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그것을 추구하는 일
‘미국 독립 선언문’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에 대한 권리를 선언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추구라는 말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추구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동분 서주한다. 운동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몰려가고, 전자 오락을 하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있고, TV 앞에 붙어 앉아서 저녁 시간을 보내고, 흥미진진한 일들로 꽉찬 주말을 계획하며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을 관광하는 일, 그렇지 않으면 꼬리를 물고 열리는 사교 행사에 참여하느라 분주하게 보내는 일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정의 고조를 맛보기 위해 해로운 마약에 의존하기까지 한다. 조용히 앉아서 자신과 마주보고 따분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르는 빈 시간을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한다. 그러나, 그처럼 광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획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새로운 생활 방식들을 추구한다. 결혼이 더는 구속력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며, 어떤 이유로든지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이혼하여 자녀들은 부모들 사이에서 천더기가 되고 만다. 독신자들은 난잡한 ‘프리 섹스’에 빠진다.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 생활을 하며, 아무 서약도 하지 않고 아무 단서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기분 내키는 대로 갈라설 수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들끼리 동거 생활을 하는가 하면, 제각기 성 도착 행위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 모든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오직 육에 심고 있을 뿐이며 결국 정신적 고통, 죄책감, 질투, 상처를 주는 별거 및 질병—흔히 불치병—을 거두게 될 것이다. “신도덕”은 과거의 부도덕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결과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물질의 소유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을 축적하는 것은 더욱더 많이 모으고 싶어하는 소유욕만 강해지게 할 뿐이다. 광고업체들은 그들이 고안해낸 매혹적인 모습, 곧 인기있는 유명 상표의 옷, 술, 승용차, 갖고 싶은 집, 그에 더하여 그들 주위의 외관을 꾸밀 만한 수없이 많은 것들로만 되어 있는 모습을 퍼뜨려, 그러한 욕망을 적당히 자극한다.
과학은 물질주의의 홍수가 범람하게 한다. 생물학자 ‘르네 듀보’가 이렇게 한탄한 바와 같다. “너무나도 자주, 과학은 지금 인간의 필요와는 무관한, 그리고 오직 새로운 인위적인 욕망을 일으키기 위한 기술적인 응용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그것이 “행복이나 생활의 의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부유한 나라들에서, 공학은 지각없는 소비를 위한 무분별한 생산에 이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쓰는 듯한 소비 성향을 거의 강요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인 가치관은 밀려오는 물질주의에 눌려 거의 도외시되고 있다.
‘스튜어트 우달’은 미국의 내무성 장관이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가장 지저분한 폐차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이동이 심한 민족이면서, 가장 심한 교통 혼잡을 겪고 있다. 우리는 가장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면서, 가장 오염된 공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여러 해 전에 그런 말을 하였으며, 그는 그것을 “대륙적인 규모의 재난”이라고 불렀다. 여러 해 후인 지금, 그것은 세계적인 규모의 재난이 된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대도시의 시장은 “만일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릎까지 빠지는 쓰레기 위에 서서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세대로 기억될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여러 해 후인 지금, 많은 과학자들은 우리가 마지막 세대 즉 마지막 기간이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내면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라 외형적인 소유물에 의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일에 길들여진다면, 그러한 느낌은 곧 약화되며 고통스러운 욕구 불만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 겉만 치장된 물질주의는 인간 정신 깊은 곳에 있는 내적 필요를 전혀 충족시켜 주지 않으며, 결코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온갖 욕망을 무제한으로 충족시키는 것은 복지에 이바지 하지도 않으며, 행복 혹은 심지어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라고 정신 분석가 ‘에리히 프롬’은 말하였다. 그러나 ‘프롬’보다 오래 전에, 영감받은 한 현인은 더욱 정곡을 찌르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이유를 알았읍니다. 그것은 이웃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들이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전도 4:4, 오늘날의 영어 역본.
낙담하고 환멸을 느낀 일부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의미한 일에 몰두함으로써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한 노력에 관해 「자기 도취의 수양」(The Culture of Narcissism)이라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일들을 개선시킬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적인 자기 개선이 관건이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한 자기 개선책에는 자신의 감정을 알게 되는 일,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는 일, ‘발레’나 허리춤을 배우는 일, 동양의 지혜에 심취하는 일이 있다. ··· 그들은 더욱 실감나는 경험들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생활의 단조로움을 없애려고 애쓰며 싫증난 욕구를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29, 39, 40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바쁜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생활 방식을 따르거나, 물질을 추구하거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일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결코 지속적이고도 진정한 행복을 움켜쥘 수 없다.
그러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데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