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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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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랑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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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5
파65 7/15 265-270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랑

“영의 열매는 사랑 . . . 이다.”—갈라디아 5:22, 신세.

1. 사랑을 표현하는 데 「희랍」 사람들이 네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치적임을 무슨 질문들이 예시합니까?

『「희랍」 사람들은 적절한 낱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제목일 때 사실인 것같읍니다. 왜냐 하면, 「희랍」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데 단지 하나가 아니라 네가지 다른 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 「아까페」(éros, storgé, philía, agápe)로 표현되었읍니다. 사랑이란 매우 복잡한 성품이기 때문에 「희랍」 사람의 견해가 이치적입니다. 당신 자신이 잠간 멈추어 그렇다는 것을 확신 시키기 위하여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할 때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한 느낌이나 충동입니까? 그것이 애정에 의하여 동반되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품 때문에 우리가 칭찬하고 매력을 느끼고, 적어도 얼마큼 좋아하게 되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읍니까? 사랑이 솟아나는 원천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까, 혹은 생각입니까? 아니면 그 두 가지입니까? 마지막으로 만일 있다면, 사랑의 진정함과 그 가치를 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에 관하여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번쩍이는 것이 다 황금이 아니다.』란 말과 같이 사랑처럼 보이는 것이 모두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마지막 「키스」와 같이 거짓일 수도 있읍니다. 부드럽기는 하였지만 불충실한 「키스」였읍니다.—마가 14:44, 45.

2.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무엇이 알려 줍니까?

2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어려운 교훈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가장 많은 노력을 베풀어야 한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펜실베니아」주의 창설자 「월리암 펜」이었읍 니다.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성서는 그럴 수 있다고 명백히 알려 줍니다. (데살로니가 전 4:9, 10) 『제자』(disciple)란 말은 문자적으로 배우는 자 즉 생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그가 훈련시키고 가르치신 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요한 13:35.

3. (ㄱ) 왜 진정한 사랑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식별케 하는 표지가 됩니까? (ㄴ) 오늘날 그리스도인 회중에게 무슨 위험이 존재합니까?

3 그러한 종류의 사랑이란 흔하지 않음이 틀림없읍니다. 그것은 땅 위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예수의 참된 생도 즉 제자들을 식별케 하는 표지로서 뛰어나게 할 만큼 매우 드문 것입니다. 예수의 시대에 그랬읍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까? 당신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든지 간에, 신문과 「라디오」의 보도를 살펴 보십시오. 당신 주변의 광경을 둘러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럴 것이라고 말한 그대로를 볼 수 있지 않읍니까?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 .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 . .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 . .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 후 3:1-5) 예수께서는 참된 사랑의 결핍이 몹시 심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그리스도인 회중도 심각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읍니다.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일반 세상에서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그의 자칭 추종자들 가운데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것은 위험을 초래합니다.—마태 24:12.

4. 감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정한 사랑과 같지 않다는 것을 누구의 경험이 예시해 줍니까?

4 당신은 무슨 종류의 사랑을 가지고 있읍니까? 그 사랑이 일반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 제자 혹은 생도로서 식별케 할 것이며, 하고 있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사랑이란 주로 감정 문제입니까? 감정이란,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느낌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일으켜지는 태도, 사상, 혹은 판단』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충동적인 느낌이나 정서에 의하여 행하며, 그들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느끼는 어떤 일들을 행하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제자로서 그의 초년에, 그러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한 차례 이상 난관에 봉착하였읍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장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충동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이의를 제출하였읍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이 감정적인 호소를 참된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셨읍니까? 기록은 말합니다. 『[반대자]「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 16:21-23.

5. 무엇이 감정적인 사람을 조종합니까? 그리고 참된 사랑이 어떻게 더 우월합니까?

5 감정은 진리가 생각을 지배케 하기보다도 느낌이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감정이란 그 길을 찾는 데 느낌에 의뢰하기 때문에, 눈먼 사람과 같읍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결과적으로 논리적인 생각의 필요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최선의 유익을 가져 오며, 관련된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식으로 문제를 저울질하지 않읍니다. 대조적으로 참된 사랑은 문제를 영속적인 각도에서 보며, 감정으로 고삐를 잡아 불안정한 일로 빠지지 않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일어나는 감정이나 느낌을 이미 선택된 생각에 따라서 올바른 방향으로 힘을 주도록 사용합니다.—로마 8:5-8.

6. (ㄱ) 사랑이란 제목에 관한 우리의 건전한 생각이 그에 관하여 무엇을 인정하도록 만들지도 모릅니까? (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왜 정직성은 우리로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만듭니까?

6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은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사랑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는 진술이 진리임을 인정케 합니다. (이사야 55:9) 이치의 능력은 인류 가족이 분명히 상호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신체적으로 심적으로 영적으로 많은 것이 필요하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을 우리 자신이 충족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른 것들을 충족시키는 데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고, 따라서 필요한 것들이 충족될 때,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할지 모릅니다. 논리는 사랑스런 사람이란 그러한 필요를 분별하고, 그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그것들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사랑이 그로 가장 중요한 필요를 즉시 결정하여 그것들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이지는 고려하여야 할 많은 요소와 환경이 있기 때문에, 참다운 사랑이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기를 좋아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 사람 자신이 순간적으로 원할지도 모르는 일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사실이 그의 장래의 복지를 위하여 있어야 할 것으로 나타내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지각있는 생각은 또한 이 모든 것 외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것을 진심으로 해 주기를 원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가, 진실로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그리고 현재와 장래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의 유익이 될 것인가, 동시에 이런 일들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우리 가운데 세워 나가는 데 관하여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말해 주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바란다면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야고보 1:17.

「희랍」어로 사랑

7. 『사랑』에 대한 「희랍」어 네 낱말의 기본적 뜻은 각각 무엇입니까?

7 「희랍」어를 말할 때, 사랑에 대한 네 낱말이 떠오릅니다. 성서 시대에, 「희랍」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낭만적 사랑 즉 이성 간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에로스」란 말을 사용하였읍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같은 동일한 가족 사이의 사랑은 「스토르게」란 말로 표현되었읍니다. 「필리아」란 말은 친구에 대하여 느끼는 정의를 나타내며, 이 사랑은 상호간 개성의 매력으로 인하여 좋아하고 애착하는 특징을 띠고 있읍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원칙에 근거해 있고 판단력과 의지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데서 초래하고, 이기적 관심사에서 떠나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까페」란 말을 사용했읍니다.

8. (ㄱ) 이 낱말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누구에게 도움을 받고 있읍니까? (ㄴ) 그들이 「아까페」란 낱말을 사용한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랑이어야함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8 이 말들이 「희랍」어이지만,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낱말들을 「희랍」어로 기록하고 그 뜻을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한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성서의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필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준 명확한 이해는 그들이 「아까페」란 말을 동일하게 사용한 까닭이었읍니다. 이 말은 (육체적 매력이나 가족 관계나 개성의 화합보다도 오히려) 원칙에 근거한 사랑을 말한 것이었읍니다. 사실상 「더글라스 성서 사전」은 「아까페」가 『고전적 「희랍」 저술에서 가장 드물게 사용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플라토」,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낱말을 드물게 사용하였지만, 「베드로」, 「바울」, 「요한」 및 마태 복음으로부터 계시록까지의 기타 필자들이 그전에 결코 사용되지 않은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의 기록에 「에로스」란 말은 나오지 않으며, 「스토르게」는 단지 세번뿐이고, 「필레오」란 동사는 백번도 나오지 않읍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에 「아까페」란 말은 약 250회나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아까페]이심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사용했읍니다. (요한 1서 4:8) 그는 예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아까페]」 그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였읍니다. (요한 13:35) 「바울」도 『영의 열매는 사랑 [아까페] . . . 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 낱말을 사용했읍니다. (갈라디아 5:22, 신세)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생산하는 원칙에 근거한 이런 종류의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생사에 관한 문제입니다. (갈라디아 6:8)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는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었읍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아까폐」의 동사 형식「아까파오」, [agapáo]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한 1서 3:14.

9. (ㄱ) 인류 역사 초에 사랑의 부족으로 인하여 무슨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읍니까? (ㄴ) 그러한 이기심의 표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셨읍니까?

9 이 사랑이 비이기적으로 일하게 하는 원칙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록된 말씀에서, 우주 주권 문제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자 중의 하나가 그의 창조주께 대적하여 「에덴」의 인간 첫 부부에게 그에 관하여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였읍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희생해서까지 그들을 자기 편에 서게 하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의 아내 「하와」에 대하여 단지 성욕적 사랑 즉 육체적 욕망만을 나타냈으며, 그의 천적 아버지로부터 돌아서서, 그의 아내의 불순종에 가담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그의 의로운 입장을 버리고, 그의 인간 완전함을 상실함으로써, 그는 그의 아내에게 참된 사랑을 보여 주는 능력을 현저히 감퇴시키게 되었읍니다. 그의 자녀들도 어쩔 수 없이 유전죄를 가지고 불완전한 가운데 출생하였으며, 그처럼 죽어가는 상태에서 출생 되었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기적 망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식어지지 않았읍니다. 세 반역자에게 공정한 선고를 내리실 때,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이 시작한 모든 악을 끝마칠 씨를 마침내 일으키실 그의 목적을 선언하셨읍니다. 이 주제가 하나님께서 그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땅에 보내실 때까지 사천년 간을 통하여 일을 발전시키심에 따라서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읍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의 아버지 편에 서서 이 문제를 지지하였고, 정당한 주권자이신 그에게 끊을 수 없는 성실을 실현하였고, 인류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 즉 그들의 죄와 사망의 유죄 선고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고 그들이 하늘의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는 대속을 마련하셨읍니다.—창세 3:14-24, 요한 3:16, 36.

10. (ㄱ) 성서의 예언은 진정한 사랑을 오늘날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전망을 제공합니까? (ㄴ) 사랑은 그들이 무슨 활동에 즉시 종사하도록 만들 것입니까?

10 성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왕국 정부를 통하여 순종심 있고 사랑스런 남녀에게 이 유익이 확장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이 왕국 정부에 의하여 온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 올 것이며 이기심과 폭력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위에 세워진 낡은 질서가 「아마겟돈」의 우주 전쟁에서 일소될 것입니다. 성서의 예언은 현재의 사건들과 상태가, 1914년 이래 우리가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고, 우리 세대가 머지 않아 증오, 탐욕, 분쟁, 살인, 강도, 억압, 간음, 중상 기타 하나님의 영을 무효케 하는 사랑없는 세상의 열매들이 땅으로부터 일소될 것을 볼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마태 24:7-14, 33-35; 갈라디아 5:21) 성서의 예언은 또한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지만, 한편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끝까지 견디어 가장 사랑스런 사업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 사업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끝이 올 것이다.』—마태 24:14, 신세.

11. 누가 진실로 우리에게 사랑의 참 뜻을 가르쳐 주십니까?

11 이제 우리는 왜 요한 1서 4:19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런 행동과 목적에 관한 지식이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만들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를 본받게 자극합니다. 본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그와 같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창세 1:26, 27.

낭만적 사랑

12, 13. (ㄱ) 성서가 이성간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거절합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읍니까? (ㄴ) 그러한 낭만적 사랑이 행복에 공헌하기 위하여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이것을 고대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의 경우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읍니까?

12 무엇보다도 먼저 「에로스」라고 「희랍」 사람들이 부른 이성간의 사랑을 고려해 보십시다. 아마 당신은 그러한 사랑과 우리가 말한 원칙적인 사랑(아까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궁금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필자들이 「에로스」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사랑도 또한 말하고 있으며 명백하고 솔직한 글로 그것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아담」과 「하와」,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이나 혹은 「솔로몬」의 아가나 잠언 5:15-19의 충고를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러한 사랑을 신성화한 것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라헬」이 『곱고 아리따우니』라는 표현을 읽을 수 있지만, 참다운 아름다움이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과 그들의 남편들에 대한 아내로서의 헌신이라는 것을 성서는 말하고 있읍니다. (창세 24:16; 29:1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첫째 편지 칠장에 부부 사랑에 관한 몹시 단도직입적인 충고를 주었읍니다. 그리고 그가 이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정숙한 체하는 점』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13 그러나 이 모든 점에 있어서 성서가 명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러합니다. 즉 그러한 낭만적 사랑은 단지 그것이 숭배되지 않고 조정되고, 그것을 조정하기 위하여 그 사랑을 원칙에 근거시킬 때, 행복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온 세상이 고대 「희랍」인들이 저지른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은 「에로스」를 하나님으로서 숭배하였고, 그의 제단에서 절하고 그에게 제물을 바쳤읍니다. 「로마」인들도 「에로스」의 상대물인 「큐피트」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행하였읍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성적 사랑의 숭배가 단지 타락과 방탕과 파괴를 가져 왔을 따름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아마 성서의 필자들이 이 낱말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4. 원칙에 근거한 사랑이 어떻게 대부분의, 아니 깊은 결혼 문제까지도 해결해 줍니까?

14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의견 대립의 문제는 이혼률이 껑충 뛰게 만들고 있읍니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지금 매 두건의 결혼에 대하여 한건의 이혼률을 가지고 있읍니다. 원칙에 근거한 사랑이 얼마나 크게 필요합니까! 부부들이 사랑 [아까페]은 『무례히 행치 아니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원칙을 기억할 때, 결혼의 가장 흔한 문제 얼마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 13: 5) 결혼의 분쟁과 싸움의 뿌리라 할지라도 「바울」의 균형잡힌 충고에 의하여 제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 [아까파오] 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에베소5:33) 남편과 아내가 그러한 사랑을 가지게 될 때, 그들의 목적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나를』,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를』,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필요한 것과 원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고,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이러한 이해심을 사랑스럽게 나타낼 것입니다.

가족 사회 안의 사랑

15 현재의 위기에 「스토르게」란 말로 표현된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리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15 연합되고 사랑스런 가족은 얼마나 즐거운 사회입니까? 그것은 그 자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족 가운데서 보낸 시간을 참으로 즐겁게 해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읍니다. 「바울」은 가족 성원 상호간의 이 자연적 애정 「희랍」어로 「스토르게」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밀접한 가족 관계를 강조하는 데 사용하였읍니다. (로마 12:10)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 시대의 일반 사람들 사이에 이 『자연적 애정』이 결핍될 것을 예언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3:3) 과거의 가족 사회는 확실히 현대 생활의 억압 아래 파괴되어 가고 있읍니다. 더 많은 가족들은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게 되어 가고 있으며, 한방에 모여서 상호간의 교제를 즐기는 일은 줄어가고 있읍니다. 성인, 소년 마찬가지로 그들의 범죄는 계속해서 가정들을 분열시키고 있읍니다. 이것은 단지 자연적 애정만으로써 현대의 억압 아래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원칙에 근거한 사랑은 가족을 함께 유지할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사랑 [아까페] 은 『온전하게 매는 띠』이기 때문입니다.—골로새 3:14.

16 자녀들의 생명에 충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에게 성서는 무슨 충고를 줍니까?

16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러분 부모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사랑하며, 성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자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 아래 낙원의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음 성귀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여러분의 할 일을 다하기 위하여 실제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여호와의 징계와 권위 있는 충고)로 양육하라.』 이 시대에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단순한 애정 이상이 필요합니다. 원칙에 근거한 사랑이 필요합니다.—에베소 6:1-4, 신세.

17 (ㄱ) 아이를 제멋대로 두는 것은 왜 참다운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 (ㄴ) 징계를 주지 않는 것이 어떻게 부모와 자녀에게 재난을 가져 오게 합니까?

17 적절한 징계를 주지 않고 아이의 모든 비위를 맞추고 있는 부모는 사실상 단지 자신에게만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는 흔히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저의 아이에게는 실제로 좋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읍니다. 저의 아이가 그것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나는 그의 감정을 상할 생각을 품을 수가 없읍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이의 장래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이기적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적절한 징계가 없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아이의 애정이 움츠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시간제 폭탄을 선물로 주겠읍니까? 그러나 어떤 부모는 그렇게 합니다. 자동차와 더불어 오는 책임을 인식하기에 너무 어릴 때 그에게 차를 주며, 이치적으로 허락하여서는 안될 넓은 범위의 자유를 소녀에게 주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애정이란 제단에 원칙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단지 거짓 숭배에 이를 따름이며, 너무나도 흔히 자식 사랑에 빠진 부모들이 더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에 굶주립니다. 『초달을 참아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한 잠언은 얼마나 현명합니까! (잠언 13:24) 징계는 가르침과 훈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징계하고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도 만일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것이라면, 우리의 자녀들을 그렇게 해야합니다.—히브리 12:5-11.

친구들 사이의 사랑

18, 19. (ㄱ) 「필리아」란 말로 표현된 사랑은 무엇에 근거를 둡니까? 그리고 그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무엇이 나타내 주고 있읍니까? (ㄴ) 그러한 우의적 사랑이 지속성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는 무엇이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은 또한 「희랍」어 「필리아」로 불려지고 있는 우의적 사랑입니다. 우정이 없는 생활이란 얼마나 황량한 것입니까! 우정은 보통 상대방에게서 그가 자연히 좋아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성품을 보는 데서 혹은 일정한 기간 함께 지내는 가운데 서로 좋아하고 정의와 충성을 경험하는 데서 유래합니다. 상호간의 신뢰와 확신이 친구 사이에 흐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자신도 그의 제자 세 사람,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특별한 우정을 나타내셨읍니다. 그 셋 가운데서도 「요한」이 특별히 예수에 의하여 사랑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읍니다.—요한 19:26; 20:2.

19 그러나 우리의 우정이 지속성있는 가치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는, 그것이 먼저 원칙적인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형제 우애(philadelphía)에 사랑(agápe)을 공급하라.』고 권한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 후 1:7)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우정은 쉽게 아첨으로 변질하게 되고 깨뜨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에 다른 사람과 함께 가담하게 되고,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좋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예가 되지 않으며 우리 이웃에게도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아까페]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로마 13:10.

20. 하나님의 우정의 표현은 어떻게 우리가 우정을 표현하는 일을 인도합니까?

20 사실상, 원칙적인 사랑이 우리가 친구들을 고르고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도 우리를 인도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필레오] 하심이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동했겠읍니까? 그들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대우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예수의 다음의 말씀이 그것에 대답해 줍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는고로.』 (요한 16:2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합당한 자들에게만 그의 애정 혹은 우정을 베푸셨읍니다. (야고보 2:23) 그러므로 『세상과 벗된 [필로스]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우리가 경고받은 것은 충분한 이유있는 말입니다. 우리의 우정은 첫째로 하나님의 벗들과 그의 사랑받은 자들에게 베풀어져야 합니다.—야고보 4:4.

21. 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지 않읍니까?

21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는 데 제한을 줍니까? 즉 우리들 주위에 우리를 치게 합니까? 그렇지 않읍니다. 왜냐 하면, 원칙적인 사랑[아까페]은 애정[필리아]이 감히 가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매력을 느끼지 않은 곳에도 갈 수 있으며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보상은, 단지 결혼 배우자나 가족 성원이나 혹은 친근한 벗들에게 행하여지는 사랑과 헌신을 표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6-48) 그러므로 우리가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바로 그렇게 하는 데 달려 있읍니다.

22. 우리 각자가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할 무슨 질문들이 있읍니까?

22 잠간 멈추어 자문해 보십시오. 나의 사랑은 어떻게 평가되는가? 원칙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인가? 단지 내가 자연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즉 결혼 배우자, 부모, 자녀 혹은 내가 좋아하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만을 사랑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영원한 복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의 나의 관계가 만족을 주기 때문에 표현되는 애정인가? 나의 사랑은 얼마나 진정한 것인가? 당신의 전 생명의 가치가 당신의 대답으로 평가될 수 있읍니다.—고린도 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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