 산 대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단」은 불만족스럽게 물러 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즐겁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즐겁게, 아니 행복하게 그의 비길데 없는 이름을 인해서 수치를 견디도록 합시다.
19. 여호와를 섬긴다고 박해받을 때 왜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읍니까?
19 전술한 방식으로 박해를 본다면, 우리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해서 『모든 사람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되지만, 우리는 겁내거나 숨을 필요가 없읍니다. (마태 10:22; 고린도 전 4:13) 「바울」도 바로 그렇게 느꼈으며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 . .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디모데 후 1:8,12) 「베드로」도 이 점에 대해 동감이었읍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 전 4:16)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옳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가 겪지 않으면 안될 모든 수치스러운 대우, 욕설, 박해가 우리를 낙망시키거나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도록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포르투갈」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서 참됨이 증명되었읍니다. 최근에 비록 전 회중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억울한 판결을 받았지만, 이 일이 그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로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포기하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20. 우리가 그러한 박해를 혼자서라도 견딜 수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읍니까?
20 여호와를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하다면 박해 아래서 혼자서라도 견딜 수 있읍니다. 충실한 사람 「욥」은 인간의 도움이나 위로 없이 그러한 시련을 저항하였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친절하게 그에게 힘을 주셨읍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자비 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 (야고보 5:11) 「바울」역시 「로마」에서 그러한 박해를 혼자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승리해서 나왔읍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 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 (디모데 후 4:16-18) 우리시대에 우리는 중공(中共)형무소에서 각각 7년과 5년씩 독방(獨房)에서 견딘 「스탠리 존스」와 「해럴드 킹」 같은 형제들의 확고부동한 본을 보았읍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버리시지 않읍니다. 『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브리 13:6.
21. 분명히 있을 박해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장래를 직면할 수 있읍니까?
21 여호와의 확실한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고 박해 아래서 충실한 우리 형제들의 본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장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비록 장래에 우리에게 「사단」의 분노의 불길이, 죽음의 고통이 닥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압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그의 크신 이름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시험을 당하도록 허용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것을 압니다. (고린도 전 10:13)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가득찬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장래를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節)』을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에베소 6: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즐겁게 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고린도 전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