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국은 과연 그리스도의 영역인가?
1. (ㄱ) 『그리스도교국』이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ㄴ) 그리스도교국은 무엇을 주장해 왔으며, 그들은 무엇을 수행하려고 하였읍니까?
특히 기원 약 800년 이래로 오랫동안 그리스도교국은 세계 사정에 크게 영향을 끼쳐 왔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이란 말에는 그리스도의 영역 또는 그리스도의 관할이라는 뜻이 있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이것을 주장하고 온 세계를 개종시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이교국으로 파송해 왔읍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은 알든 모르든 간에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교국의 정치적 또는 상업적 증진에 한 몫을 하여 왔읍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역을 넓혔읍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국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역이라면 그리스도가 전파하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와 원리를 토대로 한 그리스도교를 넓힌 셈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실 여부를 검토해 봅시다.
2.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어떠한 두 가지 증인을 살펴 볼 수 있읍니까?
2 그리스도교국이 어떻게 세계 사정에 그처럼 큰 영향을 끼쳐 왔는가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볼 첫째 문제는 그리스도교국의 기본 교리이고 다음에는 역사적 견지에서 본 기초입니다. 이에 대하여 두개의 믿을 만한 증인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과 역사입니다.
3. 두가지 증인의 증거로부터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3 먼저 이 두 가지 증인은 우리를 같은 결론 즉 그리스도교국은, 과거나 지금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그 결론은,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제시되는 이유와 그 사실들이 그렇게도 철저히 그리스도교국이 결코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고 도리어 그리스도교의 가장 악한 원수이며 세계적 큰 「바벨론」 종교 제국의 일부임을 증명하는 가를 독자들로 쉽게 이해시켜 즙니다. 첫째로 그들의 기본적 교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온게 아니고 「바벨론」에서 왔으며 둘째로는 그 정치적 조정과 간섭은 정면으로 그리스도와 반대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또 그의 추종자들에 대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하였읍니다—요한 18:36; 17:16.
「바벨론」의 교리를 기초로 함
4. 삼위일체 교리가 언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저서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였읍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논쟁을 일으켰읍니까?
4 성경은 「바벨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란 말이 없읍니다. 이 교리는 「바벨론」 종교의 특징인 삼신 교리의 하나였읍니다. 그러나 2세기 후반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적 저술가들이 이 말을 그들의 저서 중에 넣기 시작하였읍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간섭을 받게된 종교적 논쟁을 일으키게 하였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여기 「가톨릭 백과사전」 15권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봅시다.
5. (ㄱ) 「가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국의 교리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ㄴ) 삼위일체의 정의를 말하십시오.
5 축복된 삼위일체 . . . 1, 삼위일체의 교리―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즉 신성(神性)의 연합에 있어서 삼위가 있다는 것이며 성부, 성자, 성신 이 세위는 서로 구별되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다나시우스」 신조에는 『성부는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인데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라고 하였다.
6. (ㄱ) 성경에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표시한 말이 있읍니까? (ㄴ) 그런 말은 누구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나옵니까?
6 성경에는 이 셋이 하나라고 지적한 곳이 한번도 없다. 「트리아스」(τριας)(나전어로는 「트리니다스」라고 번역되다)라는 말이 기원 180년 경에 「안디옥」의 「데오필러스」 가운데 처음으로 나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말씀 그리고 그의 지혜의 삼위일체』를 말한다. (“Ad AutolycumII, 15, P.G., VI, 1078) 그 말은 물론 그당시 이전 부터 사용해 내려왔을 것이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 「터룰리안」 가운데 나전어 형체로 「트리니다스」(trinitas)라고 나온다. (“De pudicitia”, c. xxiP. G., II, 1026) 다음 세기에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47면.
7. 「콘스탄틴」은 언제 황제와 대승정이 되었읍니까? 그는 어떠한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합니까?
7 제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 황제가 일어났읍니다. 「콘스탄틴」은 그의 마지막 적수를 물리친 후 기원 312년 10월 28일에 「로마」의 원로원에 의하여 으뜸 「아우구스도」이며 대승정으로 선언되었읍니다.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그의 적인 「막센디오」와 싸울 때 십자가의 화염이 태양밑 하늘에 나타 나고 「인 혹그 시그노 뷘세스」라는 말도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 표적으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십자가가 태양—신인 「솔」의 상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국이 이 때부터 「바벨론」적 거짓 교리와 정치적 술책을 바탕으로 일어났다는 것에 유의 하십시오.
8, 9. 기원 313년과 321년에 그리스도교국 발전에 어떠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읍니까?
8 기원 313년 1월 13일 「콘스탄틴」은 이교의 대승정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유명한 관용의 칙령을 내림으로써 그들은 공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9 기원 321년 일요일 즉 십자가로 상징된 태양-신「솔」의 날을 사법상 면제받는 날로 정하고 그날을 지키는 것을 법적 의무로 하였다.
10. 「콘스탄틴」은 왜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그리고 어떠한 경향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읍니까?
10 기원 325년에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동부와 서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그의 제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을 진정시키고자 종교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회합은 「니고메디아」 가까운 「니케아」에서 가졌는데 온 제국을 통하여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 「에피스코피」 즉 감독자 318명이 참석한 가운데서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례 받지 않은 이교 대승정인 「콘스탄틴」이 회합을 사회하였다. 참석한 주교들의 수는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였다. 다음에 우리는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라는 책(477, 478면)에서 인용해 봅시다.a
11. 회의에서 어떠한 논쟁이 일어났었읍니까?
11 『삼위일체를 지지한 사람들은 「애굽」「알렉산드리아」의 젊은 부감독 「아다나시우스」일파였다. 그것을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보다 낮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여준 사람들은 장로인 「아리우스」일파였다. 약 두달 동안 이 두 파는 싸웠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하서 자유 의사를 행사할 수 있으면, 그가 참 뜻으로 아들이라면, 그는 아버지 다음에 와야 한다. 따라서 그가 한때 없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는 한정된 존재자라고 그는 말하였다.b 「아리우스」가 말하려 일어났을 때 「미라」의 「니콜라스」라고 하는 자가 그의 뺨을 쳤다. 다음에 「아리우스」가 계속 말했을 때 마치 그 노인의 이단적 행위에 놀란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들의 귀를 막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12. 어떠한 결정을 내렸으며 이 회의로부터 기타 어떠한 영이 내려졌읍니까?
12 『드디어 대승정 「콘스탄틴」은 결정을 지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 교리에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니케아」 신조는 공포되어 강제로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반대할까 하여 후에 「아리우스」는 「콘스탄틴」의 명령에 의하여 「일리리아」에 추방되었다. 그런데 5년 후에 그를 다시 불러왔다. 여러개의 경전을 발행하는 외에 「니케아」 회의는 일년 중 어느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도 영을 내렸다.』
13. (ㄱ) 「콘스탄틴」은 언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례를 받았읍니까? (ㄴ) 이교 「로마」의 원로와 그리스도교국 종교는, 그를 어떻게 보았읍니까? 그리고 「콘스탄틴」은 무엇을 하는 데 성공하였읍니까?
13 기원 337년에 「콘스탄틴」은 병에 걸렸다. 그는 「니코메디아」에서 침례를 받고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로마」의 원로(아직 이교도)는 그들 신들 가운데 두었다. 동부 종교적 회중들은 그를 성자들 반렬에 올려 놓았다. 「희랍」과 「코프트」와 그리고 「러시아」 교회들은 5월 21일에 「콘스탄틴」 성자의 명절을 지킨다. 「콘스탄틴」은 그의 일생 동안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융합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배교적이고 참으로 「바벨론」적인 그리스도교를 만들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4.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읍니까?
14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콘스탄틴」의 참된 본질이 어떠하였던간에 그 결과는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 교회에 크게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 넓은 범위로 복음을 쉽게 전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스도교의 개방된 신앙 고백에 대한 모든 방해물이 옮겨지고 그것은 「로마」 제국의 확립된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 암아 발생되는 이득과 같은 여러 가지 관점도 있었지만 세속적 세력과 밀접하게 접촉하게 되자 고난받게 되었다. 즉 복음의 단순성이 부패되고 엄엄한 예식이 소개되고 세상적 명성과 보수가 그리스도교 선생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은 크게 이 세상 왕국으로 바뀌어 졌다.』—「신학 사전」 「헨더스」와 「벅그」 공저. 또한 「맥클린톡」과 「스트롱」의 「사전」 2권 488면과 「기본」의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454면 이하를 참조하라.
15.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국은 어떻게 더욱 「바벨론」적으로 변하여 갔읍니까?
15 회중의 『감독자』를 뜻하는 「희랍」어 「에피스코포스」나 또는 『종』을 의미하는 「디아코노스」라는 말을 배교적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주교』라든가 『집사』라는 존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높이고 있읍니다. 그리고 진리를 타협시킴으로써 이교도들에게 더 기쁘게 더욱 호소하게 하고 받아들이기 쉽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끌고 더 큰 정치적인 세력을 잡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역사가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국은 점점 더 「바벨론」적으로 기울어지고 저하되어 버렸읍니다. 독자들은 「죤 헨리 뉴맨」이 솔직히 인정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국의 기초가 「바벨론」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뉴맨」은 1879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추기경이 되었읍니다. 1878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인 교리 발전에 관한 논문』이라는 그의 저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읍니다.
16. 교회 지도자들은 왜 마귀 숭배의 많은 형식을 소위 그리스도인 종교에 채택하였읍니까?
16 당시 그리스도교의 힘을 믿고 악에 물드는 것을 대항하며 마귀 숭배에 사용하던 도구와 기물을 선교용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부패되어 있었으나 근본 원시적 계시로부터 오거나 또는 자연의 본능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필요한 것을 생각해 내야 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교도가 시도한 원형 그대로를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환경이 조성되면 교육 받은 계급의 철학과 동시에 일반 민중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습관을 채택하고 본따고 거룩히 만들 용의가 되어 있었다.
17. 「뉴멘」 추기경은 교회가 이교의 많은 의식을 본받은 것을 어떻게 정당화하려고 합니까?
17 전의 사용과 또 특별한 성자들에게 전들과 나무 가지로 장식한다든가 향불, 촛대, 병자를 고치기 위한 봉헌제, 성수, 양로원, 고아원, 병원, 축일이나 절기, 역법의 사용, 행진, 밭에 대한 축복, 승복, 삭발, 결혼 반지, 동쪽을 향하는 일, 그 후에 있게 된 우상, 또한 성가나 「기리에 엘레이손」(찬송의 일종) 등은 모두 이교에서 시작하였는데 교회에 채택됨으로써 거룩하게 되었다.—1881년 판 355, 371, 373면.
정치적 간섭이 그리스도교에 분렬을 가져 오다
18. 그리스도교국의 세상적 세력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였읍니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나쁘다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지적합니까?
18 그리스도교국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며 또 그리스도교국의 통치자들은 신성한 권리로 말미암은 왕들이나 통치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 회중에 그러한 사상이 갑자기 생겼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재빨리 날카롭게 꾸짖어 그 일을 바로잡았읍니다. 그는 강한 풍자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린도 전 4:8) 그리스도교국은 「바울」의 이러한 말을 완전히 무시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국의 역사는 인기를 위한 타협과 정치적 영향과 권력에 대한 기다란 기록이며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쓰디쓴 분렬을 가져 왔읍니다.
19. 「로마」 교황은 어떻게 대정이라는 이교의 칭호를 갖게 되었읍니까?
19 기원 378년. 동부 황제였던 「발렌스」가 죽으매 기원 375년에 서부에서 통치하기 시작한 「그라디안」은 「데오도시우스」 장군을 동부 황제로 만들었다. 그후「그라디안」은 「로마」에서 이교도의 예배를 금지하였고 대승정의 훈장을 차는 것을 거절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감독 「다마수스」는 이교의 관련성과 직무를 가지고 있는 칭호를 취하였다. 「로마」교황은 오늘날도 그 칭호를 가지고 있다.
20, 21. 기원 381년과 395년에 발생된 사건에서 그리스도교국은 동부와 서부간에 어떠한 분렬이 생겼읍니까?
20 기원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논쟁이 온건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회의는 「니케아」의 삼위일체 신조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 「넥크타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로마」 감독 다음 자리라는 것이 선언되었다.
21 기원 395년. (온 제국의 유일한 지배자 였던) 「데오도시우스」가 죽자 그의 제국은 갈라졌다. 그러자 동부와 서부의 감독들도 정치적 충성 때문에 갈라졌다. 이러한 분렬은 그리스도교국의 시초와 같이 그리스도교국으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보다도 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국을 비그리스도인으로 낙인찍어 놓았다.—고린도 전 1:10-13.
22. 「레오」 1세는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포부를 어떻게 발표하였읍니까?
22 기원 440년. 「레오」 1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회의 정치적 포부를 이처럼 선언했다. 『나는 이 땅에 또 한번 정부를 세우고자 원한다. 그러나 「가이사」를 다시 불러 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신권 정부를 선포함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된다. 「베드로」와 맺은 약속에 따라 그의 계승자인 나는 법을 회복시키고, 죄를 벌하고, 이교를 없애며, 천재를 격려하며, 평화를 보장하며, 분렬을 고치며, 배움을 보호할 것이다. 사랑에 호소하지만 공포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빼놓고 이 일을 누가 행할 것인가? 한 신권 정부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것이다. 면류관이 아니라 삼중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우주 주권의 상징이며 그 앞에서 무지함이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 되찾아 올 것이다.』—「죤」경 저서 「역사의 봉화」 3권 244, 245면.
23-25. 기원 476년, 553년과 726년에 그리스도교국의 더 큰 종교적 분렬을 설명하십시오.
23 기원 476년. 「로마」 교황 「펠릭스」 3세가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을 파문하였을 때 동부와 서부 교회의 분렬은 더욱 커졌다.
24 기원 553년. 「로마」 주교의 항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제3차 총회는 「콘스탄티노플」 대감독 밑에 사회되었다.
25 기원 726년. 「콘스탄티노플」 황제 「레오」 3세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우상들을 파괴하도록 명하였다. 「로마」에 있는 서부 교회 교황 「그레고리」 2세는 그 때문에 동부 교회에 속해 있던 동부 황제를 파문시켰다. 그래서 동부(희랍) 교회와 서부(라틴) 교회가 갈라지게 되었다.
26-27. (ㄱ) 기원 800년에 「로마 가를릭」교회는 정치적 간섭과 조종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높아졌읍니까? (ㄴ) 『신성 「로마」 제국』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읍니까?
26 기원 800년. 「로마 가톨릭」은 자신을 통치자들보다 더 높이리만큼 정치에 간섭하였다. 「아이렌」은 「콘스탄티노플」의 여황제로서 통치하였다. 그런데 「로마」 교황은 「찰스」 대왕을 「프랑크」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 해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설립이 계산되며 1806년까지 계속되었다.—「가톨릭 백과사전」 1929년 판 3권 615면.
27 『2일 후에(800년 「크리스머스」날) 「찰스」의 일생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황이 승정의 「미사」를 드리고 왕은 성 「베드로」와 「바울」의 시체가 놓여 있는 높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교황이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의 머리에다 황제의 관을 씌우고 고대 풍습에 따라 절을 하고 그를 황제와 「아우구스도」로 인정하여 입맞추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때 함께 있던 「로마」인들은 세번 외치며 『하나님께서 왕관을 씌우신 「찰스」 「아우구스도」, 능하고 화평의 황제에게 장수와 승리가 있을지어다』하였다. (「백과사전」 774면에 『그의 대관식은 「콘스탄틴」의 후계로서』말하고 있다.)
28, 29. 「러시아」는 언제 「희랍 정교」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리고 「러시아」에서 이교를 없앨 수 있었읍니까?
28 기원 988년. 「블라디미르」 대왕이 동부 교회로 침례를 받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우상들을 「드니에퍼」강에 던지도록 하였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침례받도록 강요하였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29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을 때 「러시아」의 이교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교는 대중의 말 가운데나 격언이나 전통, 가정적 생활이나 심지어는 종교적 신조에까지 살아남았다. 18세기까지도 어떤 벽촌에서는 뱀을 숭상하였다. 「러시아」 교회의 위대한 역사가인 「오이게니우스 골루빈스키」는 「러시아」가 9세기에 침례를 받았으나 그리스도교가 되지 못하었다고 선언하였다.
30. 십자군이 생기게 된 원인의 하나는 무엇이었읍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입증되었읍니까?
30 기원 1054년. 「가톨릭」교회를 거룩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주권자로서 「로마」교황에게 복종할 멍에를 동부 교회에 씌울 것을 노력한 후에 「희랍」 대감독 「미가엘 세를라리우스」는 교황 「레오」 9세의 사절(使節)에 의하여 파문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분렬이 「로마 가톨릭」 십자군이 생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고 「마호멧」 교도와 「유대」인 그리고 「가톡릭」에게 무서운 파괴와 유혈이 있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1, 32. 「러시아」의 대감독구가 서게 된 경로를 말하십시오.
31 기원 1453년. 「마호멧」 2세 밑에 있는 「마호멧」 교도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은 남아서 일을 보도록 허락되었다. 이 사실로 「러시아」는 종교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1929년 판 24권 38면은 이렇게 말한다.
32 「러시아」에 대감독구가 서게 된 것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러시아」인의 「러시아」의 발전으로서 나타난 자연적 결과이다. 「모스코」는 제3의 「로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33. 「러시아」의 정통교회가 온전히 서게 된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동방교회 분파의 감독들은 「러시아」와 「로마」의 감독구를 각각 어떻게 보았읍니까?
33 기원 1587년. 독립적인 「러시아」가 완전히 설립되었다. 「맥클린톡」과 「스트롱」의 「사전」에 의하면 『그 해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예레미야」는 지지를 받고자 「러시아」를 방문중 수도 「모스코」를 대감독 「욥」이라는 사람에게 돌릴 것을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대감독은 동부 감독의 의견에 의하면 분렬된 「로마」의 대감독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교황을 분렬(schismatic)이라고 부른 데 유의하라).
34, 35. 1696년과 1721년에 「러시아」 교회에서 어떤 일이 전개되었읍니까?
34 기원 1696년. 「피터」 대제는 「러시아」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대감독구를 폐지하고 황제나 그의 비서의 통솔 밑에서 감독들로 구성되는 영구적 의회로 대치시켰다.
35 기원 1721년. 신성 통치 의회가 「러시아」 교회에 설립되었다. 그것은 국가적 교회가 되었으며 그것은 「러시아」제국의 시민 관료 집권의 기구로서 「짜르」 주의를 지지하는 도구가 되었다.
36-38. 기원 1829년, 1833년과 1850년에 「희랍」에서 어떤 일이 전개되었읍니까?
36 기원 1829년. 「희랍」의 독립 왕국이 설립되었다.
37 기원 1833년. 「희랍」의 섭정은 「희랍」의 동양 정교회가 모든 외국 선교 당국으로부터 독립됨을 선언하였다.
38 기원 1850년.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은 「희랍」 교회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39. 기원 1869-1870년에 어떠한 「로마 가톨릭」 교리가 선언되었읍니까?
39 기원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 종교 회의는 「로마」 교황의 절대 불과오를 선언하였다.
40-42. 1917년부터 1945년까지의 「러시아」에서 전개된 일과 「러시아」 정통 교회에 대한 「소비엣트」 통치자들의 태도를 말씀하십시오.
40 기원 1917년 11월. 제2혁명으로 말미암아 「볼세비키」(과격파)가 권세를 잡았다. 「러시아」 교회가 국교임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각 교파의 모든 교직자들을 학대하고 모욕하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선언을 내렸다.
41 기원 1918년. 「모스코」는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그후 몇년 동안 종교를 근절시키려고 큰 노력을 하였으나 희생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비엣트」 정부는 「러시아」 교회를 그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교회 성원에게 애국심을 불어 넣었다. 「러시아」 정통 교회는 이 마련에 굴복하였다.
42 기원 1945년. 「러시아」 정통 교회는 「모스코」 교외에서 회의를 열었다. 북미를 위한 「모스코」 감독구의 총주교이며 대감독인 「벤쟈민」은 「모스코」가 아직 『제3 「로마」』가 될 수 있으며 『전체 교회를 위한』 회담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소비엣트」 당국은 그러한 생각에 대하여 동정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이 「러시아」의 정통 교회 제국주의와 더불어 그들의 정치적인 수도 「모스코」가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전도의 중심지가 될 것에 호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3, 44. 「바티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어떻게 분리 술책을 썼읍니까?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성공하였읍니까?
43 기원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4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바티칸」을 분렬시킬 뜻으로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을 통하지 않고 각 동부 교회 단체로 초대장을 직접 보냈다. 「러시아」 정교회는 대표를 보냈다. 「바티칸」의 분리적 책략에 관하여 미국에 있는 「희랍」 정교회 대승정인 「야고보」 대주교는 1962년 11월 4일에 「뉴욕」 「타임즈」지가 보도한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논설주제는 『「야고보」는 「바티칸」의 책략을 공박하다—옹호 회의 초대가 정교회 지도자들을 멸시하다.』는 것이었다.
44 『「이러한 술책에 있어서 「바티칸」은 「모스코」 교회와만 성공하였다.」 . . . 「러시아」 교회를 돌변시켜 교황 「요안」 23세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한 까닭은 틀림없이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혼잡하게 되다
4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어떻게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의 날카로운 분렬을 나타냈읍니까?
45 상술한 회의에 2,000명 이상의 추기경과 감독들이 있었는데 교리와 의식에 있어서 많은 중대한 제목에서 날카로운 분렬이 있었읍니다. 교회의 중심이며 가장 힘있는 행정부인 교황청에 의하여 보수파가 이끌렸읍니다. 그런데 자유파는 대부분 추기경과 주교들로 되어 있었읍니다. 회의 중 교회 통일에 관한 법령이 초안되었읍니다. 그 문서는 동부 정교회와만 관련시키고 신교는 무시해 버렸읍니다. 「뉴욕」 「타임즈」지를 인용하면 회의의 많은 변사들이 이 법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읍니다.
통합 문제를 전적으로 지난 세기의 신학적 견지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분렬된 그리스도교의 당면 문제와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융성과 유물주의와 속화(浴化)의 두가지 위협 그리고 비그리스도교의 성장을 언급하였다.—「뉴욕타임즈」지 1962년 12월 1일 『감독들은 정교회와의 통합 문제에 관한 토의를 종결짓다』라는 제목 밑에.
46.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어떠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읍니까?
46 지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서 성자들의 많은 상들을 그들의 교회로부터 없애야 하고 「마리아」나 십자가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의 상들을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변동은 지금은 금요일에 고기를 먹도록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즉 지금까지 성자의 상들에 대하여 기도한 까닭은 무엇이며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교회는 그들을 그릇된 숭배로 인도하고 있었는가?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이모든 충성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가? 하고 자문합니다.
47-49. 1965년 「브리타리카 연감」에 실린 어떤 기사가 그리스도교국이 그리스도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까?
47 「브리타니카 연감」 1965년판 706면에는 많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더큰 혼란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48 교황청과 「항가리」 정부 사이에 「부다페스트」에서 조약에 서명했을 때인 9월에 계속적으로 공산주의 정부와 가조약을 하게 되어 간다는 암시가 있었다. 「로마」는 교직자들이 충성을 맹세할 것을 허락하고 6명의 주교를 임명하였다.
4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 . . 「시카고」의 추기경 「알버—트 마이어」, 「세인트 루이스」의 「죠셉 릿터」와 「몬트리올」의 「바울 에밀레거」의 인도 밑에 천명 이상의 감독들은 그것을 투표하자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자유에 대한 선언의 초안이 중지되었다.
50. 그리스도교국의 기초가 그리스도교적인지 아닌지를 설명하십시오.
50 우리가 지금까지 두개의 참되고 권위 있는 증인 즉 성경과 역사를 살펴 보았는데 그 두가지 증인은 그리스도교국의 토대를 폭로해 줍니다. 그 증거는 결정적입니다. 즉 그들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원칙에 기초되어 있지 않읍니다. (요한 18:36) 그리스도교국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으며 우상을 사용하고 이단자를 불에 태우며 강제로 백성들을 개종시키며 정치적 정부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정부들과도 동맹을 맺고 있읍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국이 「바벨론」의 영을 받고 있으며 그 하나님 「사단」 마귀의 영을 받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1. 우리는 그리스도교국의 문제에 관하여 근심할 필요가 있읍니까?
51 지금 그리스도교국의 정치적 간섭과 타협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의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하게 증가할 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국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역이라면 그의 왕국은 실패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것은 그리스도교국의 위기와 실패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다 더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참다운 왕국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데 바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지금 하늘에서 통치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그 통치는 이 땅에까지 미치게 되어 온 땅이 화평과 통일을 얻게 될 것입니다.
52. 그리스도교국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어떠한 질문들이 있읍니까?
52 지면이 허락하는 데 따라 그리스도교국의 또 하나의 커다란 분열인 「프로테스탄트」 (신교)에 관하여 다음 호에서 살펴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이러한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즉 16세기에 갈라져나온 그리스도교국의 일부인 「프로테스탄트」 (신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워졌는가? 그리고 「프로테스탄트」혁명은 정말 참된 숭배를 회복 하였는가?
[각주]
a 「뉴욕」, 「브룩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하다. (1963년 영문)
b 참고, 「맥클린톡」과 「스트롱」의 「사전」 7권 45면a. 또한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1929년판 2권 250면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