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직면해서도 하느님을 섬김
주앙 만코카의 체험담
때는 1961년 6월 25일, 군인들은 앙골라의 루안다에서 열리고 있던 우리의 그리스도인 집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우리 30명은 투옥되었으며 너무나 잔혹하게 구타를 당한 나머지 30분마다 군인들이 와서 죽은 사람이 있지나 않은지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리 모두가 살아 남은 것을 보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분명 참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구타를 당한 다음 나는 상파울루 교도소에 5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후 9년 동안 이 교도소 저 교도소로 이송되면서 더 많은 구타와 궁핍과 심문에 시달렸습니다. 1970년에는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번에는 지금의 벤티아바인 상니쿨라우에 있는 악명 높은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 2년 반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법을 준수하는 시민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에 근거한 내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해서 투옥되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는지가 아마 궁금할 것입니다.
훌륭한 교육의 기회
나는 1925년 10월에 앙골라 북부의 마을인 마켈라두줌부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1932년에 사망하자 어머니는 나를 벨기에령 콩고(지금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 사는 외삼촌에게 보내 함께 살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를 부양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은 침례교인이었으며 내게도 성서를 읽도록 권하였습니다. 나는 외삼촌이 다니는 교회의 신도가 되기는 하였지만, 배운 내용들로 인해 영적 굶주림이 채워지거나 하느님을 섬겨야겠다는 동기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삼촌은 나를 학교에 보내 주었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포르투갈어도 배웠습니다. 학업을 마친 다음에는 레오폴드빌(지금의 킨샤사)에 있는 중앙 라디오 방송국에 무선 전신 기사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스무 살에 마리아 포바와 결혼하였습니다.
새로운 종교 집단
같은 해인 1946년에 나는 침례교 신도로서 교육을 잘 받은 한 앙골라인 성가대 지휘자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앙골라 북부에 사는 키콩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천국, 세계의 희망」이라는 영어로 된 소책자의 포르투갈어 번역판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영어 소책자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하여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배부되고 있었습니다.
그 성가대 지휘자는 이 소책자를 키콩고어로 번역하여, 벨기에령 콩고에서 일하고 있던 우리 앙골라 사람들과의 주간 성서 토의를 사회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성가대 지휘자는 미국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본부에 편지하여 출판물을 더 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알려 준 지식은 교회의 가르침과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참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국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명확히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에 들어 있는 성서의 소식이 그때까지 침례교에서 들었던 어떤 내용과도 차이가 있음에 유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과 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시 83:18; 이사야 43:10-12)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성서의 약속으로 인해 내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시 37:29; 계시 21:3-5.
나는 성서 진리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았지만 예언자 예레미야가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 여호와에 관해 말하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0:9) 우리의 성서 연구 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집집으로 전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타자기로 친 초대장으로 사람들을 초대해서 외삼촌 집 마당에서 공개 집회를 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한 집회에 무려 78명이나 되는 사람이 참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앙골라인 성가대 지휘자의 지도 아래 새로운 종교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투옥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와 관련 있는 어떤 단체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949년 10월 22일에 우리 몇 사람은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에 앞서 판사는 나와 개인 면담을 하고는 손을 써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정부 기관에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의 전파 활동으로 형성된 그 종교 집단과의 관계를 끊어야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교도소에 있은 지 두 달 반쯤 지났을 때, 당국에서는 우리 가운데 앙골라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앙골라에 돌아오자 포르투갈 식민 정부 역시 우리의 활동을 의심하여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였습니다. 우리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계속 벨기에령 콩고에서 오게 되었고, 결국 1000명 이상이 앙골라 전역에 흩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탁월한 종교 지도자인 시몬 킴방구의 추종자들도 우리 종교 집단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연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는데, 오직 영매술자만이 성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던 성가대 지휘자를 비롯하여 우리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한 생각을 지지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참으로 워치 타워 협회를 대표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열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 전체가,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배척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 집단 성원들 중에는 우리 몇 사람이 전파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당국에 밀고하면서 우리를 정치 단체의 지도자들로 고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1952년 2월에 우리 몇 사람은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를루스 아구스티뉴 카디와 살라 라무스 필레문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문도 없는 감방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한 우호적인 교도관이 우리의 아내들로부터 음식을 받아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워치 타워 협회에서 발행한 소책자들의 사본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타자기까지 갖다 주었습니다.
삼 주 후 우리는 앙골라 남부의 사막 지역인 바이아두스티그레스로 이송되었습니다. 우리의 아내들도 우리를 따라 그곳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아 한 수산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는 어선이 정박할 항구가 없었기 때문에 아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물 속으로 걸어 다니며 물고기를 담은 무거운 짐을 배에서 날라 와야 하였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우리는 우리 종교 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이 계속 성서를 연구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토쿠 즉 그 성가대 지휘자를 따르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토쿠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대한 만남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 있는 동안 우리는 워치 타워 협회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 지부의 주소를 알게 되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의 편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전달되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우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성서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본부에서는 우리에 관해 알고는 우리와 접촉할 특별한 대표자를 파견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 대표자는 외국에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한 경험이 있는 선교인인 존 쿠크였습니다.
쿠크 형제는 앙골라에 도착하고서도 몇 주가 지나서야 포르투갈 당국으로부터 우리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1955년 3월 21일에 바이아두스티그레스에 도착하였으며, 닷새 간 우리와 함께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가 성서에 대해 설명해 준 내용이 매우 만족스러웠으므로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여호와 하느님의 유일한 참 조직을 대표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쿠크 형제는 방문 기간 중 마지막 날에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이라는 주제로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공개 강연에는 총 82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는 바이아두스티그레스의 최고 행정관도 있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그 연설 내용을 인쇄한 사본을 받았습니다.
앙골라에서 5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쿠크 형제는 토쿠파에 속한 사람 여러 명을 만나 보았는데, 그 중에는 그들의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동료들과 나는 당국에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1956년 6월 6일자로 공식 서한을 작성하여 “모사메데스 지역 총독 각하” 앞으로 보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토쿠의 추종자들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에 속한 사람들”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숭배의 자유를 부여해 줄 것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형량이 2년이나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침례를 받기까지 일어난 일들
마침내 우리는 1958년 8월에 풀려났습니다. 우리가 루안다에 돌아와 보니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집단은 바로 전해에 선교인인 머빈 패슬로가 조직한 것이었는데, 그는 존 쿠크의 후임으로 앙골라에 파견되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추방되고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또 다른 선교인인 해리 아넛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서자마자 체포되었으며 또한 그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우리 세 사람 역시 체포되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 즉 최근에 침례받은 포르투갈인 증인인 마누엘 곤살베스와 베르타 테이셰이라는 더 이상 어떤 집회도 열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는 풀려났습니다. 아넛 형제는 추방되었으며, 나는 내가 더는 증인이 아니라고 밝히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다시 바이아두스티그레스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곱 시간 동안 심문을 받고는 어떤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은 채 풀려났습니다. 일 주일 후, 나는 마침내 침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또한 내 친구들인 카를루스 카디와 살라 필레몬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루안다 근교의 무세케 삼비장가에 방 하나를 세내었는데, 바로 이곳에 앙골라 여호와의 증인의 첫 번째 회중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시작된 박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는 관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를 염탐하러 왔다가 집회를 너무나 재미있게 본 나머지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치 상황은 변하고 있었으며 1961년 2월 4일에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후로 우리의 상황은 더욱더 어려워졌습니다. 우리에 대해 거짓 소문이 나돌고 있기는 하였지만 우리는 3월 30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성공적으로 거행하였는데, 참석자 수는 130명이었습니다.
6월에는 내가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고 있는데 헌병들이 우리의 집회를 해산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풀려났지만 그곳에 있던 남자들 30명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계속 나무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그 후로 삼 개월 동안 나는 피를 토하였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나를 구타했던 사람도 내가 죽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구타를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침례받지 않은 새로운 성서 연구생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양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그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사실을 군인들은 매우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들 중에는 감동을 받아서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살아 남을 수 있게 해 주셨다며 하느님을 찬양하기까지 하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 성서 연구생들은 대부분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으며 현재 그리스도인 장로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베스트레 시망은 현재 앙골라 지부의 지부 위원입니다.
9년 간 겪은 고통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그 후 9년 동안 여러 면으로 고통을 당하였으며, 교도소나 노동 수용소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 모든 곳에서 나는 정치범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지금은 침례받은 증인입니다. 아내인 마리아와 아이들은 나와 함께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세르파핀투 수용소에 있을 때, 정치범 네 명이 탈출하려다 붙잡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탈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겁을 주기 위해 그 정치범들을 모든 죄수들 앞에서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나중에 수용소장은 아내와 우리 아이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전파 활동을 하다 발각되면 탈출하려고 했던 죄수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게 될 것이오”라고 하며 나를 위협하였습니다.
1966년 11월, 결국 우리는 상니쿨라우에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끔찍스런 죽음의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나는 겁에 질리게 되었습니다. 그 수용소의 행정관이 상파울루 교도소에서 내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구타했던 사람인 시드였기 때문입니다! 매달 수십 명의 죄수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으며, 우리 가족은 그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지켜 보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내는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결코 완전하게는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루안다로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큰 딸들인 테레사와 주아나 둘이서 그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자유를 얻었다가 다시 투옥되다
이듬해인 1970년 9월에 나는 석방되었으며, 가족과 아울러 루안다의 모든 형제들과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떠나 있던 9년 동안 전파 활동이 얼마나 많이 발전하였는지를 보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내가 투옥되었을 때인 1961년에 루안다의 회중은 네 개의 작은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네 개의 큰 회중이 있었으며, 여호와의 조직에서 파견한 여행하는 대표자가 6개월마다 방문하여 적절히 조직하고 도움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된 것이 몹시 기뻤지만 그 자유는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지금은 없어진 조사 및 국방 담당 경찰(PIDE)의 국장이 나를 불렀습니다. 딸 주아나가 있는 데서 나를 치켜세운 다음 그는 내게 어떤 서류를 건네 주면서 서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서류에는 내가 PIDE 소속 정보 제공자로 활동하도록 요청하면서 나의 활동에 대해 많은 물질적 보상을 약속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또 상니쿨라우로 가겠느냐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가면 다시는 석방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작 4개월 간 자유를 누리고 난 다음인 1971년 1월에 그 위협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루안다에 사는 그리스도인 장로 중 총 37명이 체포되어 상니쿨라우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1973년 8월까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석방되었지만 계속 박해를 받다
1974년에 포르투갈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공포되었으며 그 후로 이 자유는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들로 확산되었습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그 해 3월에 우리는 처음으로 자유롭게 순회 대회들을 여는 참으로 감격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루안다의 노천 경기장에서 열린 이 기쁨에 넘치는 대회들에서 나는 공개 강연을 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정부가 우리의 중립 입장을 반대하는 데다 내전이 앙골라 전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였기 때문에 백인 증인들은 앙골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앙골라 형제 세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포르투갈 지부의 감독 아래 앙골라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내 이름이 신문에 나거나 라디오에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국제 제국주의의 앞잡이이며 앙골라의 증인들이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는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소환되어 루안다 주의 초대 주지사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존경심 어린 태도로 여호와의 증인은 세계 전역에서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추종자들도 그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사야 2:4; 마태 26:52) 내가 식민 통치 기간에 교도소와 노동 수용소에서 17년 이상을 보냈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는 나를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앙골라에서 여호와를 위한 증인으로 섬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우리 집은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집회 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모든 면으로 압박을 받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속박되지는 않았습니다.’ (고린도 둘째 4:8) 우리는 결코 봉사의 직무에서 무활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계속 전파 활동을 하고 여행하는 봉사자로 섬기면서 벵겔라, 우일라, 우암보 지역에 있는 회중들을 강화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필레문 형제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1978년 3월에 우리의 전파 활동에 다시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광적인 혁명주의자들이 나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앙골라 주재 나이지리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나이지리아 증인의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한 달 후에 사태가 진정되자 나는 순회 감독자로 형제들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금지령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앙골라 사람들이 우리의 전파 활동에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증인이 되는 사람들의 수가 놀랍게 증가하자 전국 위원회가 임명되어, 포르투갈 지부의 감독 아래 앙골라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나는 여러 차례 포르투갈에 가서 자격 있는 봉사자들로부터 귀중한 훈련을 받았으며 아울러 필요한 치료도 받았습니다.
마침내 얻은 전파의 자유!
노동 수용소에 있었을 때, 정치범들은 자주 나를 조롱하면서 내가 전파 활동을 계속하면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응수하곤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문을 여실 때가 아직 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분이 문을 여시면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을 겁니다.” (고린도 첫째 16:9; 계시 3:8) 그처럼 제한받지 않고 전파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더욱 활짝 열렸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앙골라에서 더 많은 숭배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992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공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1996년에는 앙골라에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나는 지부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내가 여러 해에 걸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어떤 식으로든지 항상 돌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다섯은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 주아나는 작년에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남은 자녀 중 넷은 침례받은 증인이며, 다른 한 아이는 아직까지는 침례의 단계를 밟지 않았습니다.
쿠크 형제가 1955년에 우리를 방문하였을 때, 앙골라 사람 중에서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다 합해서 네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나라에 3만 8000명이 넘는 왕국 선포자들이 있으며, 매달 6만 7000건이 넘는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습니다. 현재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보람 있는 결실입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나의 불타는 욕망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참으로 감사합니다!—이사야 43:12; 마태 24:14.
[20, 2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앙골라
마켈라두줌부
루안다
상니쿨라우 (지금의 벤티아바)
모사메데스 (지금의 나미베)
바이아두스티그레스
세르파핀투 (지금의 메농게)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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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3면 삽화]
아래: 1955년에 존 쿠크와 함께. 왼쪽에 있는 사람은 살라 라무스 필레문
오른쪽: 42년 후에 존 쿠크와 재회했을 때
[23면 삽화]
아내 마리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