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링’에서 우리가 이름을 내려고 하던 일
때는 1966년 1월 21일이었다. 내가 권투 ‘링’ 내 ‘코오너’에 앉았을 때 나는 이번이 명성과 재산의 문턱에 서는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이번 시합에서 이겨서 ‘프랜시스코 산 호세이’가 ‘스페인’의 ‘헤비’급 ‘챔피언’으로 선언되는 일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구라파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생각은 갑자기 울리는 ‘공’ 소리로 중단되었다. 제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나의 상대자인 ‘마리아노 에체바리아’도 분명히 나와 비슷한 야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12‘라운드’까지 계속되는 치열한 대결로 들어갔다. 우리는 둘 다 강자였다. 그래서 사정을 보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날에 나는 득점 차로 ‘스페인’의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스페인’의 서북쪽에 있는 나의 고향인 ‘자모라’의 ‘토로’에서 나는 어릴 때 거리의 싸움꾼으로 알려졌다. 나는 ‘가톨릭’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학교 교육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방종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시작했다.
곧 나는 한 지방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는 내가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는한 나를 받아주지 않을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소 변화를 했으나 아직 싸움은 하고 싶었다. 합법적이고 “고상한” 유일한 방법은 권투 선수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권투를 시작했다. 1963년에 나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지중해 선수권 시합에 ‘스페인’의 대표로 출전하여 동 ‘메달’을 탔다. 하지만 나는 다음 해의 ‘도오쿄 올림픽’에 출전할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대신 ‘프로’로 전향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나는 모험을 하면 그 대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가? ‘스페인’의 ‘헤비’급 ‘챔피언’ 왕관을 차지한 6개월 후 나의 경쟁자였던 ‘에체바리아’가 6‘라운드’에서 나를 때려 눕히고 말았다. 나는 ‘챔피언’을 잃고 말았다. 그 후 4년 동안 23회를 싸워 11회는 이기고, 9회는 지고 3회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점차적으로 나는 ‘프로모우터’들과 ‘매니저’들이 다른 선수들의 출세를 추진하므로 내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969년에 한 ‘스포오츠’ 기자는 나를 “화해의 희생물”이라고 썼다. 나는 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두번은 이른바 ‘스페인’말로 ‘통고’란 것에 협조했다. 이 말은 조작된 시합이란 뜻이다. 1967년에 내가 비슷한 협상에 동조하기를 거부했을 때 ‘레프리이’는 내가 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많은 경우 ‘챔피언’은 ‘링’ 위에서가 아니라 ‘프로모우터’의 사무실에서 결정되고 시합은 미리 결정된 대로 진행된다.
권투를 시작한 초기에 나는 동생 ‘카알로스’를 권투에 손을 대 보라고 설득했다. 여기서부터는 동생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형, ‘프랜시스코’가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서 성공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전국 횡단 경주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형을 존경하고 그의 본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1963년 어느날 형은 집에 와서 자기가 나의 첫 시합을 주선했다고 발표했다. ‘벨라돌리드’ 권투 연맹의 승인을 얻어 나는 우리 고향에서 ‘산체즈’란 권투 선수와 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겁이 났다. 그러나 나는 고향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판명된 바와 같이, 나는 2회전에서 ‘케이 오우’로 이겼다. 관중은 흥분하여 나를 어깨에 메고 고향 도시를 다니면서 축하해 주었다. 나는 성공했다는 생각에 취해 있었다. 그 승리의 첫 맛을 보고 나는 권투 “벌레”에게 물렸다. 그래서 나도 ‘링’ 위에서 명성과 돈을 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올바른 훈련과 시합을 갖기 위해 ‘마드리드’로 이사했다. 1965년과 그 이듬해 또 나는 나의 체중 급수의 ‘스페인’ ‘아마추어 챔피언’이 되었다. 나는 ‘프랑스’와 싸울 ‘스페인’의 전국 대표 ‘팀’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포루투갈’에서 국내 수준의 시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아마추어’ 시합은 ‘프로’ 선수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다.
드디어 오랫 동안 기다렸던 그 날이 왔다—1966년 11월 23일이었다. 나는 ‘마드리드’에서 ‘벤 바칠’과 나의 ‘프로 데뷰’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케이 오우’로 이겼다. 그때 나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년 후에 ‘벤 바칠’을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국제적인 대결자들이 줄을 이어 나의 주먹 앞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케이 오우’로 이겼고 일부는 득점차로 이겼다. 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준 시합이 ‘바아셀로나’에서 1969년 12월 30일 노련한 ‘나이제리아’ 권투 선수인 ‘버어나아드 다우두’와의 대전에서 벌어졌다.
나는 ‘링’ 밖에서는 조용하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지만 일단 시합이 시작되면 잔인한 ‘펀칭’ 기계로 변하여 경쟁자를 때려 눕히는 데만 전념한다. 나는 ‘아마추어’ 시절에 한 ‘트레인너’가 해 준 말을 기억한다. “네가 ‘링’에 들어가면 최선을 다해 대적을 때려 눕혀야 한다.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나가서 그를 때려서 박살을 내라. 그는 너의 원수야. 동정을 하지 말라.”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나의 강타는 목표를 빗나가고 있었다. 관중은 안달이었다. 그들은 피를 보기 원했다. 8회전 시합중 단지 1회전만 남아 있었다. 나는 ‘코오너’에서 나의 ‘세컨드’의 조급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 ‘라운드’에서 그를 끝장내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번 시합에서 지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나는 화가 치밀었다. ‘공’이 울리자마자 나는 분노와 증오에 가득차 나갔다. 갑자기 그 ‘라운드’ 중간쯤에서 나는 그를 왼쪽 ‘후욱’으로 턱을 강타했고, 다음에 오른손으로 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몸을 움추리고 ‘로우프’에 기대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다시 강타했다. 그는 넘어졌고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간단한 우승 의식을 마친 다음 나는 빨리 ‘링’을 떠났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고 ‘빌바오’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내가 기차에서 내리자 거기에는 아내와 누이동생이 나를 마중하여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웬일인가? 그들은 소식을 알려 주었다. ‘다우두’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느낀 반응은 묘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오랫 동안 심히 흐느껴 울었다. 나의 주먹이 다른 사람을 죽게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 본성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아주 쉽게 정당화해 버린다! 나는 곧 권투를 계속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나의 직업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였다. 권투는 일종의 ‘스포오츠’다. 네 잘못은 없다. 그 상해는 아마 이전 시합에서 입은 것일 거다.” “이제 네가 얻은 명성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숙히는 아무 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권투가 그를 죽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처형자는 바로 나였었다.
3개월 후 나는 ‘마드리드’에서 다시 ‘링’ 위에 올랐다. 그들은 ‘텔레비젼’ 중계중 그 비극적인 경험을 한 후의 나의 직업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나는 권투 생활을 계속할 결심을 했다고 대답했다.
계속 승리를 하여 나는 결국 1970년 12월 25일에 위대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헤비 웰터’급 왕관을 위한 시합이었다. 장소는 ‘비즈카이아’의 ‘빌바오’였고, 상대자는 경험있는 선수인 ‘조세 마리아 마드라조’였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젊고 강했다. 6회전에서 나는 그를 두번이나 ‘캔버스’에 눕혔다. 그는 많은 강타를 당하고 있었다. 결국 ‘레퍼리이’가 시합을 중단시키고 나에게 ‘티이 케이 오우’승을 선언했다. 드디어 나는 형이 4년 전에 이루었던 것을 이룩하였다. 나는 ‘스페인’의 ‘챔피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목표를 달성하기 1년 전에 형 ‘프랜시스코’는 권투에서 은퇴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기보다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 매우 알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들은 분명히 성실했다. 나는 그들이 가르쳐 주는 것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성서를 알고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주간 도움으로 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란 책으로 성서를 연구했다. 그 ‘증인’은 권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14장 “참 종교를 식별하는 방법”을 공부할 때, 나는 그리스도인을 식별해 주는 하나의 뚜렷한 표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예수의 이러한 말씀을 배워 알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 13:35) 그 책은 계속해서 “그것은 매일 생활 모든 면에 깊이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의 경우에는 거기에 권투가 관련되어 있었다.
하나의 특별 시합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동생과 나는 직업적으로 알려진 ‘산 호세이’ 1세와 ‘산 호세이’ 2세로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나의 생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권투를 계속해야 하고, 또 계속할 수 있는가? 여러 번 철저한 자기 반성을 한 다음 나는 1969년 10월 17일 ‘빌바오 불링’에서의 시합을 나의 마지막 시합이 되게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종교적 양심의 이유로 ‘링’에서 은퇴한다는 것을 신문에 발표했을 때 그것은 정말로 깜짝 놀라게 하는 소식이었다. 동생 ‘카알로스’는 4개월의 성서 연구가 나에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권투계의 “친구”들은 나의 결심을 바꾸게 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구라파 왕관을 위해 시합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의했다. 나에게는 그 돈이 필요했지만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은퇴하여 가족과 함께 고향인 ‘토로’로 왔다. 여기에서 그 이후 나는 다른 종류의 싸움인 그리스도인 싸움을 해 왔다. 성서 진리는 나의 인간성을 변화시켰다. 그 예를 한가지 들자면, 얼마전에 내가 성서를 토론하기 위해 호별 방문을 하고 있을 때 한 억센 친구가 나를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왕년에라면 그러한 것은 턱을 강타하여 때려 눕히라는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말로써 그의 나쁜 기분을 누그러지게 하고 대화를 평화스럽게 끝맺었다.—디모데 후 2:24-26.
나의 인간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주먹의 사용을 분별력의 사용으로 대치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가족과 함께 지내고, 농장을 돌보고, 동물들을 키우면서 작은 방법으로나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히 더욱 만족한 생활이다. 이것은 휘황찬란한 권투 시합장의 조명등과 변덕스러운 관중의 피를 보기 원하는 욕망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것인가!—로마 12:1, 2; 골로새 3:10, 12.
‘링’을 떠나겠다는 나의 결심이 동생 ‘카알로스’를 당황하게 했지만, 그는 권투 생활을 계속했다. 그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형이 은퇴한지 약 1년 후에 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의 형을 방문했던 바로 그 ‘증인’이었다. 나는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얼마의 대화를 나눈 후 그는 성서를 연구할 것을 권했다. 나는 “알아보는 것은 해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무엇이 형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매우 알고 싶었다. 그래서 연구를 수락했으나 나는 종교 때문에 권투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내가 제일 처음 크게 놀란 것은 성서의 출애굽기에서 10계명을 읽을 때였다. 나는 학교 시절부터 그 계명들을 외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성서에 들어 있는 이 계명들은 교회법에 나오는 것과 달랐다. 예를 들어, 두번째 계명 즉 숭배를 위해 형상 사용을 금하는 계명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 생략된 것은 10번째 계명을 두 계명으로 조작함으로 교회법에서는 메꾸어져 있었다. 그 조작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출애굽 20:4-6.
성서 연구를 몇번 한 후 나는 양심과 진정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리스도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내가 성서 연구를 계속한다면 나의 권투의 날도 끝날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몇주일 동안 연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몇주일 동안은 그 ‘증인’이 잊어 버리고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71년 10월 10일에 있은 ‘살라만카’의 ‘에인전 귀날도’와의 시합에서 나의 ‘헤비 웰터’급 왕관을 방어할 때 나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링’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관중은 “그를 혼내 주라. ‘산 호세!’ 빨리 끝내 버려라!” 또 “왼손으로 후려치라.” 하는 등의 말로 외쳤다. 나의 대적은 자기 ‘코오너’에서 내게서 왕관을 빼앗아 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의 양심은 나를 강타하고 있었다. 요한 1서 4:20의 성서의 말씀이 생각났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내가 하려는 일을 합리화하려고 애쓰는 동안 다른 여러 가지 성귀들이 또한 홍수처럼 나의 정신을 공격하여 나의 행동을 정죄했다.
‘공’이 울렸다. 나는 적과 정면으로 맞대고 있었다. 싸움을 계속하자 나의 양심은 나를 평화스럽게 두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오, 하나님,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참으로 지루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챔피언’으로서 ‘링’에서 은퇴하기를 원했다. 나의 자존심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타이틀’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권투를 그만둔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드디어 시합은 끝났다. 그러나 나의 보편적인 ‘케이 오우 펀치’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겼는가, 졌는가? 나는 판결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레프리이’는 ··· 무승부라고 선언했다. 나는 아직 ‘챔피언’이었다!
나는 이제 구라파 선수권을 위한 도전자로 공식적으로 고려되었다. 나는 수년 동안 그 기회를 위해 일했고 싸웠다. 나는 백방으로—양심으로부터 그리고 권투 관련자들로부터—압력을 받았다. 나는 계속 성서 연구를 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 결과 나의 정신을 재촉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권투 용어로 표현하자면, 성서는 나를 ‘로우프’로 몰아붙였고, 나는 ‘캔버스’에 쓸어질 지경이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리고 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란 성귀들을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고린도 전 9:27; 로마 13:10.
나는 다른 시합을 수락하지 않고 여러 달을 간신히 보낼 수 있었다. 그러자 1972년 2월에 나는 권투 연맹으로부터 앞으로 15일 동안 나의 ‘타이틀’을 방어하든지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고 알리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기도로 여호와께 나아가서 도움과 지도를 구하였다. 그 도움이 왔고 나는 종교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이 발표는 분명히 ‘뉴우스’ 보도 기관의 반응을 자극했다. 나는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텔레비젼’에서 두번 회견을 가졌다. 많은 ‘스포오츠’의 추종자들은 나의 결정을 비난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 자신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참된 승리를 한 것이다.
때때로 나는 권투를 그만 둔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권투 복장을 하고 우리의 손들을 싸우기 위해 붕대로 감은 형과 나의 사진이 신문에 표제 기사로 실린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 표제는 이러하다. “‘카알로스’와 ‘프랜시스코 산 호세이’가 얼굴을 맞대고 있다. 체급은 분명히 다르지만 이 두 형제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덧없는 ‘링’의 영광에서 찾고 있다.” “덧없는 영광”이란 말에 유의하라. “덧없는”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하루 동안에만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한 ‘희랍’어 어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권투계에서 이 말은 정말로 참되다!
나는 한때 유명했던 은퇴한 얼마의 권투 선수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처절한 광경이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잠간 있다가 덧없이 사라진 영광을 회상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가? 권투 선수에게는 이겨서 승리의 결과로 돈을 벌 때에만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지기 시작하면 그 “친구”들은 사라진다.
재산에 대해 말하자면, 분명히 나는 권투에서 돈을 벌지 않았다. 돈의 3분지 1가량은 ‘트레이닝’과 운영비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시합이 없는 기간 중에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쓰게 된다.
하지만, 나는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이제 한 우상의 빤짝하는 순간적인 영광이 아니라 참되고 영속적인 가치에 기초를 둔 우정을 가진 진정한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곳 ‘스페인’ 북부, ‘비즈카이아’의 ‘산 살바도르 델 발레’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함께 하는 나의 영적인 형제들이다. 그리고 내가 이 일에 참여함에 따라 이 우주에서 가장 웅대하신 인격자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 된 특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여러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면, 내가 여러 해 전에 권투 선수로서 싸우던 ‘스포오츠’ 경기장에서 그 대회들이 열리기 때문에 내가 권투를 하던 시절의 추억이 종종 회상된다. 한 예로서 1978년에 ‘바아셀로나’ ‘뮤니시펄 스포오츠 팰리스’에서 열린 국제 대회가 있다. 바로 거기는 내가 ‘나이제리아’의 권투 선수 ‘다우두’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거기에는 ‘케이 오우’를 부르짖는 피에 목마른 관중이 아니라 사랑과 정적을 호흡하는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태도의 청중으로 차 있었다.
일찌기 1974년에 내가 ‘살라만카’ 축구장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어디서 본 듯한 한 억센 ‘증인’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지나쳐 갔다가 내가 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그도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우리는 놀라서 동시에 “당신은 ‘벤 바칠’/당신은 ‘산 호세’ 2이세지요?” 하고 외쳤다. 틀림이 없었다. 이전에는 ‘링’ 위에서 서로 원수였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인 형제로 연합해 있었다!
형 ‘프랜시스코’와 나는 그 탐욕적인 권투계를 그 잔인성과 폭력, 탐욕, 조작과 착취와 함께 포기해버린 것을 기뻐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보상, 하나님의 승인 및 영원한 생명을 주는 더 나은 생활의 길 즉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히브리 11:6; 로마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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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에 ‘챔피언’은 ‘링’ 위에서가 아니라 ‘프로모우터’의 사무실에서 결정되고 시합은 미리 결정된 대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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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권투가 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처형자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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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생활 모든 면에 깊이 영향을 주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경우에는 권투가 생활에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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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용어로 말하자면 성서는 나를 ‘로우프’로 몰아 붙였고, 나는 ‘캔버스’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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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영광—단 하루의 영광. 이 말은 권투계에서 정말로 참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